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환상」 샤머니즘으로 빚어낸 '풍요와 평화'
노란하늘은 원초적 시간·공간 표현된 색
![]() | ||
| 「서귀포의 환상」 나무(합판)에 유채. 56×92㎝ 1951년 | ||
이중섭 그림에 대한 안목
도대체 이중섭 그림 어디가 훌륭해서 다들 그렇게 '이중섭 이중섭' 하는 걸까. 「 이중섭 그림을 보면 데생 틀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비례는 물론이고 해부학적으로도 틀린 곳이 수두룩하다.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은 국민화가라면 다양한 선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할 텐데, 그의 선은 그저 힘차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없다.
색깔도 마찬가지이다. 「서귀포의 환상」을 보자. 아이들 그림자의 길이가 짧고 바다색깔이 푸른 것을 보면 한낮의 풍경을 그린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하늘에는 노란색이 칠해져 있다. 이 노란색 하늘은 황혼녘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그려진 사물들 간의 시간대가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요즘의 사생대회에 나가서 이런 그림을 그려낸다면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틀림없이 낙선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 이중섭 그림 「서귀포의 환상」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다. 구상이 서귀포에 와서 선주 강임룡에게 "내 친구 이중섭 그림을 좀 줄 수 없겠느냐"고 하자 강임룡이 "두어 점 골라서 가져가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이중섭 그림에 대한 서귀포 사람의 안목을 짐작할 수가 있겠다.
지금 사람들은 이중섭, 그 유명한 화가가 그린 거라고 하니까 눈에 꺼풀이 씌어 무조건 잘 그린 그림으로 보지만, 이중섭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결코 잘 그린 그림으로 보지 않았다.
강임룡은 「서귀포의 환상」이 나중에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환소송을 걸어 구상으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았다고 한다. 구상은 양심 있는 지식인인지라 아름답게 해결해준 것이었다.
노란 하늘에 숨겨진 비밀
나는 지난 33회에서 「서귀포의 환상」은 현실 외적인 풍경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해 최석태 저 「이중섭 평전」에는 "화면 아래쪽은 현실에 해당하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고 적혀있다. 왜 최석태는 화면 아래쪽을 현실로 보았을까?
나는 「설교 후의 환영(幻影)」이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이 그림은 고갱이 1888년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브르타뉴 퐁타방)에 내려가 그린 것으로서 설교시간에 들었던 성서의 내용이 마을사람들 앞에 환영으로 나타난 기적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날개달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화면 오른쪽 상단에 그려져 있고 강 건너에는 소가 한 마리 그려져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의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보고 있는 환영을 그린 것이다. 화면 위쪽에는 환영이 그려져 있고, 아래쪽에는 마을사람들(현실)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서귀포의 환상」은 「설교 후의 환영」과 다르다. 화면 아래쪽도 위쪽과 마찬가지로 환상을 그린 것이다. 들것으로 열매를 나르는 아이들이 들것 위에 올라앉은 새와 서로 영적(靈的)인 교통을 하고 있다.
새가 열매를 떨어뜨려주고 아이가 그 열매를 주워 담는가 하면, 열매가 달린 가지를 꺾어 내리는 두 아이도 있고 한가롭게 누워서 낮잠을 자는 아이도 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일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는 모습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이들은 낱낱의 생명체가 아닌 온 생명체로서 신화에서와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서귀포의 환상」은 원초적 시간과 공간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푸른 바다'와 '노란 하늘'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뭉크의 「절규」에 칠해진 핏빛 하늘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면, 이 「서귀포의 환상」에 칠해진 노란 하늘에서는 '풍요와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노란색은 '표현된 색'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청룡도」. 강서군 우현리 대묘 현실 벽화
1952년 아내와 자식을 일본에 보낸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1953년 천신만고 끝에 여권을 얻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여권이 선원여권이어서 상륙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장모가 농림대신의 보증을 얻어 '1주일동안'이라는 조건부 상륙허가를 받아주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동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킨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예술가로서의 생명도 끝이라고 생각한 장모는 한국에 돌아가서 정식 여권을 받아가지고 다시 오라고 했다. 부인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지금 같으면 일본국적을 취득하고 영주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당시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중섭은 1주일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때 일본에 가지고 갔던 은지화 80여 점을 이중섭은 아내에게 맡기면서 "벽화 그릴 밑그림이니 잘 보관하라"고 했다 한다.
'벽화'라고 하면, 우리는 공공건물 벽에 페인트로 그린 커다란 그림을 연상하는데, 당시 이중섭이 말한 벽화는 그런 벽화가 아니라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샤머니즘적인 벽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평양 근교 평원군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구려 고분(古墳)에 자주 놀러갔다고 한다.
평원군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강서군 우현리에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고구려 고분 3기가 삼각형으로 배치되어있었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대묘(大墓)는 봉토(封土)의 지름이 58m이고 높이가 10m였다. 남쪽 입구에서부터 굴 모양의 연도(羨道)를 따라 무덤 안으로 들어가면 시신이 안치된 현실(玄室)이 나온다.
현실은 동서의 길이가 3.4m이고, 남북이 3.45m이며, 높이가 3.8m이다. 이 현실 벽에는 무덤의 주인공을 지키는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남쪽 벽에는 붉은 봉황(朱雀) 한 쌍이 입구 좌우에 그려져 있고, 동쪽 벽에는 푸른 용(靑龍)이, 서쪽 벽에는 흰 호랑이(白虎)가, 북쪽 벽에는 거북과 뱀 모양의 현무(玄武)가 그려져 있다. 또 화강석을 얹은 두팔천장에는 인동초(忍冬草), 연꽃, 산, 용, 봉황, 기린, 선녀 등이 그려져 있다.
중묘(中墓)는 두팔천장이 아니고 연도에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지만 대묘와 비슷하다. 천장 중앙에 연화가 그려져 있고 그 주위에는 해, 달, 봉황, 인동(忍冬), 인동당초(忍冬唐草)가 그려져 있다.
철필로 그린 것 같이 선(線)이 힘차고 날카로우며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 고분 현실 안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장방 안이나 장방 밖에서 주인공의 분부를 기다리는 듯 직분에 맞게 앉아있거나 서 있는 여러 시자(侍者)와 시녀(侍女)를 볼 수 있다.
위당당한 행렬도, 힘차고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수렵도, 전투도 외에도 씨름, 무악, 남녀인물상, 수문장 등 실생활을 묘사한 장면들이 그려져 있고, 각종 건물도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해, 달, 별을 그려 하늘, 즉 천체를 표시하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천(飛天) 선인(仙人) 등도 그려져 있다.
이렇듯 고구려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만난다고 믿었던 것이다. 무덤에 그려진 벽화들은 그러한 신앙의 상상력에 의해서 생겨난 그림들이었다.
피안의 존재들
마찬가지로 「서귀포의 환상」에 그려진 아이들은 현실의 아이들이 아니다. 보라. 행동은 있지만 얼굴에는 표정이 없지 않은가.
이미 죽은 피안의 존재들이다. 그림이라고 하는 원초적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른은 아이로 태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중섭은 죽은 어른들을 이렇게 아이들로 다시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들은 서귀포 사람들로서 4·3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일 수도 있고, 한국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이들이 생전에 누리지 못한 '풍요와 평화'를 이중섭이 이들에게 기원해준 샤머니즘적인 그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