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49. 표류(漂流)의 문화사-7. 중국 1
잠녀에게 강남·해남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 모르는 이상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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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물의 신' 중국 강소성 양주 | ||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여하니 내 눈물 난다/이엿말일랑 말아서 가라/江南가거든 海南을 보라/이여도가 반이라 한다.
이 노래는 잠녀들이 노를 저으며 부르는 가사의 일부분이다. 제주 잠녀들의 관념에는 은연중에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理想鄕)인 이어도에 대한 갈망이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강남(江南), 해남(海南)이라는 지명이 눈에 띈다. 잠녀들은 왜 이역(異域)의 이름을 부르며 노를 저었을까?
강남(江南)은 중국 장강 중·하류에 위치한 화동(華東)지방인 강소(江蘇)·안휘(安徽)와 화남(華南)지방인 강서(江西) 3성(省)을 낀 지역이며, 절강성(浙江省)과 맞붙어 있고, 상해(上海), 항주(杭州), 영파(寧波) 등 연안 항구도시가 발달해 있다.
이 지역은 기원전 770년 이후 춘추 시대에는 초(楚)나라와 월(越)나라가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며, 기원후 3세기에는 오나라 손권이 남경(南京)에서 건국하여 「삼국지(三國志)」의 무대가 되었다. 특히 화남(華南)지방은 해안선이 1만 ㎞에 달하여 굴곡이 심하고, 크고 작은 섬들이 많은 지역이다. 불룩 튀어나온 배와 같은 연안은 오래전부터 해외교역의 창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해남(海南)은 중국 최대의 섬으로 제주 잠녀들이 부르는 지명과 같다. 물론 한국 전라도에도 같은 지명인 해남(海南)이 있으나 잠녀들이 노래에서는 강남(江南)의 '하이난다오(海南島)'를 말하는 것이다.
잠녀들의 노래에는 수많은 삶의 애환이 들어있다. 가슴앓이와 같은 말 못할 사연이 어디 한 둘이랴. 전복 따러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포작인(鮑作人) 남편, 진상선을 타고 떠난 뒤 소식이 없는 아버지와 아들, 생계를 위해 테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간 후 바람결에 묻혀버린 남동생을 그리며 불러온 뱃노래. 어쩌면 이런 아픈 사연에도 불구하고 물결을 헤치며 부르는 잠녀들의 노래는 통한(痛恨)으로 들리기보다는 승화된 인내로 들린다.
슬픔의 끝은 담담함의 시작이다. 오히려 끝 모를 슬픔은 체념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대를 갖게 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희망을 남겼다. 그 기대는 그리움을 키우지만 슬픔은 반감시켰다.
잠녀들에게 슬픔의 원인은 파도였다. 파도를 제주어로는 '절'이라고 하는데, 이 '절'은 자신의 가족들을 이역만리(異域萬里)로 데려간 원흉(元兇)이었다. '절'은 바람에 의해서 거세진다. 큰 바람에 의해 거칠어진 파도를 '놀'이라고 한다.
바람과 파도가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된 파도를 '놀덩이'라고 하여 뱃사람들은 늘 이를 경계한다. 이 놀덩이는 항해하는 배의 공포의 대상이며, 잠녀들 또한 이 놀덩이를 잠재우기 위해 용왕신에게 치성을 드린다. 용왕신에게 '놀바당(파도치는 바다)'을 비단결과도 같이 매끄러운 '멩지(明紬)바당'으로, 참지름(참기름) 같은 바다로, '사발물'처럼 잔잔한 바다가 되기를 빌고 또 빈다.
거친 파도에 실려 생사를 모르는 가족들의 넋을 달래면서 잠녀들은, 자신은 가본 적이 없는 강남에서 해남을 보라고 한다. 그 길이 이어도의 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지도 모르는 이상세계(이어도)에 자신의 남편과 가족들이 살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
말이 엎드린 자세로 감사 표하는 표류인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탐라인의 중국 표류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가우(嘉祐, 1056~1063) 연간, 곤산현(崑山縣) 상해(上海)에 돛대가 부러진 배 한 척이 바람에 표류하여 해안에 도착하였다. 배 안에는 30여인이 타고 있었는데 옷차림새가 당나라 사람과 같았으며, 붉은 가죽 각대(角帶)를 차고 검은 베로 만든 짧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배 안에 표류자들은 사람들을 보자 크게 통곡하며 무슨 말을 했으나 중국의 관리는 알아듣지를 못했다. 글씨를 써 보게 했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길을 가는 모습은 서로 줄지어서 마치 기러기가 나란히 가는 모습과 같았다. 나중에 그들이 글씨를 보여주었는데 바로 천수(天授, 918~942) 연간에 둔라도 수령 배융부위(屯羅島首領倍戎副尉)에 제수한 것이었다. 그들이 다시 글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모두 한자로 써 있었고,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에 둔라도(屯羅島)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의 배안에는 여러 가지 곡식이 있었다.
그 가운데 연밥만 한 크기의 삼씨(麻子)를 가져다 소주(蘇州) 농부들이 심었지만 첫해만 연밥 크기와 같았고, 해마다 점점 작아져서 중국의 삼씨만 해졌다. 당시 곤산현지사(崑山縣知事) 한정언(韓正彦)은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술과 음식을 내주고 위로하였다.
