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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태자 제주 표착뒤 살해 당해…양국 외교관계 급속도로 악화

2009-03-24     제민일보

   
 
 

오키나와 류큐 왕국의 슈리성.

 
 
외교를 단절시킨 류큐 태자의 죽음 

조선은 류큐(琉球)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17세기~18세기 초 조선에서는 '류큐(琉球)는 제주의 남쪽에 있어서 맑은 날에는 제주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왕궁은 소박하여 단청의 장식이 없으며, 세금은 각기 토지를 나누어서 녹봉(祿俸)과 식량을 마련하고, 상하간(上下間)에는 세금을 받거나 걷어들이는 일이 없다.

형벌을 사용하는 일은 매우 엄중하다. 조개껍질로 불을 때며, 사람들은 다 굳세고 건장하여 의약(醫藥)을 알지 못해도 질병이 없다. 무기와 장비는 견고하여 예리하며, 활을 쏘면 200보에 이른다. 다투기를 좋아하여 이리처럼 싸운다. 곧잘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며, 살인을 저지르고 형벌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헤아리면 곧 자기 배를 찔러 스스로 죽어 버린다…산에는 맹수가 없으니 들에는 야생마가 많다…중국 복건성 매화소(梅花所)에서 7일이면 도착할 수 있다'. '제주에서 곧장 남으로(午方) 5000리 거리다'. 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류큐와 관계있는 표류의 역사는 고려 현종 20년(1029)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데 탐라백성 정일(貞一) 등 21명은 극원도(極遠島)에 표착하였다. 그 섬사람들은 모두가 몸집이 장대하고 온몸에 털이 났으며,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고, 7개월간 억류되었다가 7명만 몰래 작은 배를 훔쳐 타고 동북쪽으로 항해하여 일본 나사부(那沙府)에 갔다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극원도(極遠島)라는 섬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오키나와 열도의 수많은 섬 가운데 한 곳임을 추정할 수가 있다. 

류큐와 고려와의 외교 관계는 고려 창왕(1389) 때부터이다. 류큐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는 고려가 대마도를 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옥지(玉之)를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왜적에게 붙잡혀간 사람을 돌려 보내며, 류큐의 지방 산물을 바치려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니, 고려 조정에서는 김윤후(金允厚)와 김인용(金仁用)을 보내어 류큐국에 보답하였다.   

그 후 조선 태조 정축년(1397)에 류큐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선에 입조(入朝)한 것을 시작으로, 류큐는 인조말까지 조선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왔다. 이때부터 류큐인들이 조선에 표착할 경우 안전이 보장되었고 표류인들은 중국을 경유하여 다시 류큐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제주인들이 류큐로 표류하거나 그 역으로 표착하는 것은 해류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관계가 원만하던 류큐로부터 사절이 끊긴 것은 하나의 큰 사건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인조 말년에 유구국 태자(太子)가 표류하여 제주도에 표착하였으나, 그곳을 지키고 있던 관리에게 살해를 당하니, 그 뒤부터 드디어 왕래가 끊어졌다.'고 그 사실을 말하고 있다.

류큐 태자가 제주에서 죽음을 당할 때 태연하게 지은 '絶命詩'한 수가 오늘날 전해온다.

요(堯)나라 말로써도 걸(桀)의 옷 입은 몸을 변명하기 어려우니, 죽는 마당에 하늘에 하소연할 겨를이 있으랴.
삼량(三良)이 구멍에 들어가니 어느 누가 대신 죽겠는가.
이자(二子)가 배를 탔으니 도적놈도 마음이 어질지 않구나.
백골이 사장(沙場)에 굴러다닐 제 걸리는 건 풀뿌리뿐이요.
외로운 혼이 고국에 돌아간들 어느 친척이 불쌍히 여기랴.
조천관(朝天館) 아래 흘러가는 물만이
길이 나의 슬픔을 안고서 만년동안 울부짖으리.

류큐 태자 살해사건(혹은 안남 태자)은 조선과 류큐의 관계가 냉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제주도사람들은 일본 지역에 표착시 제주사람이라고 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고, 실제로 제주도 사람들은 전라도 나주, 강진, 영광 등 다른 지역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살아 돌아올 수가 있다고 믿었다. 

   
 
 

오키나와의 해안

 
 
류큐(琉球)와 오키나와(沖繩)  

중국의 역사서 「수서(隨書」에 류큐에 관한 기사가 여럿 있다. '유구(流求)는 바다의 섬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복건성(福建省)의 동쪽으로 물길 5일이면 닿는다. 투루수(鬪鏤樹)가 많은데 귤나무와 흡사하나 잎사귀가 조밀하고 가지는 머리털처럼 가는 것이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투루의 껍질을 자른 것에 잡다한 색의 모시와 잡털을 섞어 옷을 만든다.

쇠사슬을 얽어 맨 것으로 팔가락지를 하며, 구슬을 꿰어 목에 단다. 풍속에 문자가 없으며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보고 때의 절기를 기록한다. 부인들은 먹으로 손에 문신을 하는데 벌레나 뱀의 무늬를 그린다.

