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 역할을 해야지요"

[허영선이 만난 사람] 작가 조정래

2009-02-12     허영선

이 땅의 80년대를 건너면서 그 책 한권 보듬지 않은 이 있을까. 얼어붙고 갈라터진 저 산맥의 등줄기같은 우리 근현대사, 그 질곡의 역사를 유장하게 관통해간 대하소설 「태백산맥」. 내친김에 이후의 「아리랑」 「한강」까지 그 작가의 3부작으로 함께 들어간 이들 적지 않으리. 마흔에 그 격랑속으로 온 몸을 던졌고, 헤쳐나오자 예순. 20년 '글감옥'에 갇혔던 그 세월의 무게만큼 한칸 한칸 손으로 메꿔낸 원고지는 켜켜이 쌓여 올라가 키 높이만 5.5m. 대한민국 아무리 키 큰 사람도 넘지못하며, 3층 빌딩도 채 넘지 못했다. 우리 분단문학사를 다시 쓰게한 시대의 작가 조정래. 그가 이룩한 문학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역사 인식에 눈을 뜨게되고, 다만 먹먹해질 뿐이다. 한 인간이 농부의 쟁기처럼 펜으로 일궈낸 치열성 앞에서. 한 작가가 도달한 그 문학적 생의 산맥 앞에서.

   
 
 

 작가 조정래는

 1943년 전남 승주군 선암사에서 출생. 1948년 여순사건을 순천에서 겪었고 1953년 작은 아버지들이 살고 있던 벌교로 이사. 보성고,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단편집 「어떤 전설」 「20년을 비가 내리는 땅」 「황토」 「한, 그 그늘의 자리」, 중편집 「유형의 땅」, 장편 「대장경」 「불놀이」 「오, 하느님」 「인간연습」 등, 대하소설 「태백산맥 」 「아리랑」 「한강」 출간. 1990년 대하소설 「아리랑」 집필위해 중국, 만주, 동남아일대, 미국, 하와이, 일본, 러시아 연해주 등 취재여행. 우리 대하소설로는 최초로 「태백산맥」, 「아리랑」이 일본어판, 프랑스어판으로 완역 출간. 현대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동국문학상, 단재문학상, 2003년 동리상, 2006년 제11회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지난해 11월, 전남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그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이며 그 작품의 작가가 자란 남도 들판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세워졌다. 이로써 조정래는 2003년의 '아리랑 문학관'에 이어 두 개의 개인 문학관을 갖게된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1300만부 팔렸다고하자 독일의 기자가 숫자를 다시 써보라고 했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그 소설의 작가 조정래. 이 겨울, 서울의 분당선을 타고 가 그를 만났다. 소설만큼 그의 언어는 맛깔나고, 거침없고 단호했다. 허나 끝내 손자이야기에 이르자 이 대하작가 정말 행복한 표정. '손자란 신이 노년에 내린 최고의 선물'이란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지하철. 내 앞에 앉은 한 중년 여성, 독서에 푹 빠져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듯 때묻은 일련번호 딱지. 그녀 손에 들린 책은 그 작가의 「아리랑」 2권이었다.

# 지난해 11월 벌교에 '태백산맥 문학관'

"벌교가 고맙지요. 그러니까 '태백산맥 문학관' 시작을 한 것이 15년전이죠. '아리랑 문학관' 훨씬 전에. 「태백산맥」이 1994년에 고발당해 11년만인 2005년에 무혐의가 됐거든요." 이 문학관으로 전 생애를 바쳐 글을 써온 작가는 영육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장기수들이 감옥에서 나와 「태백산맥」 「아리랑」을 아껴가면서 읽었다고 할 때, 결혼하는 부부가 책을 합치며 둘 중 서로 '네 것 버려라'며 다투다 결국 같이 놓았다고 할 때, 그만한 격려가 어디 있겠는가. 작가의 혼신이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므로.

