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지키기 위해 오는 육지 원병(援兵)
제주, 남자 부족으로 군인충당 어려워…매년 육지 기마병 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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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도봉에서 바라본 화북포 | ||
포구의 연가(戀歌)
'제주는 바다 속에 있는 외로운 섬으로 바람과 파도가 매우 험해서 그곳에 가기를 몹시 꺼린다. 옛날 어느 사람이 제주의 관리가 되어 장차 부임하게 되었다.
떠나는 날을 당하여 눈물을 흘리자 그의 친구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다행히 좋은 바람을 만나서 물결에 밀려 여인국(女人國)으로 가게 되면 국왕(國王)의 남편이 될 수가 있는데 왜 울기까지 하는가?" 하니 그 사람은 웃으며 울음을 그쳤다' 고 한다.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1563~1629)의 말에서 보듯 제주는 관리들이 부임하기 싫어하는 기피 대상지역 1번지다. 부임하는 관리들은 제주에 가는 것을 꼭 죽음의 바다로 가는 것과 동일시했다. 물론 표류(漂流)와 익사(溺死)의 공포 때문이었다.
당시 소문에 배가 침몰하여 돌아오지 못하는 제주사람이 1년에 적어도 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으니 바다 건너기가 오죽 두려웠으랴. 사실 제주를 일컬어 삼다(三多)의 섬이라고 하는 것 중 여자가 많다는 것(女多)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제주는 삼다(三多)의 섬이 아니라 사다(四多)의 섬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돌 많고(石多), 바람 많고(風多), 여자가 많은(女多) 것에, 가뭄이 많은(旱多) 것 하나를 더 추가해야 비로소 제주가 바로 보인다.
제주는 지질적으로 화산에 의해 생성된 섬이라서 비가와도 금방 땅에 스며드는 특성이 있다. 즉 투수율(透水率)이 매우 높아 폭우(暴雨)가 쏟아져도 몇 시간만 지나면 물 흐르던 하천이 말라버리고 지표면 위의 흙이 메마르게 된다.
제주가 해중(海中)의 섬이라는 이유 때문에 표몰(漂沒) 사고가 빈번하다는 것은 동력선이 나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중세의 제주도는 표몰 사고에 의해 남자가 적어지는 현상을 겪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제주는 여자가 많고 사내가 적어서 마을의 여자들은 제 짝이 드물었다"라고 하는 것은 애절한 정한(情恨)의 표현이었다.
또 그가 본 대로 "매년 3월에 변방을 지키기 위해 오는 원병(援兵)이 들어오면 여자들은 곱게 단장하고, 술을 들고 나와 별도포(別刀浦)에서 기다린다. 배가 포구에 들어오면 술을 권하여 친해져 자기 집으로 맞이한다.
8월에 수자리가 끝나면 그 사람은 떠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송별한다."고 하여 연가풍(戀歌風)의 노래인 '영랑곡(迎郞曲)'과 '송랑곡(送郞曲)' 두 곡을 지었다. 말 그대로 '영랑곡(迎郞曲)'은 낭군을 맞는 즐거운 노래요, '송랑곡(送郞曲)'은 님을 떠나보내는 슬픈 노래다.
오늘날 포구의 만남과 이별의 희비(喜悲)가 각별한 것도 바로 이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영랑곡(迎郞曲)-'삼월이라 삼짇날 복사꽃 활짝 피어/돛단배로 두둥실 바다를 건너오니/곱게 단장하고 별도포(別刀浦)에 노닐다가/해 지는 언덕 위로 팔짱끼고 돌아오네'
송랑곡(送郞曲)-'조천관(朝天館) 안에서 연분홍 눈물 적시는데 /사공은 어서가자 돛을 바삐 올리네/각시의 안타까운 심사 동풍(東風)이 아랑곳하랴/배를 얼른 날려 보내 벽공(碧空)으로 떠나누나'
노래에 나오는 별도포(別刀浦)는 화북포라고도 한다. 별도포는 조천포(朝天浦), 어등포(於登浦), 조공천(朝貢川), 애월포(涯月浦) 등과 함께 내륙과 제주를 연결하던 제주 북부지역의 해양 관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별도포와 조천포에서 바람을 기다리다 출륙하였다.
두 포구는 다른 포구에 비해 비교적 크고 뱃길이 순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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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17세기 고려대 박물관 소장. | ||
15세기는 극심한 왜구의 침입 때문에 남해안과 제주는 언제나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특히 바다 밖 섬인 제주도는 다른 지역보다도 남자가 부족하여 군인을 충당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것은 조선 전체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삼면이 바다라는 점, 북쪽으로 대륙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이를 지키는 군역(軍役)이 항상 먼저였다. 그러나 군인의 수요가 필요하였지만 이를 충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이를 줄이면서까지 군적(軍籍)에 등록하는 일도 생겼다.
원래 16세를 중(中)이라 하였고, 21세가 돼야 정(丁)이 돼 군역을 지웠던 것을, 중국 진나라(晉) 때 이르러 16세를 정(丁)으로 삼으면서 그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또한 16세가 되는 소년을 정(丁)으로 삼았다. 또한 군대의 결원이 발생하면 일정한 정원(定員)을 즉시 보충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자 수령들은 조정의 문책을 면하기 위해 장부상 젖먹이 어린애까지 나이를 속여서 미봉책(彌縫策)으로 삼을 정도였다.
