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학살의 터가 평화와 상생으로 꽃피우다

[국제평화 르네상스 제주] 2. 한국사회와 다크 투어리즘 ④고양금정굴학살사건 현장

2008-11-03     현순실 기자
   
 
  ▲ 고양금정굴 학살 희생자 위령제전  
 
지난주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에 이어 이번주는 고양금정굴학살사건 현장을 찾았다. 이곳은 50여년전 민간인 수백명이 이유도 없이 집단학살된 현장이다.  전쟁의 광기가 빚어낸 참극이 오랜 세월동안 제대로 된 진상조차 밝혀지지 못하고  묻혀 있었다. 금정굴 학살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고 있다. 1년여의 시간이 걸렸으나 국가의 공식 사과도 받아냈다. 대립과 학살의 금정굴이 뜻있는 시민들에 의해 화해와 상생, 평화의 공원으로 조금씩 거듭나고 있다.

#고양금정굴 학살사건

경기도 일산서구 탄현동 중산마을 1단지 건너편. 탄현근린공원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의 산책로로 알려진 곳이다. 제주의 오름처럼 아담한 산으로 둘러싸인 탄현근린공원 입구에는 '금정굴'푯말과 함께 기괴한 목각 장승들이 사람들을 맞고 있다. 장승들은 그곳에만 있지 않다. 산책로를 따라 오른 정상에도 그 장승들은 행인의 시선에 와 박힌다. 장승뿐인가. 솟대들과 신목, 유골 및 유물사진 전시까지, 금정굴의 진실을 알리는 상징물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금정굴에서는 과연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왜 장승들은 마치 세상을 비웃듯 서 있는 것일까.

제58주기(제16회) 고양금정굴학살 및 고양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위령제전추진위원회에 따르면, 고양금정굴 학살사건은 1950년 9월 28일 전후부터 10월말 사이에 경찰, 치안대, 태극단 등이 고양 파주지역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1000여명(유골 최소 153구 발굴)을 이곳에서 부역혐의로 학살한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특히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은 물론, 개인감정으로 지목된 무고한 사람들인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도 상당수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정굴 학살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43년. 과거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공인될 때까지 다시 14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여기에 국가의 공식 사과를 받아내는 데 또 1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이런 참극이 50년이 넘은 세월동안 제대로 된 진상조차 밝혀지지 못한 채 묻혀온 사실은 크나큰 비극이다.

#"산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

'금정굴'에 사람들이 모였다. 올해는 금정굴 학살사건 발발 58주기, 희생자 위령제전은 16회째(9월27일)가 된다. 고양금정굴유족회·고양금정굴사건공동대책위원회 등이 고양금정굴학살 희생자 위령제전을 묵묵히 봉행해왔다.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금정굴'팻말만 덜렁 있는 이곳이 "너무나 쓸쓸해 보여"조형물 40여기를 세웠다. 2001년의 일이다.

 국가나 지자체에는 일체 도움을 구하지 않은 채였다. 새 모양의 솟대와 기괴한 얼굴모습을 한 장승들, 벽사진 등 조형물들 때문일까.  '그때'의 참상을 알리는 금정굴학살 현장 주변에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제58주기(제16회) 고양금정굴학살 희생자 위령제전 및 제1회 고양지역 부역혐의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고양시 31개 시민단체와 유족들이 참가했다. 국회의원, 시의원들도 눈에 띄었다. 고양시 지역 역사에 관심있는 교사들도 학생들을 대동하고 위령제전을 찾았다. 

고양금정굴유족회, 고양금정굴사건공동대책위원회가 위령제전은 봉행하는 동안, 장승들이 어른댄다. 세상을 비웃는 듯했다. 그 얼굴들은 "우리 묻어놓으니, 그래 니들은 잘 살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대립과 학살의 금정굴. 온갖 사과와 위로가 난무한다해도 억울한 생명들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유족들의 한이 다 씻길 리는 더욱더 없다. 신목에 새겨진 문구"산자들이여, 우리를 기억하라"는 살아있는 자에게 역사와 사회와 인간,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게 했다.

금정굴은 희생자들의 한과 고동을 보듬어 안아주지 못했던 자들에게 성찰의 기회와 화해와 상생, 나아나 평화의 공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열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자리다.

이춘열 고양금정굴학살사건대책위원장은 "금정굴 일대 13만평 부지에 평화공원 조성계획안을 고양시에 제시한 상태"면서 "아직 금정굴학살 현장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성계획이 확정되면 이곳은 소박한 위령공원이면서 평화공원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권평화예술제, 아픈 역사 보듬다

금정굴 현장에서 위령제전을 지낸 행렬은 다시 일산문화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위령제 본행사인 인권평화예술제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영화제와 사진전으로 마련된 인권평화예술제는 학살과 인권에 대한 고발과 성찰, 아동인권의 실상, 그리고 평화와 전쟁, 타인간의 거리 등에 대한 화두로 진행됐다.

유족들에게 이날 위령제전 만큼 감회가 새로울 날이었다. 정굴학살 사건 이후 처음으로 국가 공권력 행사에 대해 사과가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그 기대가 일산경찰서(서장 이기태)가 정부 대신 대독하면서 '사과'대신 '유감'을 표함으로써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마임순 금정굴학살 희생자유족회 총무는 "그래도 안심이다 된다"며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마 총무는 "얼마전만해도 우익단체들이 유족들을 향해"빨갱이 ××들"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면서 "지금은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많이 가셨다. 특히 뜻있는 분들이 평화공원을 조성해 억울한 넋들을 달래주려 노력하는 모습들이 늘고 있어 유족의 한사람으로서 고마울 뿐이다.  소원이 있다면 평화공원이 조성돼 화해와 상생, 평화가 가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반드시 이룰 것"  
<인터뷰> 서병규 고양금정굴학살 유족회장

   
 
  ▲ 서병규 유족회장  
 
  "그때 충격으로 어머니는 실신하셨어요. 어머니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셨습니다. 저도 20여년전부터 신경성난청과 심장병을 앓고 있습니다. 금정굴학살 사건은 희생자들뿐 아니라, 생존자들에게도 숱한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1950년 9월28일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 당시 아버지와 큰형, 세째형을 한꺼번에 희생되는 참극을 당했다는 서병규 금정굴학살 유족회장(73).

서 회장은 당시 시신을 찾으러 금정굴에 갔다가 "나를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게 됐다고 한다. 주민 수백명이 주검으로'엉겨붙은'그곳에 놀랍게도 주민 1명이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그 주민은 사람들이 희생될 당시 20미터 되는 굴의 높이가 희생이 끝난 뒤에는 3미터밖에 안되더라는 얘기를 했다. 정말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금정굴에서 학살됐는지, 참 억울하고 통탄할 노릇이었다"

서 회장은 그 이후로 금정굴을 가지 않았다. 금정굴 학살현장에 갔다는 이유로 혹여 '어떤 이'들로부터 가해를 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금정굴을 찾은 것은 학살사건이 발발한 지 43년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 서 회장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바람을 남겼다.

"이제 누굴 원망하고 미워하고 원통해하고 싶진 않다. 제주에도 4·3사건이란 아픈 역사가 있다고 알고 있다. 4·3사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들었다. 금정굴학살 희생자 유족회의 바람 역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다. 유해(1995년 유족회가 직접 발굴한 결과, 153구 발굴)들의 정신적 안식처 마련, 위령탑 건립, 평화공원 조성을 위해 유족회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