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소 18번째 증언본풀이 '배제된 희생자'목소리 풀어내
사라진 위패·인정받지 못한 후유 장애 등 '무거운 숙제'공감

"이유도 모른 채 아버지를 잃었다. 희생자라고 해서 아파도 참았는데 하루아침에 위패봉안소에 있던 이름이 없어졌다. 아버지를 몇 번이나 잃은 이 비통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나"

누군가는 '71년 전'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71년 째'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이다.

제주4·3연구소 주관으로 지난 29일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18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에 쏟아낸 것들은 여전히 날 것이고, 그래서 아팠다.

이번 증언본풀이는 4·3으로 인해 생긴 몸과 마음의 상처를 낙인처럼 새긴 체 살았지만 아직 인정받지 못한 생존자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김낭규 어르(78)신은 아직 아버지의 위패를 찾지 못했다. 김 어르신의 아버지 김대신 선생은 4·3당시 신촌초등학교 교사였다. 산으로 도피했다 총살을 당했다. 김 어르신은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할머니·할아버지까지 다 잃었다. 이후 자식들까지 연좌제 피해를 입었지만 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아버지 이름을 확인하며 아픔을 달랬었다.

"다시 아파도 좋으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다"는 김 어르신의 말에 본풀이장은 숙연해졌다.

7살 나이에 4·3을 겪은 강양자 어르신(76)은 밭일을 나섰다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다가 크게 다쳤다. 뼈에 이상이 생길 만큼 큰 부상이었지만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일로 허리에 뼈가 튀어나와 장애를 얻었지만 강 어르신은 4·3후유장애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당시 어른들이 4·3얘기를 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놀다가 다쳤다고 하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이렇게 됐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세상 물정 모르던 13살 아이가 겪었던 물고문·전기고문의 악몽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았다. 정순희 어르신(83)은 4·3당시 작은 오빠를 잃었다. 동네 청년들과 부역을 나갔다 웃었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맞았고 말리던 작은 오빠는 '도망자'신세가 됐다. 앳된 여자아이에게 온갖 고문이 자행됐다. 지금도 그 악몽으로 소스라쳐 깨고 일상생활이 힘들 만큼 고통 받고 있지만 4·3후유장애 인정은 못 받았다. 70년 넘은 상처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허영선 4.3.연구소장은 "4·3 완전해결을 말하고 있지만 아직 아픔과 고통을 털어놓지 못한 이들이 더 많고,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시간도 부족하다"며 "무겁고 아픈 숙제가 남겨진 것 같다"고 말했다.   우종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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