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북방 이어주는 경항대운하
52. 표류(漂流)의 문화사-10. 중국 4.
남방 갈수록 번창한 반면 북방 위축
조운 활성화 위해 경항대운하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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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 자금성의 정문 오문 | |
하늘 아래 가장 번영한 도시, 강남
최부 일행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를 떠난 것은 1488년 2월13일. 절강성 총병관이 파견한 이송 책임자 양왕(楊旺)과 두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북경을 향해 떠났다.
북경 도착 기한은 4월 1일까지였다. 항주의 절강(浙江)은 강물 흐름이 굽이지고 꺾여 있으며, 옆에 있는 산에서도 파도가 되돌아 치는 형세가 있기 때문에, '굽이 굽이 꺾인 강'이라는 뜻의 절강(浙江)이라 불렀다. 강 너비는 8~9리. 이 절강은 서남쪽으로는 복건성(福建省)까지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바다와 통했다.
항주에서 북경까지의 뱃길은 약 40일 거리라고 최부는 중국인에게 들었다. 또 중국인은 절강성 항주는 류큐, 일본, 태국, 말레이반도 사람들이 복건성에서부터 출발하여 북경으로 가져가는 공물(供物) 실은 배들이 정박하는 곳이며, 다시 이곳을 지나면, 소주(蘇州)에 이르게 되고, 소주는 천하의 진귀한 재물들이 모이는 풍요로운 도시라고 했다.
소주는 오랜 옛날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닿아 있고, 3개의 강(吳淞江, 婁江, 東江)과 다섯 호수를 끼고 있어 비옥한 들판이 천리에 이르고, 선비들이 못에 모여든 고기처럼, 혹은 숲에 모여든 짐승처럼 많으며 바다와 뭍의 진귀한 보물들과 금, 은, 비단, 구슬들과 온갖 재주꾼, 부유하고 큰 상인들이 모두 모여드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번화한 곳을 강남이라 했고, 또 강남 중에서도 항주와 소주를 제일가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강남의 인구는 당대(唐代)부터 늘어났다.
인구가 늘어나자 세금 수입이 증가하면서 조운(漕運)이 중대한 문제로 떠올랐다. 당대(唐代)의 쌀 생산량은 강남이 두 번째였고, 원대(元代)가 되면 연경(燕京)의 쌀과 조는 모두 강남에 의존하게 되었다.
쌀은 조운(漕運)과 해운(海運)을 통해 수도로 운송되었다. 도자기 산업도 북방에서 강남으로 위치가 바뀌게 되었다. 원래 도자기는 북방의 농민들이 일종의 부업으로 만들던 것이었다.
당대(唐代)에 공자(貢瓷)가 있었고, 송대(宋代)에는 정요(定窯), 여요(汝窯), 자요가 북방의 도요지로 이름을 날렸다. 강남에는 창요(昌窯), 용천요(龍泉窯), 가요(哥窯)가 있었다. 원·명대(元 明代)에 이르면 도자기 산업은 모두 강남으로 옮겨갔다.
그 중에서도 경덕진(景德鎭)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상업 방면 또한 남방은 갈수록 번창한 반면 북방은 나날이 위축되어갔다.
중국의 상업의 발달은 명대(明代) 중반부터 두드러졌다. 농업 인구가 줄어들면서, 비농민층이 증가하였고, 특히 상인이 부유층으로 떠올랐다. 도시는 늘어났고, 더욱 커졌다. 이 시기의 중국의 도시가 1720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름난 도시만도 30개가 넘었다. 항주, 소주, 개봉, 남경, 북경 등의 인구가 100만명에 가깝거나, 100만명을 훌쩍 넘었다. 30만~50만 명에 달하는 중간급 도시도 많았다. 송대 이전의 도시는 거의 정치·군사가 중심이었으나 명대에 이르러서는 순수한 상공업 도시가 생겨났다.