태백산맥 문학관에는 그의 원고말고, 「태백산맥」 필사본 3개를 더 볼 수 있다. 아들이 쓴 것, 며느리가 쓴 것, 또 하나는 조정래를 사랑하는 모임인 '조사모' 카페의 독자들이 한 파트씩 119명이 필사를 한 것. 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일. 또한 두 편의 유서가 있다. 한 작품을 쓰는 동안 사회적인 위해를 당하면서 언제 죽을지 몰라서 썼던, 1996년과 1998년의 것이다. 고발장, 취재노트, 그림, 취재할 때 그린 지리산 약도 등도 촘촘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보면 안다. 특히 소설을 쓰고 싶은 이들은 한번쯤 '아리랑문학관' '태백산맥문학관'에 가보면 결정날 것임을. "그러니까 그 앞에 서서 할 자신이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야 해요. 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시작하는 거죠. 나는 이렇게 고통당해서도 쓰겠다하면 할 것이고, 못하겠다고 포기할 수 있을 것이고. 본래 그렇잖아요. 뭔가 되고 싶다고 겉만보다가 속을 들여다보면 포기하고 싶은 것처럼. 그럴 땐 빨리 포기해야해요. 그래서 어느 평론가가 그랬어요. '작가가 지속적인 열정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곧 능력이다'. 의지력과 집념, 두가지 노력이 합해져 열정이 되는거죠." 그는 확고하다. 한 작가의 작품이 탄생된 전 과정을 보며 분단의 쓰라림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인식하게되고, 통일에 대한 필연적인 사명 등을 사람들이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문학관이 갖는 존재의 의미가 아니겠냐고.

# 시인과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대하소설 작가로

시조시인이던 아버지 따라 마실갈 때도 시를 줄줄 외던 소년은 초등학교 4학년때 이미 개인문집을 묶었다. 시험지 등판에는 글이 없어서 그것을 변소에 가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 종이에  동요, 동시를 쓰면 아버지가 실로 꿰어 주었다. 일기 써오라고 방학숙제를 냈더니 대학노트 2~3장씩 무려 2∼3권을 써내 단연 분량으로만도 1등을 차지했다던 소년 문사. 화가를 꿈꾸던 고교시절, "물감대줄 돈이 없다"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좌절됐으나 그림도 소설의 큰 자양분이 됐다. "사진으로 찍으면 얼굴만 찍을 수밖에 없지요. 눈으로 찍으면 산골짝 골짝도 세밀한 그림으로 잡을 수 있어요."

「태백산맥」을 시작할 때 그에겐 이미 「아리랑」 「한강」이 다 한줄기로 흐르고 있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 그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한발 물러서 본 적 없다. 술한잔 입에 대지않고, 누구를 만나지도 않았다. 클라이막스에서 끝나는 소설을 쓰고자 '최선을 다해서 100m 달리기를 하는 속도로' 마라톤을 했다. 오죽하면 그의 아내이자 문학적 동지인 시인 김초혜가 그랬을까. "조정래와 함께 외줄 레일을 서로 걸어간다. 나는 계속 떨어지는데 그는 한번도 떨어지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간다. 자기한테 한번 규정지은 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한번도 어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쁜 습관은 빨리 버려야 습관이 된다는게 그의 지론. 한 작가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그 작가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많은 개성적인 인물을 창조했느냐로 결정된다는 작가 조정래.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인물은 1400~1500명.

깨알같이 쓴 그의 취재수첩을 보여준다. 재래시장에서만 구할수 있는 '일수'노트. "모든 취재수첩이 이것으로 통일돼 있는데 이것 하나가 책 한권이 돼요. 상대방이 중요한 얘기 5분 한 것이 원고지 100매가 돼요. 상상력을 첨가시킨거니까. 얼마나 처절한 겁니까." 혼신을 다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 쓸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한 소설의 힘은 무섭다. 「태백산맥」으로 벌교 꼬막이 명물이 되며 가격이 10년전보다 열배 올랐고, 꼬막축제를 한다. 허나 뻘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문제란다. 역사인식도 그렇다. 「태백산맥」에서 여순반란사건을 여순사건으로 쓰면서 모든 역사서나 언론이 그렇게 쓰게됐다.

