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아이…무위자연의 ‘유토피아’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2.원산시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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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종이에 연필과 유채. 25×37cm. 1953년 | ||
참 현실
이중섭이 총후화가였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총후화가(寵厚畵家)란 일제가 조선인 화가들에게 준 칭호였다. 조선인 화가로 하여금 조선인들에게 일본을 좋게 인식시켜 민심의 안정을 꾀하려는 의도에서 준 칭호였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이중섭이 어떻게 총후화가가 되었을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고은의 책에는 이중섭이 형을 통해서 조선인 학병 지원의 강제도 모면하고 총후화가라는 애매한 선무문화인(宣撫文化人)으로 가장되어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중섭이 실제로 일제에 협조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장에 끌려 나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총후화가로 가장했다는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된다. 그럼으로써 이중섭은 원산에 돌아와 안정을 얻고 그의 예술을 깊이 추구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 자주 나가 소를 열심히 관찰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다. 날마다 들판에 나타나서 하루해가 저물도록 소를 보고 있는 이중섭을 부근의 농부들이 처음에는 소도둑인 줄 알고 고발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소뿐만이 아니었다. 몇 달 동안이나 광석동 뒷산에 올라가 먼동이 틀 무렵의 하늘빛을 관찰했고, 저녁때마다 원산 어항에 나가 생선을 관찰했으며, 닭을 너무나 가까이 한 나머지 닭 이가 몸에 옮기도 했다고 한다. 그냥 쓱쓱 쉽게 그리면 될 것을 왜 이중섭은 이토록 힘든 관찰에 몰입한 것일까?
그것은 이중섭이 사물의 겉껍데기를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현실의 사물들을 투시함으로써 현실을 해체시킬 수 있었고, 무(無)와 같은 상태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일제의 식민지 조선)을 하나의 가현실로 돌리면서, 오로지 자신이 만들어내는 자신의 예술만이 참(眞)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중섭 작품에서 보는 그의 유토피아는 이중섭에게 있어서는 한갓 감정 따위에 지나지 않는 어설픈 낭만이 아니라 산고(産苦)를 통해서 얻은 ‘참 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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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아이와 끈」32.5×49.8 1953년(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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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어린이와 복숭아」종이에 유채. 9.5×12cm | ||
천사들
해방 후, 이중섭은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일본에 가서 미술 공부를 하고 온 그가 왜 좀 더 상급 교육기관에 들어가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고아원 교사 노릇을 했을까? 어쩌면 징병을 피하기 위하여 해방 전부터 고아원 교사직을 맡아왔는지도 모른다. 당시 교사는 일제의 징병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이런 추측은 가능하다. 어떻든 그것이 이중섭에게는 오히려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이후 그의 그림에 아이들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이중섭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한 것일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객체로 생각했을 때는 곧 싫증이 나지만, 어떤 의식이나 사랑을 통해서 자기화(自己化)했을 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중섭이 소를 닮았다거나 닭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마사꼬의 증언에 의하면 이중섭은 아이와 같았다고도 한다. 사물이나 아이들을 보는 그의 방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동네 아이들도 그러한 이중섭을 무척 따랐다고 한다. 동네 아이들의 부모들은 이중섭이 자기네 아이들을 고아원에 데려가 고아원의 더러운 아이들과 하루 종일 함께 놀게 했다고 이중섭을 찾아와 야단하며 다시는 고아원에 데려가지 못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고아원 아이들을 천사처럼 여겼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10월 최재덕과 함께 서울 미도파 백화점 지하실 벽에 그린 벽화는 (도자기에 그려진 동자상처럼) 천도(天桃) 나무에 아이들이 매달린 형상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한 아이들을 소재로 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었다.
위 「다섯 아이와 끈」이란 제목을 가진 그림에서처럼 이중섭 그림에는 이런 끈 모양의 물체가 자주 등장한다. 어떤 책에는 “아이들을 연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애매한 해설이 적혀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형상은 천사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表象)이다. 흔히 성화(聖畵)에서 날개 달린 천사들이 들고 있는 가늘고 긴 천과도 같은 것이다. 이중섭 유화 「가족」에서 더 확실히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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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종이에 연필. 1951년 | ||
주화(呪畵)
1946년 원산에서 이중섭은 자신의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 아이들과 천도(天桃)를 그려 시신과 함께 관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 그림은 후일에 그린 「두 어린이와 복숭아」와 비슷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는 원산에서 이중섭 집안일을 보아주던 사람이 부산피난시절 병든 부모 약값을 빌리러 이중섭을 찾아왔을 때 이중섭이 돈이 없어서 대신 그려준 그림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물고기나 아이들은 피안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중섭에게 있어서는 참 현실의 존재, 즉 천사들이었다. 이 그림에는 건강을 기원하는 이중섭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위 마지막 그림은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우선 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때로는 우리보다도 더 깨끗한 사제의 힘을 빌려 신에게 간구한다. 여기에 그려진 두 명의 아이는 제물을 높이 받쳐 들고 신에게 기원하는 천사들이다. 나는 이 그림의 제목을 ?기원?이라고 붙인다. 이중섭이 그린 아이는 순진무구한 존재로서 죄 많은 어른들에 대한 경종이 아닌가.
다음 23회에는 이중섭의 투계도를 해설하기로 한다.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