상공업 도시의 부흥은 각지에서 모여드는 화물의 집산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 상공업 도시들은 지리적으로 수륙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했다. 특히 소금업과 조운(漕運)이 상공업 도시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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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관 정화가 이끄는 대선단 | ||
경항대운하
최부 일행은 대운하를 따라 역참(驛站)을 옮기며 나아가기를 계속했다. 역참은 포(鋪)라고 부른다. 이 포는 약 10리마다 설치돼 있고, 급히 공문을 전달해 주거나 죄인의 압송, 세금이나 물자를 편리하게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기구다.
운하를 따라 이 역참은 북경까지 이어져 있다. 15세기 중국에는 북경을 중심으로 모두 1291개의 역참이 있었는데 7개의 간선(幹線)과 지선(支線)으로 나뉘어 중국 전역에 뻗어있었다.
운하 곳곳에는 '파'와 '갑(閘)' '홍(洪)'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파'는 마주보는 강가의 끝에 돌로 제방을 쌓고, 그 제방 위에 돌기둥을 두 개 심어서 돌기둥 위에 대문과 같이 가로로 나무를 얹고 도르레를 설치하여 배를 끌어 올리는 장치이다.
갑(閘)은 강 양쪽 기슭에 돌로 제방을 쌓았는데 제방의 폭을 줄여 배 1척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게 만든 시설이다. 평상시에는 넓은 판자로 물 흐름을 막아 물을 모아두는 역할을 한다. 판자가 많고 적음은 물의 양에 따라 다르다.
제방 사이에는 나무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오가며 배 지나가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한다. 홍(洪)이라는 것은 강의 양쪽 기슭에다 돌로 제방을 쌓고서 길을 닦아 놓은 것이다.
이 홍은 배가 물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때 사용하는 시설인데 물 흐름을 거스르고 배를 끌고 가려면 제방 양쪽에 인부들과 소가 필요하게 된다. 이들은 양쪽 제방에서 배가 오면 굵은 밧줄을 배에 묶어 힘들이고 배를 끌어당긴다.
한 척의 배를 끌어가려면 100명의 인부와 10마리의 소가 필요하였다. '파' '갑(閘)' '홍(洪)' 에는 관리가 지키고 있어서 항상 배를 끌어당길 사람과 소를 모아 놓고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북경까지 가는 대운하는 7세기초 수양제(隋煬帝)가 완공시킨 수로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운하의 목적은 강남과 화북, 변경과 수도를 잇고, 물자의 원활한 유통과 비상시 군수품을 수송하여 국토의 통일을 강화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즉, 정치의 중심인 북방과 경제의 중심인 남방을 물길로 이어 조세로 징수한 쌀을 북방으로 수송하는데 이용하였다. 원대가 되면서 부득불 운하의 물길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연경(燕京;北京)이 수도가 되면서 기존의 운하는 멀리 우회하고 있어서 경제성이 낮은 까닭에, 서주(西州)와 북경간의 회통하(會通河)를 새로 개통시켜 강남과 연경과의 거리를 줄였다.
그러나 실제로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수심이 얕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 홍무제(洪武帝, 1368~1398)때 이르러 수로와 운하를 보수하고, 그의 아들 영락제(永樂帝, 1403~1424)때가 되면 보다 안정적인 운하를 재개통할 수 있었다.
수도의 소비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경제의 중심지인 강남지방으로부터 운하를 통한 수송, 즉 조운(漕運)을 활발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것이 오늘날 경항(北京-杭州) 대운하인데 최부 일행이 이용한 물길도 바로 이 운하였다.
