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에 담아낸 영혼불멸의 원초적 생명

[화가 전창원의 서귀포, 이중섭을 읽다]

2008-05-14     제민일보

   
 
 

'서귀포 환상'  나무(합판)에 유채. 56X92cm. 1951년

 
 

 

 이중섭에 관한 기본 틀

1968년, 당시 용산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앞 책방에 들러 따끈따끈한 신간들을 훑어보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책 한권 사지 않고 매일 공짜로만 보니 주인 보기가 미안하지 않은가. 그래서 한 권 산 것이 「성 고은 에세이집」이었다.

책 제목이 그렇게 되어있어서 나는 '성' 씨 성(姓)을 가진 고은이란 사람이 쓴 책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이미 기인(奇人)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전국 각지에 가짜 고은들이 나타나 행세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문고판보다 조금 더 크게 나온 이 책은 고은이 제주도에 오랜 기간 머물면서 쓴 책이었다.

1973년에는 고은 著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가 출간되었다. 그 전에 신동아(新東亞)지에 연재되었던 글을 민음사가 받아서 출판한 것. 당시 미대 회화과 학생이던 나는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국문과 친구가 "너는 이중섭 같은 화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 고은의 책을 내놓았다. 신동아지를 통해 고은과 이중섭의 세계에 흠뻑 젖어있었던 그 친구는 이 책에 실린 이중섭의 사게(私偈)를 낭송했다.
 
 맑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픈 것
 아름답도다
 두 눈 맑게 뜨고 가슴 환히 헤치자
 
지금까지 시중에 나온 이중섭에 관한 책들은 전부 이 고은의 책을 기본 교재로 해서 썼거나, 기본 교재로 해서 쓴 책을 또 교재로 해서 쓴 것이다. 어느 부분이 베낀 것이고 어느 부분이 추가한 것인지를 나는 하나하나 다 댈 수 있다. 그만큼 이중섭에 관한 기본 틀은 고은이 맨 처음 잡아놓은 것이다.

 숙명의 비극자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우리나라 미술계 인사들은 '이중섭' 하면 '너무 신화적'이라고 하면서 그의 작품을 분석 평가해야 한다고 떠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고은은 이 책에서 "이제까지 이중섭은 신화 가운데서 말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신화는 실재와 동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비신화적 수정 방법'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고은이 맨 처음 이중섭에 대한 '작가론'을 쓰려고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고 한다.

그런데 작가론을 쓰다보니 고은은 이중섭이 '숙명의 비극자'여서 예술가로서의 그의 크기를 비평의 잣대로써는 도저히 잴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들은 그 자체가 이미 비평의 숙도(熟度)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잣대를 갖다 댄 자신의 비평적 사고만 허물어지더라는 것이다.

예수나 석가모니를 범인(凡人)이 비평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이중섭을 너무 신화적이라고 하면서 그의 작품을 분석 평가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그 똑똑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중섭의 작품 뭐 하나라도 제대로 분석 평가한 게 있는가? 미술계, 한마디로 말해서 젯밥에만 눈독 들인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아니었던가.

 2007년도 서귀포 이중섭세미나

2005년 이중섭 위작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2007년 9월 6일 서귀포 이중섭세미나의 한 발표자가 또 그런 상투적인 소리를 한다.

"최근 이중섭에 대한 평가가 작품보다는 그의 비극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중섭의 위치를 미술사에서 되찾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며 평가 또한 더욱 체계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 발표가 있었던 그 다음 날, 나는 신문에 이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해야 된다, 해야 된다"라고 입으로만 떠들 필요가 뭐 있는가?

이렇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당시 그렇게도 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발표자는 지금쯤 이중섭 작품을 면밀히 분석 평가하는 작업을 완료했을까?

솔직히 말하자. '공신력 있는 미술품 감정기구'를 정부차원에서(문광부 예산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떠들더니 이제는 서귀포 이중섭 세미나에까지 와서 자기네 유리한 전제 관념들만 깔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서귀포 이중섭 사업의 전국화(全國化)'인가? 조선일보사와 공동 개최해온 서귀포 이중섭 세미나 장이 벌써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숙명의 비극자 이중섭, 그의 예술과 생애를 자로 재어야만 미술사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세미나였다. 

  광인과 성자

대개의 사람들은 이중섭을 미친 화가로 알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고은이 쓴 책(또는 고은의 책을 기본 교재로 해서 쓴 책)에서 기인한다.

고은의 책에는 이중섭이 1955년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실이 적혀있다. 그러나 고은의 책에는 이중섭을 만났던 한 서귀포 사람이 그를 성자(聖者)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적혀있다.

"그분은 자세히 바라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술을 마시고 내가 폭언을 했어요. 이 피난민 새끼! 라고. 그러나 그는 투명한 소주가 반쯤 남아있는 술잔을 아주 따뜻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한참 뒤에 그분은 조용하게 웃었습니다. 나는 그 뒤로 그분이 두려웠습니다. 내가 입은 옷이 너무 비싼 옷이어서 그분의 남루한 옷을 생각하고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서귀포 선주 강임룡(康任龍)의 증언이다. 왜 이런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을까? 똑같은 글을 읽고도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불멸의 원초적 생명을 나타낸 우화(愚畵)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이중섭 그림을 보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 강임룡이 소장하고 있었던 이중섭 작 「서귀포의 환상」을 보자.

현실 외적 풍경을 그린 것이다. '열매 풍성한 바닷가'라는 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저 멀리 수평선에서 이쪽으로 날아오는 새들이 아이들에게 열매를 따 주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열매를 따서 땅에 떨어뜨려주는 새. 떨어진 열매를 줍는 아이. 들것에 열매를 담아 나르는 두 아이. 그 들것 위에 올라앉은 새. (이 새는 잎사귀를 물고 있다. 이것은 메시지를 상징 표현한 것. 아마도 아이에게 어떻게 하라고 작업지시 같은 것을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닷가에 누워 팔베개를 하고 있는 아이도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이들 전부가 일하는 모습 같지가 않다. 놀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아이는 이 그림이 보여주는 호모 루덴스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림 속에 그려진 형상과 색(푸른 바다와 노란 하늘, 커다란 열매, 하얀 새와 아이들)은 범신론적인 의미나 고대 샤머니즘적인 의미의 해석 없이는 완전히 해득될 수 없다. 1946년 원산에서 그의 첫아들이 죽었을 때 그가 아이의 관속에 아이들을 그린 그림과 불상을 넣어준 것은 그런 그림이 정말로 죽은 아들의 친구들이 되고 불상이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신은 그가 원초적 생명으로서의 주화(呪畵)를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대로 믿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만난다는 영혼불멸의 신앙.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신앙의 대상이었다. 고분벽화들은 그러한 신앙적 상상력에 의해 사물(死物)의 활물화(活物化)로서 생겨났던 것이다.

이중섭 그림은 이러한 원초적 생명으로서의 태고적 그림으로 환원해야 할 생명적 우의(寓意)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석태는 "새들이 나무의 열매를 따주는 화면 위쪽은 환상에 해당하며, 땅의 아이들이 열매를 모아 옮기는 화면 아래쪽은 현실에 해당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고 했다.

또 오광수는 "구성의 밀도는 다른 작품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아마도 지나치게 서술적인 설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중섭 고유의 탄력 있는 구성미는 어디고 찾을 수 없다.

모든 대상은 나열될 뿐 대상간의 긴밀한 조응도 느슨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톤은 꿈꾸는 듯한 몽롱한 분위기다. 노란 기조색이나 바다의 물빛이 무르익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