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군과 연군에게 한글로 된 전투수칙 암송케 해
56. 제주의 해안방어-3.봉수(2)
제주인 도망갈 것을 우려, 육지행 허락 받아야…뭍사람과 혼인도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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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구덕을 업은 제주여자. 출륙금지령은 노동력 착취를 위한 인구증가의 조치였다. | ||
노동력 유출을 막았던 출륙금지령
왕화(王化·임금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절해고도(絶海孤島)는 조선 왕조의 큰 고민거리가 되는 변경이었다. 제주에 똑똑한 문관을 보내기에는 너무 외진 곳이고, 왜구(倭寇)와 황당선(荒唐船:외국배)을 생각하면 무관(武官)이 적격일 것 같았다.
그러나 무관(武官) 또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변방의 바깥 경비는 안심이 되겠지만 섬 안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제주의 목사로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청렴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제주 목사를 선정할 때마다 적격자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제주 변방이 불안할 때마다 북방의 국경을 지켰던 유능한 장수들이 제주목사로 자주 거론되기도 했다.
어쩌면 밖으로 오는 적을 지키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왕조를 유지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백성들의 노동력이 더 필요한 때문이었다.
노동력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력과 관계가 깊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라도 왕화(王化), 즉 통치력이 수월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왜냐하면, 조선의 경제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대표적인 말 목장이 제주에 있었고,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각종 특산물이 생산되고 있어 조정에 필요한 토속 물품을 공급해주는 쓸모 있는 섬이라서 그랬다.
사실 제주 인구는 성종(成宗)때부터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흉년이 거듭 발생하면서 생산력이 줄어들자 관리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부역(賦役)을 채우지 못한 민중들이었다.
각사(各司)의 노비들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신역(身役)에 시달렸고 포작인, 잠녀, 서민들은 귤, 진주, 전복, 가체(얹은 머리), 갓 등 끝없이 요구하는 공물(貢物)에 이물이 났다. 민중들의 삶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금을 물기 위해 일하는 짐승에 불과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도망이었다. 도망자가 늘어나면서 당장 공납(貢納)에 문제가 생겼고, 변방을 지킬 군사도 크게 부족했다. 불안함을 느낀 것은 조선의 지배층이었다.
급기야 인조 7년(1629)에 이르러 제주인들을 육지로 나갈 수 없게 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
그 뒤로부터 200년 동안 제주인은 특별한 허가 없이 육지를 함부로 왕래할 수가 없었고 육지인과 혼인할 수도 없었다. 특히 여성들의 출륙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여성들의 출륙은 인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차차 인구는 늘어났지만 조선왕조 내내 민중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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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력도의 서귀진 모습 | ||
현재의 눈으로 보면, 제주에 봉수와 연대가 설치된 곳은 아름다운 절경(絶景)이라고 할 수 있다. 봉수와 연대는 조망권(眺望圈)이 생명이기 때문에 멀리 보이고, 잘 보이는 곳이 최적지이다.
봉수와 연대는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설치돼 곧바로 지휘본부가 있는 제주목으로 집중되었다. 적의 침략을 빨리 알리고, 이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육지와의 빠른 연락체계 또한 봉수가 제일 중요했다. 17세기에는 제주에 변고(變故)가 있을 경우 연기로 알리면 전라도 황어천(黃魚川)에서 이를 보고 가리포 첨사(僉使)가 구원하러 오는 대비책이 마련돼 있었다.
또 한때는 한라산 허리에도 봉수를 설치하여 전라도 해남(海南)의 백도와 연결하였으나 한라산에 구름이 자주 끼고 안개가 많아 이를 폐지하였다.
섬에서 사변이 일어나면 배를 타고 가 알리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육지에서 구원병이 올 때까지 우선은 섬 자체의 방어가 중요했기 때문에 섬의 남자들은 유사시 생업을 팽개치고 속오군(束伍軍)으로 투입되었다.
항상 남자가 모자랐기 때문에 사변이 발생하면 성곽을 지키는 일에 신체가 튼튼한 여성들도 징발되었다. 제주인들은 이들을 여자 장정이라는 의미에서 '여정(女丁)'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이미 17세기에 흔히 쓰였고 '남정(男丁)'과 대응되는 말이었지만, 말이 여정(女丁)이지 부족한 군역을 억지로 충당하기 위한 지배층의 여성 착취의 한 방편이었다.
아무튼 여정의 등장으로 조선의 유교이념은 혼란을 맞았다. 유교의 강상윤리(綱常倫理)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일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제주에서 만큼은 유교의 이념도 스스로 묵살하였다.
남녀가 섞여 물질을 하는 것에 질겁하던 제주 목사(牧使)들이었지만 변방을 지키는 다급한 현실에서는 남녀를 따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듯 현실은 어떤 이념이라도 정정하거나 폐기하게 만든다.
이념은 비로소 현실 속에서 생동하다가도 현실에서 어긋나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이념의 취약성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세계는 이념의 덩어리였고, 그때마다 그 이념을 검증하는 역사적 실천으로 인해 다양한 이념들이 되살아나거나 흔적없이 꺼져갔다. 아무튼 이 여정이라는 말 때문에 조선의 유교적 이념은 그 원칙이 훼손된 셈이다.
제주에 봉수(烽燧)는 고려시대 충렬왕 때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조선 세종 21년(1439)에 의정부에서는 제주 도안무사(都按撫使) 한승순(韓承舜)에게 '제주의 봉화(烽火)·후망(候望)을 엄중히 하고 군을 정비하여 바다를 잘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한승순은 그 방비책을 곧바로 마련하여 보고하였다.
"제주에 봉화(烽火)·후망(候望)은 제주목 10개소, 정의현 7개소, 대정현 5개소로 모두 22개소인데 한 봉화(烽火)마다 5명을 나누어 정합니다.
