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아일체’의 시각으로 그림 대상을 관찰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3.원산시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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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계」 이중섭 작. 종이에 유채. 29×42cm. 1954년 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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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작도(朱雀圖) 강서중묘의 현실 남벽에 그려진 벽화이다. 강서중묘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 고분. 주작(朱雀)은 황룡(黃龍) 청룡(靑龍) 백호(白虎) 현무(玄武)와 함께 오방(五方)을 지키는 신이다. 중앙을 지키는 황룡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신이 현실(시신이 안치된 방) 사방 벽에 그려진다. 동쪽 벽에는 청룡, 서쪽 벽에는 백호, 남쪽 벽에는 주작, 북쪽 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위 주작도는 남쪽 입구 좌측에 그려진 것으로서 입구 우측에 그려진 주작과 커플을 이룬다. 이중섭이 어렸을 때 고분에 들어가 놀다가 거기서 잠이 들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의 고향 평원군이 강서군과 경계를 같이 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보아 이 고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이중섭의 털 빠진 닭 그림들이 이 주작도와 흡사한 점은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 ||
사물을 보는 눈
이중섭은 1945년 5월 원산에서 마사코와 결혼하고 처음에는 광석동 본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광석동 산중턱에 있는 한 세가(貰家)를 얻어 분가했는데 이 집에는 넓은 마당이 있어서 닭을 길렀다고 한다. 이중섭은 닭을 잘 관찰할 수 있었다. 닭이 싸우면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고 한다. 닭을 너무 가까이 한 나머지 닭 이(蝨)가 몸에 옮아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면서도 모이 주는 시간을 종종 잊어, 대신 부인이 모이를 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의 속 내용을 짚어보면, 닭을 보는 이중섭의 시각이 양계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시각과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여아일체(與我一體)의 방법이라고 할까, 물(物)의 관점이 아닌 도(道)의 관점에서 대상을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상과 나를 구별해놓고 볼 때는 나와 대상 사이에 대립이 생기지만, 근원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대상을 볼 때는 대상이 곧 나(我)이고 내가 곧 대상이다. (※ 이는 지난 22회에서 "이중섭이 현실의 사물들을 투시함으로써 현실을 해체시킬 수 있었고, 무(無)와 같은 상태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다.) 원산에 돌아온 이중섭이 일본유학시절에 비해 달라진 점은 바로 이 '사물을 보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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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 이중섭 작. 종이에 유채. 51.5×35.5cm. 1953년 추정. | ||
소련 장교 김일성
1945년 8월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북위 38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이 소련군은 군인이 모자라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흉악범들에게 군복을 입혀 급파한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이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쌀을 빼앗아갔고 공장시설물들을 뜯어갔다. 북한 사람들은 이들을 노스께라고 불렀다. 노스께는 아침부터 평양역사(驛舍) 입구에 버티고 서서 기차 타러오는 시민들의 시계를 빼앗았다. "시계 다와이!" 하면 시민들은 노스께의 총부리가 무서워서 시계를 빼줘야 했다. 그렇게 뺏은 시계들을 노스께는 손목에서부터 팔위에까지 줄줄이 차고 다녔다. 이 노스께들은 시계가 태엽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바늘이 멈추면 흔들어보거나 귀에 대보고는 고장 난 줄 알고 길바닥에 내던져버렸다. 기차 객실 안에는 시트가 없었다. 노스께들이 자기네 군용마차에 깔려고 떼어갔기 때문이다.
장화 옆에 차고 다니는 단도로 돼지고기를 베어 날것으로 먹는 이 야만인들은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 여자들을 보이는 대로 겁탈했다.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생각한 일본 여자 몇 명이 대표로 나섰다. 자신의 몸을 노스께에게 자진해서 바칠 테니 대신 가정 있는 다른 일본여자들은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조건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네 집단을 보호했다.
그런데 이 노스께들이 밤에는 평양 민가의 담을 넘어 들어와 조선부녀자들을 범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노스께가 집에 들어오려는 기색이 보이자 그 집에서는 놋대야를 두드렸다. 한 집에서 놋대야를 두드리니까 다른 집에서도 두드렸다. 온 동네가 밤중에 굿을 하듯이 놋대야를 두드렸다. 노스께들은 놀라서 도망쳤다. 다음날 공고가 나붙었다. 밤에 놋대야를 두드리면 잡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놋대야를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도 함께 내려졌다. 소련 장교 김일성이 지시한 것이었다.
세계 적화 야욕을 가진 스탈린은 북한을 그 전초기지로 삼았다. 스탈린의 뜻을 가장 잘 파악한 소련 장교(대위) 김일성과 그 휘하의 50여명은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데에 개처럼 충성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련의 세력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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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이중섭 작.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 ||
투쟁
김일성은 무산자들에게 투쟁을 선동했다. 무산자들은 주로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었고 그래서 속으로 불만이 많았던 터였다. 일제가 조선 사회의 근간인 지주계층을 자기네 편으로 회유하기 위해 비교적 후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무산자들이 핍박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세상을 뒤엎어버리고 싶었던 이 무산자들은 지주 자본가들을 내무서에 고발했다. 인민재판에 끌어내어 봉건주의 사상을 지닌 친일 반동분자라고 비판했다. 재산을 몰수하고 처단했다. 김일성은 그렇게 해서 뺏은 토지를 무산자들에게 나눠주었고 그럼으로써 노동자 농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하루아침에 북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민주적인 법 절차가 없었다. 평소 원한이 있던 사람을 반동분자로 지목하여 내무서에 고발하면 그 즉시로 끌고 가서 처단하는, 그야말로 제주 4·3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이중섭의 형 이중석도 악질 지주 자본가로 분류되어 원산 내무서에 끌려갔다.
투계도
고은의 책에는 해방 직후 원산의 미술계를 이중섭과 함께 이뤄온 한 동료가 이중섭을 다음과 같이 평석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이미 동경시대에 깊은 밤 신주쿠의 남만다방 한구석에서 베토벤의 운명을 듣고 있던 그에게서 나는 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의 원산시대는 그 모습이 거의 전율로 불타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중섭의 그림은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의 원산시대 그림이야말로 아주 위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정작 월남 이후에는 가난, 방랑 그리고 많은 악조건 때문에 원산시대의 그림 수준에 뒤졌다는 느낌이 많습니다. 그는 월남 이후 하나의 예술적 패배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중섭의 닭 그림이 투쟁적이라며 처음에는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탈린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더니 그의 상징인 콧수염을 빼고 그려 영웅처럼 보이지 않게 그렸다는 점,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더니 사양한 점 등이 그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부인이 일본여자인데다 형이 친일 반동분자라는 점, 그리고 '응향지 사건'까지 겹쳐 이중섭은 사상을 의심받게 된다. "왜 털이 다 빠진 닭을 그렸느냐?"고 문초를 받기도 한다.
이중섭이 원산에서 그린 닭 그림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지만 그가 월남해서 그린 위 닭 그림들로 그의 원산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의 투계도는 털 빠진 닭이 문제가 아니다. 실은 구도에서부터 문제가 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형의 구도로 그려졌는데, 이는 대각선 구도나 방사선형 구도 등의 대립적 구도와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조화와 화합의 구도로서 이중섭의 본심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하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