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왜곡 통해 전하려한 굴하지 않는 의지

「소와 아이」 아이가 무거운 소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 신화적 표현

2008-09-10     제민일보

   
 
 

소와 아이」 29.8×64.4㎝. 나무판에 유채. 1954

 
 

「소와 아이」

지게를 지겟다리로 받치듯이, 쓰러지려는 소를 아이가 등짐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소의 뒷발이 모두 땅에서 20~30㎝ 가량 들려있다.

뭐? 아이가 소를 받친다고? 아무리 작은 소라고 해도 300㎏은 넘을 텐데, 어떻게 아이가 소의 사타구니에 들어가서 소를 떠받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중섭 그림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제주신화 열두본풀이 중 세경본풀이에서는 정수남이가 아홉 마리의 소와 아홉 마리의 말을 먹어치우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도 익었는지 설었는지를 맛보면서 말이다. 작박같은 손콥으로 쉐가죽 카죽을 몬딱 베껸 노아두언 / 멩게낭을 석탄불 와랑와랑 살라 노아 / 익어시냐 한점 설어시냐 한점 먹단보난, / 쉐 아홉도 다 먹었구나. 아홉도 다 먹었구나.

물론 왜곡이다. 식욕의 상징적인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을 있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신화의 왜곡이라면, 상징과 왜곡과 변형으로써 자신의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현한 이중섭의 「소와 아이」는 마치 신화(神話)를 보는 것 같다.

굴하지 않는 의지

1952년 봄, 송환선을 타고 일본 친정에 돌아온 마사꼬의 건강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몸은 빼빼 말랐고 각혈까지 심하게 했다고 마사꼬의 조카(언니의 딸)가 2003년 필자에게 말해주었다. 태현과 태성도 벌레가 피부를 파먹은 것처럼 영양이 실조된 상태였다고 한다.

1953년 4월 20일, 대향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도 '죽을 고비'란 말이 나온다. "원산, 부산, 제주도까지 헤매면서 온갖 죽을 고비를 다 넘겨온 대향과 남덕의 애정은…"

1953년 여름, 일본에 간 이중섭은 아내와 장모가 자신 때문에 책방 외상값을 갚느라고 삯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돈을 벌어가지고 일본에 가서 책방 외상값도 갚아주고 가족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중섭은 통영과 진주를 거쳐 1954년 7월11일 서울 누상동 집으로 이사를 간다. 거기서 소품전 준비를 하면서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① 7월 13일자 편지에는 서로 힘내자는 글이 적혀있다. "내일부터는 혼자서 서울에선 최초의 소품전을 위한 제작에 들어가오. 그립고 가장 사랑하는 남덕군, 진심을 다해서 한없는 응원을 부탁하오. '아고리군, 힘내라'고. (중략) 나의 소중하고 귀여운 남덕군, 힘을 냅시다. 태현군, 태성군에게는 이번에 꼭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서 보내겠다고 전해주시오." (*'아고리'는 이중섭의 별명)

② 8월초에 보낸 편지에도 힘을 내라는 글이 적혀있다. "작년 8월에 당신과 태현이와 아고리군 셋이서 히로시마로부터 도쿄로 가서 꿈과 같은 닷새 동안을 보내고 온 일을 지금 생각하고 있소. (중략) 오늘로 일 년째가 됩니다. 일 년, 또 일 년, 이렇게 헤어져서 긴 세월을 보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함께 있지 않아선 안 되오. 당신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마음이 들떠있는가를 생각해 보구려. 힘을 내주시오."

③ 8월 12일자 편지에는 더욱 더 힘을 내어 버티자는 글이 적혀있다. "나의 생명이오, 힘의 샘, 기쁨의 샘인 더 없이 아름다운 남덕군, 더욱 더 힘을 내어 서로 만나는 성과를 기약하고 버티어 갑시다. 우리들 서로의 지성이 오래잖아 이루어져 하나로 맺어질 때까지 좌절하지 말고 노력합시다."

④ 9월, 한가위에 보낸 편지에는 "이제 한 고비만 참으면 되오. 바짝 힘을 냅시다."라고 적혀있다.

⑤ 10월에 보낸 편지에도 한 고비만 넘기면 가족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아고리는 매일 밤낮없이 계속 제작에 여념이 없소. 이제 한 고비의 분투로 노력의 성과를 쟁취하리다. 태현이와 태성이한테는 아빠가 바빠서 그림을 그려 보내지 못한다고 전해주시오. 하루 종일 얼굴도 못 씻는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오. (중략) 소품전은 추워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열지 않으면 안 되오. 그러기 때문에 서두르고 있는 것이오. 한 고비만 넘기면 소중한 당신과 아이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정말인가 싶구려."

⑥ 그리고 11월 21일자 편지에는 소(牛)에 비유한 글이 나온다. "아고리군은 그저 편하게 지내면서 제작을 하는 것이 아니오.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 (중략) 힘을 내어 버티어봅시다."

   
 
  「망월」 캔버스에 유채. 1940년 자유미술가협회전 출품작. 원작 망실  
 

중복 표현

「소와 아이」에서 소는 이중섭 자신을 상징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를 받쳐주고 있는 아이는 누구를 그린 것일까? 그것도 이중섭 자신을 그린 것이다.

어떻게 한 화면 안에다 이중섭 자신을 둘씩이나 등장시킬 수 있는가? 이 같은 중복 표현은 이중섭이 1940년 일본유학시절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던 「망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위 그림 참조).

벌거벗은 여자는 마사꼬를 그린 것이다. 마사꼬는 동물의 앞다리를 베고 누웠는데 이 동물은 이중섭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한 쌍의 새가 그려져 있다. 달을 보고 우는 이 발정기의 새는 이중섭과 마사꼬를 상징적으로 중복 표현한 것이다. (※ 자세한 내용은 본 연재 제14회 참조).

「소와 아이」 원화는 지금 서귀포시 이중섭미술관 '해후 57'展에 전시되어있다. 그런데 전시도록에는 '향토적인 내용의 작품'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소와 아이가 마치 친구처럼 어우러져 있다. 소가 쉬려고 막 누우려는 순간 소의 뒷다리 사이로 들어간 아이는 같이 놀자고 장난을 걸고 있다. (중략) 아이와 어우러져 있는 소는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장난기의 상황을 묘출한 것이다."

이 해설은 그림의 주제파악은 물론이고 형상조차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적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