표류자들은 음식을 다 먹고 나자 손으로 머리를 받들고 말이 땅에 엎드리는 듯한 자세로 감사해 마지않았다. 한정언(韓正彦)이 목수를 시켜서 그들 배의 돛을 고쳐 주게 하였는데, 돛대를 예전대로 선목(船木)의 위에 꽂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기술자(工人)가 회전축(回轉軸)을 만들어서 돛대를 일으키고 쓰러뜨리는 법을 가르쳐 주니, 둔라도 사람들은 또 기뻐하면서 손으로 머리를 받들고는 예전처럼 말이 땅에 엎드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둔라(屯羅)는 지금의 탐라이다.' 라고 한치윤(韓致奫)은 말했다.
성호 이익(李瀷)은 연밥만한 탐라의 삼씨(麻子)에 대해서 논평을 하였다. 그는 '탁라삼씨'라는 글에서 표류의 경위를 위와 비슷하게 설명한 후 탁라 삼씨에 대해 "삼씨(麻子)는 크기가 연밥만 한데, 햇볕에 바짝 말려서 기왓장 위에다 놓고 살살 비비면 껍질이 다 벗겨진다.
벗어진 껍질은 키로 날려 버리고 알만 취하는데, 알이 모두 부숴지지 않고 제대로 완전하다 한다. 탁라는 제주의 옛이름으로… 토속(土俗)에서 사용한 삼씨는 필연코 비마(비麻)일 것이다. 추측컨대, 이 비마라는 식물이 가우(嘉祐, 1056~1063) 연간 이전에는 중국에 없었던 듯하다."라고 했다.
고려시대 제주인들의 중국 표류는 매우 빈번했다. 그만큼 탐라는 고려 조정을 위해 조공을 바치고자 해마다 제주해협을 건너는 까닭이었다. 탐라는 고려에 선박과 귤, 진주, 말린 생선, 기타 해산물 등 방물을 바치기 위해 분주히 드나들었다.
해상 교역 또한 1세기경부터 시작되어 3세기경부터 한반도 남해안 지역과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상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표류의 위험에 비례하는 것이다.
선종(宣宗) 3년(1088) 7월 송나라 명주(明州)에서 풍랑으로 표착했던 탐라사람 용협(用협) 등 10명을 돌려보냈다. 숙종(肅宗) 2년(1097)에는 송나라에서 제주 표류민 등 3명이 돌아왔다. 원래 이들 일행은 20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풍랑에 밀려 나국에 표착하였지만, 17명은 그곳에서 피살되고 3명만 도망쳐 송나라를 통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으로의 표류는 비단 제주인만이 아니었다.
제주를 찾아서 오던 진도현(珍島縣) 사람들도 풍랑을 만나 송나라 명주(明州)에 표착하여, 황제의 명으로 표류민들에게 각각 비단 20필과 쌀 두 섬씩을 주어 돌려보냈다. 신종(神宗) 16년(1202) 2월에도 송나라 상인들과 함께 제주의 표류민 28명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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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신 용왕' 한국 19세기 | ||
표류는 바람에 의해 발생한다. 거친 '놀(파도)'을 치켜 세우는 것이 바람이니, 바람이 자기(고요해지기)를 기다리고, 순풍(順風)이 불기를 다시 기다린다. 선인(先人)들은 나쁜 바람(惡風)을 치풍(癡風)·흑풍(黑風)·해동(海動)으로 분류했다.
바다에서 치풍(癡風)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울부짖으면서 그치지 않으므로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고, 흑풍(黑風)이 일어나면 노한 태풍이 수시로 불며 하늘이 깜깜해져 밤낮을 분간할 수가 없다. 해동(海動)이 일어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끊이는 것과 같아 큰 바다에서 이런 바람을 만나면 살아남기가 어렵다.
그래서 큰 바다에서는 배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전이 제일 중요한 일이며, 만일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경건한 마음으로 기원하고 슬프게 애원하면 하늘이 감응한다고 하니, 인명(人命)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표류자들의 표착지는 물길에 큰 영향을 받는다. 표착지는 물길과 연결된 주(洲), 도(島), 서(嶼), 섬(?), 초(焦)에 해당한다. 주(洲)는 바다 가운데 땅이 있고 촌락을 이룬 곳을 말하고, 도(島)는 주(洲)보다는 규모가 작으나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을 도(島)라 한다.
이 도(島)보다도 작으면 서(嶼)라고 하며, 이 서(嶼)보다도 작으면서 초목이 있으면 섬이라고 하고, 모두 돌로만 되어 있으면 초라고 한다.
「송사(宋史)」에 의하면, 중국에서 고려로 오는 뱃길은 중국 명주(明州)를 출발하여 8일 만에 흑산도에 이를 수가 있고, 또 예성강까지는 7일이 걸린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 1091~1153)이 태운 사절단의 배는 5월16일 명주(明州)를 출발하여 중국 연안에서 바람을 기다리다 28일 대양으로 나와 7일간 항해를 하여 6월6일 군산도(群山島, 변산반도 부근)에 당도하였다.
다시 6일간 항해하여 예성강에 입항하여 6월12일에 개경의 순천관(順天館, 송나라 사절 관사)으로 갔다.
제주에서 원(元)나라로 조회(朝會)갈 적에 한라산 북서쪽 명월포(明月浦)에서 배를 출발하여 7일 동안 항해하면 서쪽 해안에 닿을 수가 있다.
「원사(元史)」에는, 1293년(충렬왕 3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연해에 수역(水驛)을 세우게 했는데, 탐라에서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30곳을 설치했다고 한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