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벼가 묵은 벼처럼 익으면 돌아갈수 있습니다
48.표류(漂流)의 문화사-6 류큐2
일본, 교역확대 위해 표류자들 송환에 각별한 노력
2009-03-31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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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의 골목길 | ||
1770년 장한철 일행이 류큐국 무인도에 표류했다가 두 번의 표류 끝에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르포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보다 약 44년 앞서 류큐에 표류한 김일남·부차웅의 류큐 표류기와 다시 그로부터 300년 전 김비의(金非衣, 金非乙介) 일행의 류큐 표류기는 그 나라 풍속과 문화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돼 있어서, 시공간을 넘어 세계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정보를 주고 있다.
영조 2년(1726) 2월 초 9일, 북포(北浦)의 백성 김일남(金日男), 부차웅(夫次雄) 등 9명은 추자도를 지나는데 바람을 만나 대양으로 표류하였다. 북포는 지금의 제주시 북촌리(北村里)에 있는 큰성창을 말한다. 물길을 떠다닌 지 수십일이 지나 이른 곳은 류큐 열도의 한 섬. 그 후 김일남 일행은 그 섬을 나와 왕도(王都)에서 70~80일 동안 머물면서 류큐의 풍속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본 류큐의 토산품으로는 백은(白銀), 유석(鍮錫, 녹쇠와 주석), 유황(硫黃) 등이다. 특히 유황은 매우 많아서 북경에 공물로 바치는 중 으뜸이었다.
후추와 등나무는 아주 흔하여 광주리와 돗자리는 등나무 줄기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그들이 본 것 중 신기한 것은 고구마였다. 그것은 '계절마다 땅에 심어 서너 뿌리가 나온다. 뿌리는 무와 비슷하고, 한번 덩굴이 지면 무성하여 몇 이랑씩 뻗어 나갔다.
큰 것은 술잔만 하고, 맛은 달면서도 속은 물러 사람이 먹기에 좋았다. 반드시 껍질을 벗겨 쪄서 먹으며, 끼니를 대신한다. 여기저기 심는데, 덩굴 하나에 몇 백 뿌리를 거둘 수 있어서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는' 채소였다.
또 그곳 풍속에 남자들은 등에 물건을 지지 않았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지 않았다. 물을 긷고 나를 때는 나무 양 끝에 물통을 매달고 가운데를 어깨에 메었다.
돈은 옹정통보(擁正通寶)를 썼고, 도자기는 토산(土産)이 아니어서 중국에서 사다 쓰기 때문에 매우 비쌌다. 민간인들은 나무 사발과 대나무 젓가락을 사용했다. 집에는 방구들이 없고, 나무 침상에서 잠을 잔다. 실내에 비단으로 휘장을 드리워 파리와 모기를 막았다.
기후가 몹시 따뜻해서 겨울에도 홑옷을 입었다. 여름이라고 해서 덥지 않았고, 여름과 가을 사이에 태풍이 불었다. 언어는 시끄럽고 몹시 빨랐다. 노래는 한 사람이 선창하다가 3, 4절로 바뀌면 10여 사람이 한 소리로 화답했고, 가락이 간드러져 처량하였다. 성이 나도 낯빛을 붉히지 않고 언성도 높이지 않았다. 류큐 본 섬의 둘레는 약 500리쯤 되었다.
김일남 일행은 류큐 표착 9개월이 지난 1726년 11월 초 9일 류큐의 조공선을 타고 이듬해 1월 중국 복건성 천해진(天海鎭)에 다다를 수 있었다. 류큐의 조공선은 뱃머리에 '유구국 중산왕조공선(琉球國中山王朝貢船)'이라고 쓴 깃발을 달았고, 조공선에 딸린 군사들은 뽕나무 활과 가죽 시위, 나무 화살을 지니고 있었다.
인구를 증가하게 한 고구마와 감자
고구마의 원산지는 열대아메리카로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해 전래되었다. 17세기 중엽부터 표류민이나 통신사에 의해 고구마의 존재가 알려졌으나 고구마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다.
1763년 조선통신사였던 조엄(趙嚴, 1719~1777)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부산 동래와 제주도에 시험 삼아 처음 재배하게 하였고, 그 후 여러 번 기근을 구제할 수 있는 구황(救荒) 대체 작물로 거론 되었지만 전국적으로 재배되지는 못했다. 고구마가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1900년대 이후였다.
고구마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정복의 산물이었다. 즉 정복된 신대륙의 식량이 구대륙의 농업경제로 유입되면서 세계적인 교역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고구마는 옥수수, 감자, 토마토 등과 함께 유라시아대륙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상류층과 평민층의 식단을 모두 풍성하게 만들었다.
1500년대 중반 고구마가 중국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의 농민들은 쌀을 먹지 않고 팔 수 있게 된 것과 같이 신대륙의 작물이 구대륙에 전파되면서 불안했던 식량문제가 해결되자 구대륙의 인구는 증가하였다(로버트 B. 마르크스. 2004).
고구마와는 달리 감자는 동아시아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은 작물이었다. 감자는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둔 작물로 18~19세기에 확고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17세기에 먼저 아일랜드에 감자가 도입되었으나 18세기에 와서야 약간의 우유제품을 곁들인 감자가 농민들이 먹는 유일한 식량이 되었다.