# 제주 4·3, 이땅의 지성인들 좌시하면 안돼

그는 제주도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 제주도를 그가 쓰고 싶은 아름다움으로 묘사했다. 「태백산맥」에서 한라산과 백두산을 신화로 대비시킨 대목은 절창. 「한강」에서는 통일로 가는 길에의 아름다운 남녀의 합일을 위해 깨끗한 제주바다로 데리고 갔다. 

그가 한라산을 처음 넘은 것은 대학 3학년때인 1964년. 30명의 한라산 대부대를 만들고 왔다. 흐려서 백록담은 못봤으나 산은 원초적인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끝도 한도 없는 길. 비는 종일 내렸다 "그때 제주도가 얼마나 긴 등산로를 가지고 있는 곳인지를 실감했어요. 식물표본대가 정확했고. 비포장도로로 제주도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공동우물터에서 쌀을 씻으며 시계를 풀어놓고 왔는데도 그대로 놓여 있었어요. 개인집을 빌려달라고 하니 집 한 채 빌려주고."

그런 제주도에, 그 아름다운 곳에 고층 빌딩을 짓는다니! "기존 건물이 헐었으면 국가가 지원을 해주면서 자연을 그대로 살려야죠. 10년전에 「태백산맥」촬영을 하려고 벌교에 갔는데 촬영할 데가 없었어요.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래서 찍은 현장이 벌교말고 장흥이잖아요.(웃음)" 그는 제주도가 청정이미지를 살려 거대한 무공해 차밭을 만들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주도 4·3의 문제는 우리 민족이 풀어야하는 상처와 아픔이라는 작가는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대통령의 이름으로, 권력의 최고자리에 있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한 것은 참 잘 한 일이라고 본다. "어떤 정권도 이것을 훼손하거나 왜곡시키면 안되지요. 만일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역사의 커다란 도태고, 또한번의 4·3비극을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제주도민이 좌시하면 안되고, 이땅의 지성인들도 그것을 좌시하면 안되지요. 반드시 정면저항을 해야하고, 4·3이 풀렸다면 공개적으로 여순사건도 풀려야 돼요."

# 글 쓰는 건 사명…소설 쓸 때가 가장 행복

그는 컴퓨터로 쓸 생각은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다. 컴퓨터는 시간을 다투는 글을 쓸 때 필요한 것. 갈고 닦고 응축시키고 해야할 시인들마저 컴퓨터로 시를 쓰고 있다니 한마디로 미친짓이란다.

물론 그는 앞으로 대하소설은 더 이상 쓰면 안될거라 했다. 일욕심도 탐욕이 아닌가. 건강도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최근 2년동안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 일곱권을 썼다. 손자들을 위해서. 그의 다음 작업? "앞으로 1차 10년까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해서 2년에 하나정도 장편을 쓸 계획으로 소재를 다루고 있죠. 그 다음 쓸 수 있다면 2차로 80세까지. 3차로 85세까지 해서 계획을 세워놓고, 80 넘어 소설을 못쓰면 정선된 수필 쓰면서 인생을 마감하면 되겠지 하고 있어요."

그에게 문학은 인간이 인간에게 기여해야하는 것, 작가의 임무는 산소같은 것이다. "작품을 쓰는 모든 작가들은 그 시대의 산소역할을 해야하는 거죠. 그 시대의 산소역할을 해야만 비로소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그의 소설쓰기는 하루 평일 열두시간에서 열다섯시간.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래야지요. 글 쓰는 건 제 사명이잖아요. 직업이잖아요. 죽을 때까지 계속 성실히 해야하는 것이 직업의 생명이고 사명이에요. 그리고 나는 글을 쓸 때가 제일 행복해요. 당신이 언제 불행하냐? 글이 뜻대로 안 될 때. 나머지는 불행이 없어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