명나라 때의 조운(漕運)의 방식은 모두 다섯 가지였다. 하운(河運), 수륙겸운(水陸兼運), 지운(支運), 태운(兌運), 개태운(改兌運)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지운(支運)'은 관(官)이 거두어들인 세금을 다시 각지로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1년에 네 번 정도 약 300만석을 보냈다. 또한 '태운(兌運)'은 백성을 위해 현금과 군대 물자를 운송하는 것을 말한다. 개태운(改兌運)은 군대를 위한 군운(軍運)이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조운(漕運)과 관계된 운수병(運輸兵)만 12만명이나 되었다. 수송선만 1770척에 달했으며 운송되는 양곡은 북방이 75만 6000석, 남방이 324만 4000석이나 되었다. 운송되는 남방의 양곡이 북방의 양곡에 비해 거의 80% 가까이 차지했다.(周時奮, 2006)
최부가 본 북경
최부가 북경에 있는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한 것은 3월28일이니 한달 하고도 15일이나 걸렸다. 물론 도착 기일보다 3일 먼저 다다랐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최부 일행을 호송해 온 절강성 지휘첨사 양왕(楊旺)이 병부에 잡혀가 곤장을 20대나 맞고 왔다.
알고 보니 그의 죄명은 보고 태만이었다. 절강성 삼사(三司)에서는 최부 일행의 표류 사실을 예부(禮部)와 병부(兵部) 두 곳에 동시에 보고해야 했지만 실수로 직접 병부(兵部)에만 보고하였고, 이 사실을 예부에서 황제에게 건의하여 그 죄를 묻게 한 때문이었다.
최부는 북경에서 조선의 사신이 왔다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신은 안처량이라는 재상으로, 최부와 관련된 공문이 3월 12일 절강성으로부터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그 사실을 급히 베껴갔다는 내용도 알았다.
적어도 4월이나 5월 사이에 최부가 바다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최부는 북경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민간에서는 불교를 숭상하고, 유교를 숭상하지 않으며, 장사치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의복은 짧고 바짝 좁게 붙여 입는 것이 남녀와 같고, 음식은 비린내 나고 더럽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 같은 그릇을 써서 오랑캐의 남은 풍속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유감스럽습니다…모래흙이 날려 일어나서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며, 그 땅의 인구가 많음과 누대의 성대함, 그리고 시장의 풍부함이 아마 소주와 항주에 미치지 못합니다. 북경성 안에서 소비되는 물건이 모두 남경과 소주, 항주로부터 옵니다"
북경은 1421년 영락제에 의해 천도되었다. 영락제가 건설한 북경은 쿠빌라이 칸의 대도(大都)에서 약간 남쪽 지점에 원대(元代)의 정원과 호수, 언덕을 그대로 두고 건설되었다.
이 영락제의 북경은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 관료와 귀족이 거처하는 내성, 백성들이 거주하는 남부의 외성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북경성은 줄곧 남쪽으로 확장을 꾀해 번화한 상업구를 이루었다. 정기 시장이 형성돼 시장이 서는 날에는 상인과 사람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북경에 거주하는 인구도 나날이 늘어 북경성의 거지가 1만명을 넘었고, 환관, 궁녀, 창녀, 승려 수 또한 10만여명에 달했다. 이런 성시(盛市)는 대운하 때문이었다.
활발한 남방과 북방의 조운(漕運)으로 운하 주변에는 새로운 중소 상업 도시와 진(鎭)이 늘어났다. 남방의 양곡이 북경에 조달되면서 생활 소비품의 집산지(集散地)가 되었다.
운하가 통하는 북경 주변의 임청(臨淸)은 벽돌 제조업, 모피업, 조선업 등 운하와 직접 연관된 3대 산업으로 흥성했다.(周時奮, 2006) 명대(明代)에는 해적과 왜구가 창궐하여 해방(海防)을 위해 해운(海運)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오로지 운하를 이용한 조운에 매달렸다. 상업의 발달은 화폐의 유통과 유행을 가속화 시켰다.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유행 풍조가 일었고 기녀들이 그 유행을 주도하였다. 화장품, 모자, 옷, 머리 장식 등 개인 치장용은 물론, 사가(私家)의 정원을 꾸미거나 비싼 나무를 사들이고, 분재로 집안을 장식하여 부귀영화를 과시하는 것이 당시 상업의 발달한 중국 도시의 분위기였다.
제주문화연구소장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