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갈림길 되는 표류자 심문

50. 표류(漂流)의 문화사-8. 중국 2
생사의 갈림길 되는 표류자 심문

2009-04-21     제민일보

   
 
 

여지전도(19세기 목판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대표적인 중국 표착지 강남

원래 고려와 송나라가 교류하던 초기의 항로는 황해도 연안에 있는 옹진(甕津) 항구에서 출발하여 중국 산동성 봉래현(蓬萊縣) 등주(登州)와 제성현(諸城縣)의 밀주(密州)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뱃길은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거란에게 노출될 염려가 있기때문에 고려조정은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득불 항로 변경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송나라는 고려의 상륙 항구를 절강성(浙江省) 명주(明洲), 즉 지금의 영파부(寧波府)로 옮기도록 하였다.

새로 개설된 이 뱃길은 예성강에서 출항하여 인천의 자연도(紫燕島), 해미(海美)의 서쪽에 있는 마도(馬島), 고군산(古群山), 전라북도 흥덕(興德)의 서쪽에 있는 죽도(竹島), 흑산도(黑山島)를 거쳐 서남쪽으로 항해한 뒤 명주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후부터 산동성 등주(登州)로 가는 뱃길을 동로(東路)라 하였고, 명주(明州)로 가는 뱃길을 남로(南路)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송나라 명주는 양자강 이남 땅, 즉 강남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우리나라 흑산도에서 똑바로 서쪽으로 항해하면 서주(徐州)와 양주(楊州) 땅에 이른다. 다시 흑산도에서 서남으로 항해하게 되면 복건성(福建省)에 이를 수가 있었다.   

소위 강남 지역에 이르는 이 뱃길은 표류자들의 표착지로서, 혹은 표류자들이 귀환하는 뱃길과 무관하지 않았다. 해류의 같은 길이고, 한반도 서남쪽과 마주한 까닭에 강남지역 표착의 빈도수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1487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제주도에서 공무(公務)를 중지하고, 섬을 나오던 종 5품직의 추쇄 경차관 최부(崔溥, 1454~1504)의 처음 표착지(漂着地)도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하산(下山)이라는 섬이었다.

1534년 진상물을 싣고 제주도에서 출륙(出陸)하던 김기손(金紀孫) 역시 그 주변 지역인 강소성(江蘇省) 회안부(淮安府) 만호도(萬戶道)에 표착하였다.

1796년에는 충장위(忠壯衛) 장수(將帥) 이방익(李邦翼, 1756~ ?)이 대만의 서쪽 팽호도(彭湖島)에 표착하여 하문(厦問)·복건성·절강성·북경·요양(遼陽)을 거쳐서 돌아왔다. 1687년 안남(安南)에 표착했다가 돌아온 김대황이 귀환하기 위해 출발했던 장소는 절강성 영파부에 있는 정해현(定海縣) 보타산(普陀山)이었다.  

19세기 문헌「제주계록(濟州啓錄)」에 나타난 제주인들의 중국 표착지는 대략 절강성 영파부, 절강성 서안현(瑞安縣), 복건성 해방부(海防府)·공산도(公山島)·대만현(臺灣縣)·복주(福州)·보강현(寶江縣), 혜안현(惠安縣), 보산현(寶山縣) 송강포(松江浦), 항주(杭州), 광동성(廣東省) 당산포(唐山浦)·향항도(香港島)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표류는 바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범선(帆船)의 운명이 이 바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에 일찍이 이긍익(李肯翊)은 수로(水路)로 중국에 입조하여, 폭풍이 일어나는 날을 중국 사람에게 들어 기록하였다.
그는 매달마다 폭풍이 일어나는 날을, 1월 9일·29일, 2월 7일·21일·29일, 3월 3일·7일·15일·23일·28일, 4월 1일·8일·23일·25일, 5월 5일·13일·21일, 6월 12일·24일, 7월 18일, 8월 18일·21일, 9월 9일·27일, 10월 5일·20일, 11월 14일·29일, 12월 24일이라 하였고, 이 날은 "반드시 폭풍이 일어나고, 만일 이날 폭풍이 일어나지 않으면, 전후 2일 사이에 곧 폭풍이 있었다. 우리 동방의 경험을 보더라도 맞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명나라 남경선 모형. 천주해외교통박물관 소장

 
 
황당선을 타고 온 사람들

황당선(荒唐船)이란 조선의 바다에 출몰했던 외국의 배를 일컫는 말이다. 이 황당선의 출몰은 해안방어(海防) 체계를 견고히 정비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황당선의 출몰에 조정은 늘 긴장해야만 했다. 표류한 배가 왜구일 수도 있고, 또한 해적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 때부터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출몰은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 납치, 방화(放火)를 일삼았기에 조선의 해안마을은 불안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해안에 연락망 체계인 연대를 증설하고, 왜구의 침입이 용이한 마을들은 중산간 지대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초기에는 어민들이 바다에 나가는 것 자체를 제한하였다가 명종대 이후에야 연안 어업을 부분적으로 허용하였다. 이미 태종대에 '바다로 나아가 사사로이 이익을 얻는 것(私自下海興利者)'을 금하라는 어명의 여파였다.

이를 어기고 바다에서 어로활동을 하거나 해상무역을 도모하는 자는 '위금하해율(違禁下海律)'로 다스렸다. 실제로 세종 조에는 국경 근처에서 무역을 하거나 함부로 바다로 나가 어업 활동을 하는 자는 장 100대에 처하였다. 이것은 왜구들에 의한 어민의 피해를 줄이려는 시도였다.

