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제주항일기념관내 일제강점기 민족교육 자료로 이를 통해 배출된 제주 인재들은 3·1운동에 참여하거나 그 후 전개된 항일운동의 주역이 됐다.

3·1만세운동 이후 민족정신 고취·계몽 목적 야학 개설 잇따라
공동체 정신 각인 촉매 역할…해녀항일운동 씨앗 생존법 공유
'평화' '상생' '자율' 등 제주 미래 가치 중심 평가 충분해

"지금 내 속이 이렇게 캄캄합니다. 저에게 지식의 등불을 밝혀주십시오"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불붙었던 1919년 3월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한 조선인 여성이 의문사한다. 기혼자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던 때 제대로 배워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뜻을 세웠고, 유학을 다녀와 항일운동의 중심에 선 여성 선각자들을 키워낸 고 김란사 선생(1872~1919)이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꺼진 등에 불을 켜라". 알아야 살 수 있다는 진리다. 제주 섬을 흔들었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도 그러했다.

소녀회 비석

△낮은 곳에서 시작된 물결

제주에서도 대한 독립을 향한 뜨거운 가슴과 힘 있는 움직임이 있었다. 동시다발적 만세운동은 당대 지식인들이 주도했지만 제주에서는 보다 낮은 곳에서 주체로서 자각한 이들이 연대해 특유의 공동체 정신을 구축했다. 3·1운동 100주년의 미래가치를 찾는 그 중심에 '야학'이 있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1910년 3월 첫 졸업생 26명을 배출한 제주공립보통학교에 '여학생'은 없었다. 1914년 5회 졸업식에서 처음 2명의 여학생이 졸업한다. 그만큼 여성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만이 아니라 일부 선택받은 경우가 아니고는 학교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3·1운동 이후 지역 유지와 개명 지식인들이 민족운동 일환으로 학교 설립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보다 광범위한 민중 교육을 이뤄낸 데는 야학의 역할이 컸다.

전국적으로 1890년 중반 이후 야학이 등장하지만 제주에서는 3.1운동이 시발점이 됐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들이 계몽운동 차원에서 야학을 개설하고 교사로 참여했고 이는 여성들의 권익 신장과 지위 향상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제주정신이라는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됐다.

제주민의 저항사는 민중에서 출발한다. 과거 민란이라 불리는 역사에서부터 4·3에 이르기까지 계급적 갈등 보다는 외부 압력과 부당함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다. 전국적 만세운동이 오늘날 민족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줬다면 이후 제주에서 불처럼 번진 야학은 문화적 유산으로 내려오던 제주 사람들의 무의식을 공동체 정신으로 형상화하는 단초가 됐다.

수원리 야학반 학생들

△오늘 제주의 근간으로

1920년을 전후에 제주에만 20여곳 이상의 야학이 밤을 밝혔다.

1920년 이전 문을 연 '조선부녀야학'이 있기는 했다. 1919년 말 여성 문맹 퇴치와 사회계몽을 목적으로 문을 연 명신 야학소와 3·1운동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고 최정숙 선생 등이 삼도1동 향사당에 설립한 여수원 야학소는 1920년 사립 명신학교로 통합된다.

1922년 김녕청년회의 '연경야학회', 1925년 함덕 협성청년회의 노동야학회와 구좌 상도리청년회의 '상도야학회' 등이 속속 문을 연다. 추자도 청년회와 어부들이 힘을 모아 1926년 각 마을 4군데에 야학을 설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가파도에서는 개량서당인 신유의숙(辛酉義塾) 야학이 있었다. 그 불빛이 모슬포 시내에서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부녀회와 청년회, 새별소년회를 꾸려 일이 끝난 야간에 수업을 했다. 호롱불을 켜기 위한 석유값은 마을별로 모금해 운영했다.

동복리 야학소녀회는 1929년 만들어졌다. 주변 학교나 서당에 가지 못한 15세 전후 소녀들 5~6명으로 출발했다. 이후 20여명까지 수가 늘어났지만 동네 집을 돌며 수업을 받았다. 교사 중 일부가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교육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동복리야학소녀회는 동네 어른들의 친목모임인 구취회의 지원을 받았다. 공동으로 동네 공터에 잡곡을 재배해 운영비를 충당했다. 해체 때 이들 기금을 동네 향사(공회당)과 부두 건설 등에 헌금해 그 내용을 기념비로 남겼다. 보통학교처럼 교복을 제작해 입기도 했다.

조천야학소는 보다 조직적이었다. 1925년 항일운동가 김시용·김시균 선생에 의해 설립된 이후 청소년과 청년, 부녀자 등까지 아울렀다. 실력에 따라 3개반으로 나눠 수업했다.

'여수원 야학소'를 설치한 최정숙 선생(왼쪽 첫번째)의 모습

△아직 '현재진행형'

구좌읍 하도보통학교 하도강습소에 만들어진 야학당은 낮에 일하는 여성, 특히 해녀들을 위해 청년 지식인들이 열었다. '농민독본' '노동독본' 같은 계몽서와 저울 눈금 읽는 법을 가르친다. 생존 방법을 알게 되고 불의에 저항하는 방식을 공유한다.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고 부춘화·김옥련·부덕량 해녀 모두 이 야학당 출신이다. 1932년 1월 12일 최초 해녀 시위 전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지침을 만들었고 규탄집회도 열었다. 

민중사적 시점에서 해녀항일운동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시위에 모인 해녀만 700여명이 넘었지만 사전 협의한 대로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정비했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하겠다"고 외쳤다.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여성운동, 무엇보다 생존권을 위한 투쟁의 씨앗이 된 것도, 역사적 평가에서 발목을 잡은 것도 야학이었다.

당시 일본은 해녀운동의 배후세력을 찾아낸다며 야학당 교사 등 지하조직 혁우동맹과 연관한 도내 항일 인사 34명을 구금하고 실형을 선고한다. 제주해녀들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경제수탈책, 특히 노동력 착취에 대한 항거였고 공동체 투쟁이었지만 당시 야학이 사회주의 계열 청년들에 의해 개설, 운영됐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평가작업이 소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100주년 기념식에서 "3·1운동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라고 언급했다. 지금까지 100년이 아니라 앞으로 100년, 또 그 이상 유효하다는 의미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서툴지만 진심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이란 것을 확인하는데 아직 기회가 남아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주 야학들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교육내용이나 시기 등에 대한 자료도 얼마 없다. 정리하자면 농한기를 이용해 야간에 2~3시간 운영하는 형태가 주를 이뤘고 배움에 뜻을 둔 모두에게 개방했다. 보통학교나 심상소학교, 개량서당에 다니기 힘들었던 이들, 그 중 15~20세 여성이 많은 특성을 보인다.

강사 교육 수준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열정은 대단했다. 일시적으로 이뤄지는 비공식적인 교육기관이었던 탓에 일제 견제나 단속이 심했다. 섬 특유의 지리적 환경으로 외부 정보에 어두웠고 기회가 적었지만 그 것이 보다 끈끈하고 단단한 공동체, 제주 정신의 근간을 만들었다.

취재팀=고미 경제부 부국장, 김봉철 편집부 차장, 우종희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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