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현의 제주바다이야기] <6>우도등대에서-근대의 바다, 제국의 불빛
밤바다 밝힌 등대 100년, 해양문화 바닷길도 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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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도등대 | ||
'제국의 바다'는 등대 건설로부터 시작되었다. 침략이 되었건, 무역교류가 되었건, 해저지형에 익숙치않은 외국배가 들어오려면 등대는 필수품이었다. 가히 제국주의 뱃길을 인도하는 길라잡이로 태동했다. 어느날 갑자기 포구 앞 무인도에 일본인들이 높다란 기둥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것을 '등대'라고 부르며 수군댔다. 등대에 불이 점화되고 그렇게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수년전 인천 앞바다 칠발도등대에서는 참으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국등대 100주년 기념식이 그것. 100주년 회년은 비단 칠발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시하도등대(1909), 죽변등대(1910), 어룡도등대(1910) 등 전국의 수많은 등대들이 속속 회년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도 우도등대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지난 100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100년을 넘겼다. 우도를 찾은 것은 각별한 이유가 있어서다. 섬에 만들어진 등대공원은 우도가 처음이다. 호미곶, 부산영도, 여수 오동도 등지의 등대들이 속속 박물관·조망관·체험관 등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한 것은 근년의 일. 제주도 우도등대도 그 행렬에 동참하였는데 특기할 점은 세계의 등대역사를 알려주는 실물 모형을 제작하여 앉은 자리에서 등대 여행을 할 수 있게 했다.
상하이항의 파고다, 신화 속의 등대인 파로스, 독일의 브레머헤븐, 일본 최초의 양식등대인 츠루가만 입구의 타데이시사키, 1355년 건립된 프랑스 코르투앙, 뉴욕 허드슨강 입구의 킹스톤, 그리고 한반도의 이러저러한 등대모형이 모여있어 산교육장이다.
874년 중국 상하이의 마호강 중앙에 세워진 마호타 파고다 등대는 글자그대로 탑이다. 송나라시대(1279)까지 불을 밝히다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목탑양식인 바, 서구의 근대적인 기능형 등대와 다른 민족건축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오로지 원통형 기둥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젖어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파고다등대는 등대건축에서도 민족적 형식이 도입되어야함을 일깨워준다. 더구나 신화 속의 등대로만 알려진 파로스 등대에 이르면, 가히 빌딩 수준의 등대건축을 바닷가에 세웠음을 알게 된다.
우리 등대도 근자에 다양한 건축실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등대가 단순한 항로표지 이상의 미학적 공간으로서의 기능도 연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거북선모형의 한산도등대, 새가 올라앉은 몽하도등대, 첨성대를 바위에 올려놓은 호도등대 같은 재미있는 등대도 등장하고 있다.
민족건축양식은 아니더라도 현존하는 오래된 등대의 건축사적 의미는 대단하다. 등대건축은 1900년대 초반부터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당대로서는 최첨단의 공법이었다. 벽돌조, 철근콘크리트, 철골조 등의 다양한 소재들은 다양한 공법의 실험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로마시대나 르네상스풍을 연상케하는 등대도 많다.
칠발도등대(1905)를 필두로 팔미도(1903), 부도(1904), 거문도(1905), 제뢰(1905), 우도(1906), 울기(1906), 죽도(1907), 시하도(1907), 당사도(1909), 목덕도(1909), 하조도(1909), 격렬비도(1909), 가덕도(1909), 죽변(1910), 소리도(1910), 방화도(1911), 어청도(1912), 산지(1916), 주문진(1918), 홍도(1931), 미조항(1939), 서이말(1944) 등대 등은 대한제국기와 일제침략의 요동치는 현장을 지켜본 근대문화유산의 총아들이다. 근 10년 안으로 적어도 수십개의 등대들이 반드시 문화재 지정이 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그만큼 문화사적으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도에 왜 이렇게 수많은 등대 모형을 세웠느냐는 물음에 등대원들의 답변은 명료하다. "한국등대사가 백년을 돌파하였음은 새로운 백년을 준비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1세기가 문화의 세기인만큼 등대도 변해야 삽니다. 바닷길만 밝힐게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하는 해양문화의 바닷길도 열어야합니다".
등대의 역사 자체가 '제국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민과 호흡하는 등대'는 사실 구두선이었다. 그러나 근년들어 등대들은 분명히 변신을 시작하였다. 영도등대에서 문학인들의 시낭송회가 열리고, 우도등대에도 잠을 자면서 등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었다. 이제 바다여행에서 구태의연한 명승지 중심에서 벗어나 등대여행도 꿈꾸어 볼 일.
필자는 지인들에게 가끔 이런 농담을 한다. "대한민국 바다에서 가장 뛰어난 절경은 등대 아니면 해안초소다". 동해안의 절경마다 해안초소가 서있어 접근을 막는다면, 만이 훤히 굽어보이는 정상에는 으레 등대가 서있다. 근대적 관해의 최대 조망지는 등대일 수밖에 없다. 불빛이 퍼지자면 사방팔통으로 트인 절벽이나 산봉우리, 그도 아니면 홀로 솟은 암초 따위에 올라서야하기 때문이다.
우도등대에 오르니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바다가 열린다. 절벽 아래로 아낌없이 부딪치면서 깨져나가는 파도를 보노라니 일년쯤은 여기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조용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그러나 역할이 바뀌어 정작 등대지기가 된다면, 그렇듯 조용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 같다. 오고가는 배들이 모두 걱정거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다. 제주도에서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 중 하나에 서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우도등대는 돔형의 탑으로 1906년 3월부터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등대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다. 외해로부터 들어오는 길목의 험난한 곳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우도등대 바로 앞은 보통 물살이 아니다. 수심도 깊다. 그래서 다리를 놓지 못하고 늘 도항선으로 오고가야한다. 제주도 등대의 맏형이 된 것은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되었다.
1123년에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갔던 서긍이 남긴 「고려도경」에도 '바다길은 깊은 곳이 두려운 곳이 아니라 얕은 곳이 무섭다'고 하였다. 이른바 '배가 깨진다'고 하였을 때, 해변 근처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등대들은 이런 곳에 집중적으로 배치된다.
등대는 '낭만'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단연코 그렇지 않다. 등대에 관한 수많은 미화와 환상이 불러일으킨 결과물이다. 영국의 사학자 홉스 바움의 표현대로 '만들어진 전통'이다. 근대적 등대가 출발한 이래로 등대의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환상 창조'의 위력이 문학예술 곳곳에서 발휘된 결과이다.
우리나라에 등대가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때, 등대는 '선진기술'의 총아였다. 단순하게 불빛만 비추는 곳이 아니었다. 최초의 무선전신지국이 설치된 곳도 등대였으니,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정세의 동향을 감지하고 보고하는 중요한 목적을 지녔다. 무선국의 존재는 등대지기가 최소한 무선기술을 습득한 사람이어야한다는 말인데, 당시에 무선사는 최고의 첨단기술자였다.
그래서 일제시기의 모든 등대장들은 일본인들로 채워졌다. 비밀유지를 위해서라도 한국인은 일용직 수준에 머물렀다. 해방당시에 한국인으로서 정식 등대원으로 잔존한 사람은 고작 4인에 불과하였다. 지방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때 등대장도 초대받았으니 등대지기의 사회적 위상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조용히 살아가는 등대지기란 환상은 적어도 일제시대에는 덜 맞는다. 등대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닐수 없다. <민속학자·제주대 초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