영국에서도 감자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국내에서 소비되기보다는 국외 수출용으로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감자가 식량으로 보급되면서 유럽 인구는 증가하였다(페르낭 브로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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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리성의 시사(사자) | ||
명나라 홍무(洪武) 5년(1372) 류큐 츄우잔 왕(中山王) 삿토(察度)는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었다. '조공(朝貢)'이란 공손하고 온순하다는 뜻을 나타내며, '책봉(冊封)'이란 조공의 예에 대해 그 국왕에게 '그대를 봉하여 왕으로 삼는다'는 칙서를 주는 것이다.
이 조공의 예에 대한 책봉을 처음 받은 것은 츄우잔 왕(中山王) 아들 부네이(武寧)였고, 이런 책봉은 1866년 류큐의 마지막 국왕 쇼우타이왕(尙泰王)까지 지속되었다. 14세기 초까지 류큐에는 중부, 남부, 북부 세 세력으로 나뉘었다.
즉 산잔(三山)으로 불리는 호쿠잔(北山), 츄우잔(中山), 난잔(南山)의 세력들은 서로 다투다가 15세기에 대두한 사시키(佐數)의 호족 쇼우시쇼우(尙思紹), 쇼우하시(尙巴志) 부자에 의해 먼저 츄우잔(中山)이 패망하였다. 뒤를 이어 호쿠잔(北山), 그리고 난잔(南山)이 쇠망하면서 1429년 마침내 류큐의 통일왕조가 성립할 수 있었다.
류큐가 통일되기 전 산잔(三山)의 조공은 츄우잔(中山) 42회, 난잔(南山) 24회, 호쿠잔(北山) 11회였고, 조공을 시작한 무렵 1년에 1회로 이어지다가 류큐의 정세로 인해 2년에 1회 제한되면서 국왕의 제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류큐의 조공품은 칼, 유황, 파초포(芭蕉布), 부채, 향료였다가 후에 유황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칼은 일본 수입품이었고, 향료는 남방산이었다. 반대로 명나라가 류큐에 준 물품으로는 견직물, 도자기, 철기 등이었고, 철이 나지 않는 류큐에서 철기는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사실 류큐와 명나라의 조공관계는 섬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교역을 중시한 때문이었다. 이 조공관계에서 중국은 권위를 가질 수 있었고, 류큐는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外間守善.1986).
류큐는 주변국과도 활발히 교역을 벌였다. 14~16세기 동안 그 대상은 류큐의 남방인 샴(타이), 팔레반(구홍콩), 자바, 말라츠카, 수마트라, 바타니, 안남(安南), 순다 등이었다. 명나라에 남방의 물품을 조공한 것은 이들과 이미 교역을 한 결과였다.
그리고 류큐의 일본 교역은 일본 본토의 정세변화에 따라 달라져 큐슈지역으로 한정되었다.
조선과 류큐의 교역은 1389년 삿토(察度)가 고려에 사자를 파견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때 류큐는 왜구에 피로(被虜)된 조선인을 되돌려 보내고 동시에 유황 300근, 소목(蘇木) 600근, 후추 300근, 갑옷 20부를 헌상하면서 교역의 문을 열었다.
1393년 고려가 멸망하자 류큐는 조선에 몇 차례 사자를 파견하였지만 조선의 태도가 적극적이지 않은 관계로 16세기가 되면 서로 간의 교역은 시들해졌다. 이 시기 동아시아 질서에 큰 변화의 바람이 일면서 류큐의 무역도 위협을 받기에 이르렀다.
제국주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아시아 해상 진출이 활발했고, 중국의 직접적인 해외무역과 해방(海防)의 강화, 일본의 데지마 개방과 중국과 남방의 직접 무역 등으로 류큐의 중계 무역은 그 기반을 잃어갔다.
표류인의 송환, 교역을 위한 노력
류큐에 표류한 조선인들은 모두가 송환되는 것은 아니었다. 표착지 주민에게 구조되기도 하지만, 노예로 팔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표류민 가운데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중도에서 죽었거나 현지에서 결혼하여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류큐의 표류자들이 이역만리에서 앞날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릴 때면 류큐의 농민들은 익은 벼와 새 벼를 보여주며 새 벼가 익은 벼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수화로 설명한 경우도 있었다.
표류민의 송환은 번거로운 외교문제이기 때문에 국가 상호간 비용도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송환의 비용을 들이면 그에 보답하는 것이 상례인 까닭이었다.
류큐에 표류한 김일남 일행의 송환 경로는 류큐-복건성 천해진-포성현-항주-소주-상주-남경-양주-산동-북경(조선통사 만남)-한양-제주였고, 류큐에서 제주까지 돌아오는 시간은 3년이 걸렸다.
15세기 표류했던 김비의 일행의 송환 경로를 살펴보면, 류큐 여나국도-류큐 나하-사츠마-하카다-이키-쓰시마-조선 염포(鹽浦)-한양-제주에 이르렀고, 류큐에서 제주까지 돌아오는 데는 약 2년 2개월이 걸렸다.
왕은 이들에게 2년 동안 부역을 면해주었고, 6개월치 쌀과 제주 바다를 건너는 비용을 지급해 주었다. 또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는 옷 한 벌씩을 하사하면서 위로하였고 표류하다 죽은 이들의 가정은 구휼을 명했다.
류큐는 조선과 국교가 시들해지기 전인 명종 때까지는 조선인 표류민 송환에 적극적이었다. 류큐가 많은 비용을 들이며 일본인 사자(使者)에게 의뢰하면서까지 송환에 노력한 것은, 조선과 교역의 기회를 확장하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특히 교역물품 가운데 필요했던 것은 조선의 면포였는데 면포는 류큐의 진공품이자 동남아의 중요 교역품이었다. 류큐 자체에서 면포를 생산한 것은 17세기 초에나 가능했다.(이훈, 2002)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