또 연대(煙臺)를 쌓을 때는 높이와 넓이가 각 10척입니다. 후망인(候望人)에게는 병기(兵器), 깃발(旗), 각(角)을 가지고 올라가게 하여, 적이 변란을 일으키면 봉화를 올리고 각(角)을 불어서 서로 알립니다.
만약 적들이 육지에 상륙하면 육군이 이를 격파하고, 또 수군이 협공하여 왜적을 좇아 잡는 것이 좋은 계책입니다. 작은 공·사선(公私船) 5, 6척으로 선대(船隊)를 만들어 한 배마다 노 젓는 군졸 4명, 키잡이 1명, 사관(射官) 2명, 또 전투를 지휘하는 관리를 두어 북, 깃발, 각(角), 화통(火筒), 화포(火砲)로 싸움을 돕게 하십시오."
또 한승순은 제주의 노인들에게 여쭈어 정의현 동쪽 우도봉(牛島峰), 대정현 서쪽 죽도(竹島)가 왜선(倭船)들이 몰래 정박하는 요해지(要害地)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 섬의 인근인 수산(水山), 죽도 부근, 서귀방호소(西歸防護所)에 성을 쌓아 밤에 침입하는 왜적에 대비하도록 요구하였고, 제주, 정의, 대정에 역참(驛站)을 설치하여 1년씩 돌아가며 번을 서게 하여 마병(馬兵)을 활성화하도록 요구하여 그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16세기가 되면 왜적이 극성하여 봉수의 수효도 약간 증가하였고 해안의 방어도 더욱 중요해졌다. 선박의 발달로 인해 제주 해안으로 표착하는 배가 늘기 시작하면서 해안을 감시하는 망대(望臺)인 연대(煙臺)가 설치되었다.
제주 해안 방어의 중요성에 따라 18세기가 되면, 제주에는 봉수가 25개소, 연대가 38개소 등 모두 63개로 늘어났다. 이런 수효는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의「남환박물(南宦博物」, 1706년 제주목사로 왔던 이규성(李奎成)의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 이원조(李源祚, 1792~1872)의 「탐라지도병지(耽羅地圖幷識)」에도 같이 나타난다.
즉 제주의 봉수(烽燧)는 제주목에 10개소, 정의에 10개소, 대정에 5개소이며, 연대(煙臺)는 제주목에 18개소, 정의에 11개소, 대정에 9개소가 있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도 봉수와 연대의 수효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63개소였다가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조선의 신호체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주 봉수군의 역할
봉수는 가시거리가 좋은 높은 산이나 동산에 설치하고, 연대는 해안의 둔덕 위에 설치하여 바다를 감시하는 시설인데 봉수와 연대는 기능과 구조의 차이가 있다. 먼저 봉수는 높은 산 정상에 설치하기 때문에 가시거리가 비교적 멀어 먼 바다를 보는 것에 용이하다.
그런 만큼 다가오는 배가 적선(敵船)인지 표류선(漂流船)인지 똑바로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해안 가까이에 설치된 연대에서 다가오는 배를 식별하여 위험 여부를 판별하게 된다.
적을 가까이에서 맞는 해안의 연대는 위험이 많으므로 제주 현무암을 이용하여 요새처럼 솟아오르게 쌓았다. 그러나 해안에서 떨어진 산 위에 설치된 봉수는 주변의 흙을 이용하여 둥글게 쌓아 봉덕을 만들어 사용하였을 뿐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봉수에는 별장(別將)과 봉군(烽軍), 연대에는 별장(別將)과 연군(煙軍)이 배치되었다. 근무인원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근무요원들은 근처 마을의 백성으로 구성되었다.
1번(番)에 별장 2인과 봉군이나 연군 4명 내지 12명으로 조직돼 1일 3교대로 봉수와 연대를 24시간 지켰다. 봉수나 연대에는 지휘관인 별장과 병졸인 봉군 및 연군이 같이 근무하였지만 지휘관과 병졸의 지침서(節目)는 서로 달랐다. 별장은 한문으로 된 지침서를 숙지하였고, 봉군이나 연군은 언문(諺文;한글)으로 된 지침서를 암송하며 만일에 사태를 대비하도록 하였다.
병졸들의 지침서인 「봉수군 강절목」은 매우 구체적인 행동요령이 명기돼 있다.
'봉군은 봉연대(烽煙臺)를 항상 지켜 우리나라 왕래선과 남의 나라 거래선(去來船)을 주야로 요망(瞭望)한다. 우리나라 거래선은 수진포(守鎭浦)를 아는 고로 포구를 향하여 의심 없이 들어오나 남의 나라 지나가는 배는 앞으로 멈칫 뒤돌아보며 포구를 짐작하지 못해 동서(東西)로 두류(逗溜:주춤거린다)한다.
백포(白布, 흑포(黑布), 또는 끈 달기(秘標)로써 분별한다. 낮이면 연기를 피우고, 밤이면 불을 피워 명심하게 위험을 알리다가 만일 배가 한꺼번 에 몰려오면, 다섯 봉화를 피워 관할지역에 알리고 사닥다리를 올려 성문을 굳게 닫고, 방비할 무기를 준비했다가, 혹시 가까운 경계에 하륙(下陸)한 간사한 도적놈이 연대(煙臺)를 살펴보고 살짝 도착하면 성 위에서 각(角)을 불면서 총으로 쏘고 돌로 맞추면서 죽기를 거울삼아 사면으로 방비할 때, 성으로 올라오는 도적놈에게는 모래를 흩어 뿌려 눈에 가시가 일게 하고, 백병전이 될 적에는 때에 따라 대처하다가 저절로 나와 총알을 쏘며 죽이기를 도모한다.'
제주문화연구소장·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