산모가 젖을 낼 때는 반드시 아이의 옷을 먹으며, 출산 후에는 불로 스스로 뜸질하여 땀을 나게 한다. 쌀과 밀로 술을 빚는 데 그 맛이 매우 싱겁다. 쇠(鐵)가 적다.' 는 등의 내용이 있으나 이 내용들은 전적으로 오키나와만의 기록으로 볼 수가 없고 대만 주변의 자연, 풍습과 혼합되어 기술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평가다.

류큐에 대한 표기를 살펴보면,「수서(隨書」에는 '유구(流求)'라 했다. 「신당서(新唐書)」,「송사(宋史)」,「원사(元史)」등에는 유규(流규), 유구(留求), 유구(留球), 유구(留仇) 등으로 표기된 예가 있으나 명나라 태조(1371) 때 '유구(流求)'라는 말로 정착하게 된 후 일본과 조선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또한 류큐를 달리 부르는 오늘날의 이름인 '오키나와(沖繩)'는 8세기의 자료인「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上東征傳)」에 등장하는 '아코나와지마(何兒奈波島)가 처음이며, 그 후 중국의 기록에서 '우치나(倭急拿)', '우치나(屋其怠)', 오키나와(惡鬼納), 우키나와(浮繩) 등의 표기가 보인다.

오키나와(沖繩)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에도 중기의 정치가이자 주자학자인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에 의해서이다. 류큐의 자료에서 '오키나와'라는 말은 1554년의 문헌인<야라자모리(やらざ森碑)>에 보인다.

류큐의 신가(神歌)와 왕부(王府)의 고문헌「오모로소우시」에는 '오키나와' '오키니야'라 표기되어 있다.
오키나와의 민속학자 호카마 슈젠(外間守善)은 '오키'는 '크다', 또는 '난바다'라는 의미이고, '나와'는 '어장' 혹은 '장소'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沖繩'이라는 한자는 오키나와라는 말에 해당하지만 어떤 의미의 연관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오키나와'는 '큰 곳'을 뜻한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아마(あま, 海人)가 제일 근본이 되는 모습인 오키나와 조상신 아마미쿄족이 섬에 도래한 모습과 겹쳐, 나하(那覇)와 오키나와(沖繩)의 어원이 되었다고 해석하면서, '오키나하'나 '오키나와'가 고유어인데 비해, 류큐는 중국이나 외국에서 부르는 호칭이라고 하였다.

장한철의 류큐 표류

류큐로 표류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장한철(張漢哲,1744~ ?)이다. 장한철은 정조 때 대정 현감을 지낸 인물로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녹담거사(鹿潭居士), 한라산 북쪽마을인 애월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매우 영특했던 그는 향시(鄕試)에 여러 번 붙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그의 영특함을 아는 제주·정의·대정 삼읍의 관가에서는 노자를 마련해 주어 예조(禮曺)에서 치르는 회시(會試)에 임하도록 하였다. 시험을 보기 위해 1770년 12월25일 장한철은 모두 29명과 함께 배를 타고 출항하였다. 본선의 사공 이창성은 어려서부터 80여 차례나 바다를 건넌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날씨는 사람의 힘으로 예측하기도 어렵고, 바다에서의 삶은 천운(天運)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장한철 일행이 탄 배는 육지를 향해 가던 중 비바람을 만나 인근 섬으로 급히 피항하려고 했으나, 세 가닥 닻이 아닌 두 가닥 닻인 까닭에 닻이 바닥이 걸리지 않아 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사나운 비바람에 배에 탄 사람들은 자포자기하던 중 나흘 만에 류큐의 호산도(虎山島)에 닿을 수 있었다. 장한철 일행은 그곳에서 과일을 따먹고, 전복을 캐 구어 먹거나 회를 쳐 먹으면서 구조를 기다리던 중 왜구들을 만나 수모를 당하였다. 왜구들은 장한철과 여러 사람들의 옷을 벗겨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는 자루를 뒤져 그곳에서 캤던 쌍진주를 빼앗아갔다.

그들은 먹을 쌀과 옷가지만을 남겨두고 전복과 그 외의 물건들은 모두 가져가 버렸다. 장한철 일행은 왜노(倭奴)들을 호랑이와 뱀보다 더 지독하다고 여기며, 그들을 저주했다.

1771년 1월초 2일 오후가 되자 산처럼 큰 배 3척이 보였다. 배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연기를 피었지만 2척의 배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3번 째 항해하던 배에서 작은 배를 보내어 그들을 구조하였다. 장한철 일행의 배는 그들이 끌고 가 배 밑창에 물을 채워서 띄워놓았다. 3척의 배는 안남(베트남) 상인의 배였다. 아남의 배를 타고 항해한 지 3일이 지나자 한라산이 가까워 보였다.

장한철 일행은 감탄한 나머지 한라산을 향해 큰 절을 하면서 울며 빌었다. "흰 사슴을 탄 신선이시여. 나를 살려주소서! 설문대 할망이시여. 나를 살려주소서!" 장한철 일행은 이 기회에 내리지 못하면, 고향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안남의 상인 임준에게 '탐라인'이라는 사실을 글로 써 보이고 내리기를 간청하였다.

안남의 배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고, 안남인들은 옛날 "탐라의 왕이 안남 세자를 죽였으므로 원수와 같이 배를 탈 수 없다고 하여, 장한철 일행을 표착했던 배에 도로 태워 바다로 밀어 넣었다. 배는 다시 표류하여 전라도 완도군 청산도에 이르렀고, 28명 중 8명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