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환상」이 담아낸 '숭고·순수·너그러움'

사회에 촛불을 밝히는 힘 예술

2008-06-04     제민일보
   
 
 

「서귀포의 환상」  나무(합판)에 유채. 56×92cm. 1951년

 
 

 

이중섭 그림 「서귀포의 환상」에는 열매를 수확하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열매를 따려고 나무에 올라간 아이, 새를 타고 공중에 올라간 아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 가지를 꺾어 내리는 아이, 새가 떨어뜨려준 열매를 광주리에 주워 담는 아이, 들것에 과일을 가득 담아 나르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낮잠을 자는지 일은 하지 않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는 이 아이를 보면서 우리는 다른 아이들도 기실은 한가롭게 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이 그림이 생존경쟁을 하듯이 아득바득 일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만일 누워있는 아이가 그려지지 않았더라면 이 그림의 분위기는 어떠했을까. 누워있는 아이를 손으로 가리고 그림을 보면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렇다. 이 누워있는 아이는 '한가로움'을 극명하게 나타내주는 중요 인자이다. (※ 이렇게 이중섭 그림에는 괜히 쓸데없이 그린 것이 하나도 없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그린 것들이다.)

아이들과 함께 이 그림에 그려진 또 하나의 중요 인자는 하얀 새들이다. 저기 수평선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새들. 이렇게 날아온 새들은 화면 중앙에 그려진 새처럼 필경엔 아이들을 등에 태우고 열매를 따주려고 할 것이다.

또는 그 왼쪽에 그려진 새처럼 부리로 직접 열매를 따서 아이들이 있는 땅바닥에다 떨어뜨려줄지도 모른다. 들것 위에 올라앉은 새를 보자. 잎사귀를 입에 물고 있다.

이 잎사귀는 '메시지'를 상징한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운반하고 어떻게 보관하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쯤으로 해석된다.

작가적 진실

이렇게 아이들과 새가 어우러져 있는 상황을 우리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누가 이 그림에다가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명제를 갖다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의미로써 '환상'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것은 환상이다'라고 누가 말했다면 그 자신은 이 환상 속에 빠져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 이 상황을 바깥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시하면서 '저것은 환상일 뿐이야'라고 말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작가 이중섭도 이 같은 상황을 과연 '환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에서 하얀 새는 아이를 등에 태워 하늘을 날거나 높은 곳에 있는 열매를 따서 아래로 떨어뜨려주는 능력자(또는 조력자)로 그려져 있다.

아이들은 이 하얀 새가 자신의 곁에 있는지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난 34회에서 이 하얀 새는 4·3 또는 6·25(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상징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이중섭이 서귀포에 와서 그린 그림들 중에 4·3 성(城)을 쌓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그린 것도 있고 한국전쟁에 나가 전사한 사람들의 초상을 그린 것도 있기 때문에 그리 억지스러운 추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죽은 이들의 영혼이 육신과 결합하여 다시 살아날 것임을 이중섭이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해방직후(1946년) 원산에서 그의 첫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죽었을 때도 군동화(群童畵)를 그려 불상과 함께 관 속에 넣어주었던 것으로 조사된다.

구상의 증언에 의하면 아들이 저승길 갈 때 심심해 할까봐 친구 하라고 그렇게 그려서 넣어준 것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성애 정도로도 볼 수 있겠지만, 이중섭의 경우는 좀 남달랐던 것 같다. 그는 이런 그림이 정말로 죽은 아들의 친구가 된다고 믿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보라. 이중섭은 멀리 수평선 너머로부터 날아오는 한 무리의 흰 새들을 여기에 그려 넣음으로써 4·3 혹은 한국전쟁 때 죽은 이들의 영혼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는 이들의 영혼과 육신과의 결합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죽은 이들을 여기에 다시 살려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시추에이션은 영혼불멸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중섭에게 있어서는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었을 것이다.

예술은 예술만의 방식이 있다

이 그림에서 열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수확의 대상물로서 '풍요'를 상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열매의 상징적 의미가 여기서 그친다면 이 그림은 누구나 다 그릴 수 있는 그저 일반적인 평범한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숨겨진 의미로서 '생명'을 상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생명은 아이들이 (그림에서) 구하고 있는 것인 동시에 작가가 희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중섭은 소남머리에 끌려가서 무참히 학살당한 서귀포 4·3 희생자들과(본 연재 29회 참조) 해방 직후 원산 내무서에 끌려가서 처형당한 형 이중석을 생각하면서(21회 참조)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완전히 무너지고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던 그 시대에 예술가가 진정으로 외쳐야 할 것은 '생명'이 아니고 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서귀포의 환상」은 도대체 뭐가 잘 그려진 그림이란 말인가. 아이들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닌가. 어떻게 죽은 이의 영혼이 육신과 결합되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생명과학자가 보면 웃을 일이고 정신의학자가 보면 병자 취급할 일이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만의 평가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과학의 그것과 다르고, 종교나 철학과도 또한 다르다. 예술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술을 다른 방식으로써 평가하려 든다. 예술은 아름다움 외에도 숭고함이라든가 신비함, 우미함, 장엄함, 비장함 등 무궁무진한 미적 가치로써 평가해야 된다.

이중섭 작 「서귀포의 환상」이 가지고 있는 미적 가치는 '환상적임'이 아니다. 여기에는 생명존중의 '숭고함'이 있고,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배제된 '순수함'이 있으며, 잘못된 권력자나 원수를 용서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오죽했으면 이중섭이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아마도 지금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되고 있는 촛불 문화제 참가자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경제와 실용을 앞세워 국민의 생명까지도 자본의 논리로 몰아가는 정부의 독단적인 쇠고기 수입방식. 국민의 뜻을 묵살한 정부. 여기에 우리국민들이 촛불을 켠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이중섭은 당시 혼자서 이런 촛불시위를 한 것이다.

촛불은 인간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난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로도 안 되고, 그 어떤 것으로도 안 될 때 사회에 촛불을 밝히는 것이 예술이다. 물론 정치나 권력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는 사이비 예술은 여기서 제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