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일제고사를 본 일이 있었다. 학력을 검증하고 교육현장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하여 제주도 전역에서 동시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국적으로 시행된 테스트였을 수도 있다. 낯선 얼굴이 보였는데 관리 감독을 위해 나온 장학사였으리라고 짐작한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국가시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교과서에 안 나오고, 배운 일이 없는 시사문제였다. 재건을 모토로 새나라 건설을 위하여 일어섰다는 혁명정부는 선거과정을 통해서 민정이양의 명분을 쌓았다. 그리고 경제개발을 위해 새로운 구상들을 제시하고 집행하려 하였다 
 
집에 라디오도 없던 시대였고, 신문은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시골 마을에 가설극장을 세우고, 영화를 상영하던 날 봤던 대한뉴스에 그 정답이 있었다. 수출, 건설 그리고 하나가 생각이 안 났다.    
 
증산 아니고 출산
 
감독하던 선생님은 우리 편이었다. 학교에 똑똑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든지 만들어내려고 나에게 힌트를 계속 보내주었다. 차마 소리를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입모양으로 무엇인가 알려주었는데, 나는 이를 해독하지 못하였다. 결국 답안지에 수출, 건설, 출산이라고 썼다. 이를 본 모든 선생님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일이 벌어졌다. 내 사전에 증산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당시 산아제한 정책이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가던 초기였다. 선생님은 부부가 셋을 낳으면 적당하다고 자신의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엄마 아빠가 하나씩 그리고 사고를 대비하여 예비용으로 하나면 적당하다는 계산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둘만 낳자"는 구호로 보통우표가 발매되기도 하였다. "아들 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도 자주 듣던 표현이다. 그 다음에는 '둘도 많다'는 표어도 등장하였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형국이 되었다. 하나도 안 낳겠다는 부부도 있다. 
 
달라질 세상은 
 
코로나19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맑고 밝은 세상이 다시 나타날 것인가? 부정적인 진단이 나오고 있다. 이전에 비해 훨씬 조심스럽고 위축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당연하게 누리고 자유롭게 활용하던 모든 것이 그냥 무한대로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원의 낭비와 환경의 파괴로 이어진 인류 기술문명의 종착역은 파멸일 뿐이다.       
 
자녀와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시점이 되었다. 지구촌의 환경을 계속 삶의 터전으로 누리며 살기 위해서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들은 너무나도 많아졌다.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주인으로 행세한 이후, 모든 동식물은 인간을 위해 동원되며 희생되었다. 인간의 욕구가 기 준이 되어, 쓸모 있는 부분들이 극대화되었고 이를 통하여 인간에게 종노릇하는 형국이었다. 균형은 이미 무너졌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생태계가 되어버렸다.  
 
현재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최선진국이고 인류의 희망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흐뭇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이야기다. 총선 이후 정치권은 환골탈태할 것인가? 경제계와 재벌은 무한대의 지배를 벗어나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까? 권력기관들은 나라의 앞날을 거리를 두고 살피게 될까? 언론은 치우침 없이 진실과 사실에 충실한 길을 걸을까? 
 
그리고 종교계는 사회의 소망을 제대로 담아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허망한 가상세계를 그리고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볼 때마다, 암울하다. 
 
한국사회의 자체 정화능력이 어느 정도 작동할 수 있을까? 이 봄에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에 답하며 실행하는 능력과 양심을 만날 수 있을까?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는 우리들이 함께 제기하는 절박하고 진실한 물음이다. 누가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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