1919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온 민족이 일어난 3·1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대규모의 항일운동이다.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체계적이면서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 제주에서도 3·1운동을 전후로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저항한 항쟁과 독립운동이 이어졌다. 제주의병 항쟁과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제주항일운동사를 조명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한 실정이며, 독립유공자 처우 개선도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제주의병 항쟁

제주의병은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났다. 1909년 당시 의병전투는 전국적으로 1738회 발생했으며, 제주에서는 고사훈·이중심·김석윤·김만석 등의 주도로 진행됐다. 

1909년 2월 25일 '왜적을 격퇴하고 국권회복을 달성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제주전역에 발송하고 의병규합에 돌입했다. 

그러나 1909년 3월 3일 관덕정 거사를 앞두고 의병을 규합하던 고사훈·김만석이 3월 1일 일본경찰에 체포돼 3월 4일에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격문을 접한 대흘리 이장 부우기와 두모리 이장 김재형 등 많은 도민들도 의병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1977년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에는 의병항쟁기념탑을 제주도민의 이름으로 건립해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법정사 항일운동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6월 김연일·강창규·방동화 3인이 제주 산천단에서 형제의 의를 맺으면서 비롯됐다.

이들은 제주도 중문지역 법정사를 중심으로 반일의식을 고취시켜 나가다가 선도교의 제주 대표격인 박주석과 함께 운동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들은 10월 4∼5일 김연일 스님 등 30여명을 중심으로 무장항일거사를 추진했으며, "제주에 거주하는 일본 관리를 소탕하고 일본인을 추방하자"는 격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10월 6∼7일 이틀간 항일항쟁에 참여한 사람은 700여명에 이르며, 일본 경찰관의 연락을 두절하기 위해 전선을 절단했고,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주재소장 요시하라를 포박하고 주재소를 방화·전소시켰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66명이 검찰에 송치돼 재판 전 2명이 옥사했으며, 재판에서 31명이 징역형, 15명이 벌금형, 18명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징역형을 받은 사람 중 3명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 이전 일제에 항거한 단일 투쟁으로 최대 규모다. 단순한 종교적 차원의 항쟁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선 제주도민의 항일투쟁이며 국권회복운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천만세운동

1919년 3·1운동은 제주지역으로 확산됐다.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차에 걸쳐 일어났다. 

조천만세운동은 3월 16일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 됐다.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에게 3·1운동 상황을 전했고, 김시범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게 됐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제주의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2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동지를 규합했으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했다.

3월 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24일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조천만세운동은 시위 주역들이 체포되면서 종료됐으나 이후 박세현과 김여석 등을 중심으로 궐기한 기미격문의거와 지역별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해녀항일운동

제주의 해녀들은 예로부터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다. 이에 해녀들은 1920년 4월 권익 보호를 위해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조직했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조합장을 제주도지사가 겸임하는 어용조합으로 변질됐으며 조합의 횡포가 날로 심해갔다. 조합이 일본 상인들과 결탁해 해녀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던 중 1930년과 1931년 성산포와 하도리에서 조합이 경매가격을 하향 책정하는 횡포가 발생하자 1931년 6월 해녀들은 공동 투쟁을 모색하게 됐다. 

그해 12월 해녀들은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을 이용해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1월 14일에는 세화리 장날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으며, 제주도지사는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일제는 도내의 청년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저지하려는 해녀들의 시위가 일어났으나 1월 27일 종달리 해녀들의 시위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해녀항일운동은 연인원 1만7130명, 238회의 집회 및 시위를 전개한 대규모 투쟁으로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로 꼽히며,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1930년대 최대 항일운동으로 알려졌다.

△항일정신 계승 과제는

이처럼 일제의 탄압과 수탈에 항거했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희생된 도민들이 많지만 제주항일운동사에 대한 조명이나 독립유공자 처우 등은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1997년 제주항일기념관이 문을 열었지만 제주항일운동사와 관련한 기록, 자료, 사진, 서적 등은 부족한 실정이다. 
때문에 독립유공자 추가 발굴 등에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도민 관심을 유도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제주 출신 독립유공자 179명 외에 추가 발굴을 위한 연구와 고증이 요구되고 있고, 제주항일운동사 교육 및 인식 확산을 위한 서적 발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등도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훈예우수당을 월 4만원에서 6만원으로 인상하는 등 지원 확대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독립유공자를 포함한 국가유공자에게 공공시설 이용료 할인이나 의료서비스 지원 등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김경필 기자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3.1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데 시발점 역할을 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비록 임시정부 형태이긴 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을 국내외에 선포했다"며 "임시정부의 민주공화국은 예전 왕의 나라가 아닌 국민의 나라, 백서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고 피력했다.

박 센터장은 "3.1운동이 갖는 의미는 일제강점기 탄압이 심했던 1910년대 무단통치 상황에서도 결국은 전 민족적인 독립을 지향하는 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이라며 "3.1운동은 이후 1920년대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제주 항일운동 기록에 대한 추가 조사도 제안했다.

박 센터장은 "지난 1996년에 제주도에서 '제주항일독립운동사'를 펴내면서 큰 틀에서는 어느 정도 정기가 됐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며 "제주 항일운동 기록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제주항일독립운동사'는 향토사학자들과 교수 등이 힘을 모아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항일운동 관련 판결문을 입수해 만들었다"며 "하지만 판결문만으로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미결수 등의 이름이 게재된 수형인명부나 형사판결문 등 행형자료와 경찰 신문조서 등은 기록보존소에 없어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며 "행형자료와 제주도 항일운동 역사를 대조하면서 연구해야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지 못한 분들에 대한 추가 조사와 함께 선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4.3사건이나 월북 등의 이유로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지 못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독립유공자 인정도 전향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센터장은 멈춰버린 제주 항일운동사 연구 재개도 강조했다.

박 센터장은 "제주 항일운동사 연구가 거의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있다"며 "일제강점기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는 근대사 연구가도 찾아보기 힘들고 항일운동사 관련된 인물사.문화사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지 않아 아쉽다"고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독립유공자 선정에 정부나 제주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월북이나 4.3 등으로 인해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된 분들에 대한 명예회복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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