세종초에, 배의 수효를 7~8척의 선단을 구성하여 바다에 나가도록 규제하였다가 세종 8년(1426)부터는 아예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해금(海禁)하였다.

그 후 근 100년이 지난 명종 9년(1554)에야 이러한 조치가 느슨해졌다. 왜구로부터 보다 안전한 연안의 바다에서만 어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조선후기에도 먼 바다로 나가 조업하는 것을 여전히 금지하였고, 오히려 이를 강력하게 단속하여 왜구들이 섬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먼 바다에 대한 도항 금지 조치는 해외절도(海外絶島)의 통행을 막았고, 노역을 피해 섬에 숨어든 섬 사람이나 절도(絶島)의 섬 주민, 방랑하는 유민(流民)들에 대한 쇄환(刷還)과 추포(追捕)가 잇따르면서 조선의 연안에는 빈 섬(空島)이 속출하였다.

이와 같이 지나친 해금정책에 의한 섬 주민의 쇄환은 국가차원에서 '섬을 버린 것'으로 인식되면서, 인접국과의 영유권 분쟁의 불씨를 안게 되었다. 아무튼 왜구의 침략 때문에 시작된 해금정책은 조선 해역의 황당선 출몰에 비례하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변어전고(邊어典故)에는 '황당선'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황당선은 류큐(琉球), 중국, 일본, 왜적들의 배였다. 황당선들은 조선의 해역 연안에 표착했거나, 그 해역을 지나가는 외국배를 납포하여 엄격하게 조사한 후 돌려보냈다.

황당선에는 표류한 왜적들도 있었고, 류큐(琉球)의 배도 있었다. 조선의 군사들은 이 류큐(琉球)의 배에 탄 사람들의 이상한 복장 때문에 적선(敵船)인줄 알고 함부로 사람을 쏘아죽이기도 했다. 중국 영파부에서 난을 일으키고 도망가던 왜노(倭奴)를 사로잡아 포상을 받는가 하면, 복건성에서 바다로 나온 군사의 무리를 사로잡아 요동으로 압송하기도 했다.

표류민들인 경우 의복과 식량, 여비를 주고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어떤 황당선에는 왜구와 남만(南蠻, 네덜란드) 사람 2인이 같이 타고 있었다. 왜구들이 장사차 바다에 나온 남만인 2인의 물건을 약탈하고 납치하고 돌아가다가 조선의 병선에 붙잡힌 것이었다.    
    
황당선의 특이한 예로는 7세 여아의 제주도 표착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세종 때 한척의 배가 제주도에 표착했는데, 배 위에는 7세 된 여자 아이가 혼자와 「자치통감(自治通鑑)」 1질, 상아홀(象牙笏)이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 아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중국 재상의 딸이며, 성이 김씨인데 술사(術士)가 '내가 부모에게 이롭지 않으니 외국으로 가면 길하다'고 하여 빈 배에 태워 보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 아이를 궁중에서 키우도록 하였고, 자라서 강양군(江陽君)의 부실(副室)이 되었다고 한다. 이 7세 여자 아이의 본관을 대원(大元)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이 가문은 후에 자손이 번성하여 빈번히 급제자가 나왔고, 7세 때 가지고 온 상아홀은 집안의 보물이 되어 자손이 과거에 오르면 반드시 이를 잡고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목숨이 오가는 표류자 조사

대체로 해안을 방어하는 관리들은 표류자들이 왜구인지 해적인지 아니면 순수한 민간인이거나 장사꾼인지를 가려야 한다. 왜구에 대한 피해 의식 때문에 우선 표착자와 해안에 침입한 황당선의 선원들을 의심의 시선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국경을 넘어 온 침입자로서 밀입국에 해당하는 점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1698년 일본인의 제주 표착 시 질문(問政)을 살펴보면, 먼저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대답한 내용에 따라 표류자의 국가나 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를 물어보고, 바다에 나온 목적과 표착지까지 오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캔다.

또한 표류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서, 혹은 그들의 산업에 대해서도 질문한다. 표류자들의 국가 제도, 풍속, 예절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가족 관계를 묻거나 일본인의 습속인 칼 쓰는 자세를 시범해 보이라고 하기도 했다. 

17세기 강남에 사는 중국인의 제주 표착시 질문은, 먼저 죽은 자에 대해 애도하고 살아남은 5인을 위로한 다음, 추위에 언 몸의 건강 상태를 묻고 있다.

그리고 표류의 경위와 승선의 이유, 목적지, 상인이라면 공문을 갖추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강남에서 산동(山東), 북경까지의 거리와 죽은 사람의 시신 처리에 대해서도 물었다. 배가 부서졌기 때문에 귀환방법에 대해서 물었고, 대답은 배가 부서졌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가서 강남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지방관은 이에 대한 결정을 장계로 올려 조정에 보고한 후 조정의 회신이 있어야 귀환의 시기와 방법이 정해진다고 하였다.

물론 지방관마다 표류자들에 대한 심문은 매우 다양하게 구성된다. 그렇지만 심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류자들이 왜구나 해적이 아닌 지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유교의 예법을 묻거나 시를 짓게 하는 등 고난도의 질문을 유도하기도 한다.

표착자 또한 자신들의 대답이 일치해야 하며, 의심이 가는 말을 하거나 수상한 행동을 하게 되면 심문관의 판단에 따라 생사의 갈림길이 달라지게 된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