16세기 조선의 군대는 평시에 18만명을 유지했었다. 군역의 의무가 있으나 군포(軍布)를 바쳐서 실제 군역을 면제하는 보인(保人)까지 합치면 군역과 관련된 장정이 50만명이나 됐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은 뒤 조선의 병력은 6만명에 불과하여 해마다 법을 강화해 부족한 군인을 보충했으나 호수(戶數)가 줄면서 유랑(流浪)하는 자가 늘었고, 도망자 또한 많아 군역 충당이 어렵게 되었다.
제주의 경우 변방을 지키는 군사가 부족하자 원병(援兵)을 파견하여 보충하였다. 제주는 남쪽 변방으로서 일본, 중국을 양쪽에 두고 있는 형세여서 적의 침략이나 섬 안에서 모변(謀變)과 같은 난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땅이었다.
그래서 제주의 원병은 임진왜란 전에는 육지의 기마병(騎馬兵) 500명을 뽑아서 매년 3월초에 제주도에 보냈었다. 그러나 임진년(1592) 이후 군사가 줄어들면서 200명을 줄여 300명으로 그 수를 제한하였다.
군사가 줄어들자 원병의 교체도 문제가 되었다. 선조 33년(1600) 비변사(備邊司)의 보고대로 '제주에 들어가 방어하는 군사들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교체를 못하고 있으니, 군인들의 괴로움과 원성(怨聲)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방어하기가 급한 때라 늦가을이 되어서 방어를 잠시 쉴 때를 기다려 원병을 교체하도록 하였다.' 당시 원병이 필요했던 제주도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1509년(선조 23년)에 있었던 극심한 전염병과 연이어 흉년이 들면서 많은 장정들이 사망하니 변방을 지킬 군사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교적(校籍)에 오른 교생(校生)들에게 읽은 경서(經書)를 강독하게 하여 시험을 치러 합격 점수에 미달된 제주 교생(校生) 106명과 정의(旌義) 교생 2명을 법에 의해 강등시키고 군역에 보충하기도 했다.
실제로 1601년에 왜적에게 잡혀 갔다가 도망 온 사람들로부터 '대마도 왜적이 제주를 침범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들은 터라 제주에 원병 파견의 필요성은 더해갔다. 그렇지만 몇 년이 지나도 이미 파견된 원병 교체가 지체되자 급기야 원병 교체 병력을 다시 150명으로 조정하였다.
이때 제주 섬 내부에서는 길운절의 역모사건이 있어서 정세가 매우 흉흉하였다. 이 여파로 섬과 내륙을 오가는 사람들의 검문을 강화하여 통행증(文引)을 반드시 확인하도록 하였다. 사사로운 상행위(商行爲)를 금했으며 병력 보충을 위해 도망간 제주인들의 쇄환이 거론되었다.
해안방어 시스템 봉수(烽燧)
봉수란 적이 침입한 것을 알리는 통신시설이다.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봉수는 전국적으로 연결되어 긴급한 소식을 알렸다.
봉수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미 주(周)나라 때에 거짓 봉화(烽火)를 든 일이 있고, 한(漢)나라 때에는 봉화(烽火)가 왕궁(王宮)까지 통하였다고 한다.
한나라 때부터 변방에 도적이 왔을 때 즉시 횃불을 들어서 서로 알리게 됐다. 그것을 봉화(烽火)라고 했다. 낮에는 땔나무를 쌓아 놓고, 불태워서 그 연기를 바라보게 했다. 그것을 수(燧)라고 한다.
당나라 때에는 봉후(봉수대)는 대개 서로 30리의 거리를 유지했다. 봉화에는 횃불을 한개 드는 것, 두개 드는 것, 세개 드는 것, 네개 드는 것이 있다.
매일 초저녁에 횃불 한개를 드는 데 이것을 평안화(平安火)라고 하며 하루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밖의 것은 도적의 수가 많고 적음에 차등을 두었다. 조선의 봉화 제도는 대체로 당나라 제도를 따른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봉수의 제도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평시에는 횃불이 하나, 적이 나타나면 횃불이 둘, 적이 국경에 가까이 오면 횃불이 셋,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이 넷, 적과 싸우면 횃불이 다섯이다.
한양에서는 번(番)을 서는 금군(禁軍)이 병조(兵曹)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진장(鎭將)에게 보고 한다.'라고 했다.
한양까지 이르는 봉수는 목멱산(木覓山) 봉수가 마지막인데, 이 봉수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횃불이 5개나 된다. 동쪽으로 첫째 것은 함경·강원 양도에서 양주(楊州)의 아차산(峨嵯山) 봉수로 온 것을 받고, 둘째 것은 경상도에서 광주(廣州) 천림산(天臨山)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다.
셋째는 평안도에서 육로(陸路)로 모악(母岳)의 동쪽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고, 넷째는 평안·황해 양도에서 뱃길로 모악의 서쪽 봉수로 받는다.
다섯째는 공충(公忠)·전라 양도에서 양천(陽川)의 개화산(開花山) 봉수로 오는 것을 받는 것이다. 한양에서는 병조(兵曹)에서 사람을 선정하여 망을 보고 있다가 이튿날 이른 새벽에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왕에게 알린다. 사변(事變)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곧 보고해야 한다.
목멱산(木覓山) 봉수는 봉수소(烽燧所)마다 군졸이 4명·오장(伍長)이 2명씩이며, 연변(沿邊)에는 봉수소(烽燧所)마다 군졸이 10명·오장이 2명씩이며, 내지(內地)에는 봉수소마다 군졸이 6명·오장 2명씩 배치된다. 군졸과 오장은 모두 봉수가 있는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혹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요란하여 횃불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차례 달려가서 보고한다. 목멱산과 모악(母岳) 두 산의 봉군(烽軍)으로 배정된 집은 각 30호이며, 매호마다 보인(保人) 3명을 두었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