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삼신인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
[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3>제주올레 2코스 광치기-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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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한 녹음 아래 올레의 화살표 표시가 회화적이다. | ||
제주올레를 걷다보면 유난히도 여성들과 많이 마주치게 된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함박웃음과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며 걷는 이들도 있고, 마치 자기 동네의 고샅길을 거닐듯 사부작 사부작 홀로 걷는 이들도 있다. 얼핏 보면 익숙한듯 하면서도 곰곰이 따져보면 낯선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어떤 길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들과 마주칠 수 있었던가? 여성 홀로 일말의 불안감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는가? 왜 유독 제주올레에는 여성들이 넘쳐나는가?
예로부터 제주는 여성들의 기가 드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모권사회의 전통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전통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해내기란 어렵다. 어줍지 않은 내 결론부터 들이대자면 나는 이것이 일종의 '후천개벽'이라고 생각한다. 발상의 전환이요, 음양의 교체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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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올레에서는 유난히 여성 올레꾼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 ||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른바 남성 산악인들은 이 길에 금세 흥미를 잃고 만다. 제주올레에는 체력을 소진하고 한계에 도전하여 무언가를 성취해냈다는 자부심(?)을 선사해줄만한 그런 길이 없다. 실제로 내 주변의 지인들 중 몇몇은 제주올레를 다녀온 후 이렇게 반문한다. 그게 뭐야? 이게 다야? 제주올레의 전코스를 3박4일만에 종주했다는 한 친구는 여전히 무언가 미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모로 흔든다. 너무 시시하던데? 차라리 불수도북(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 종주코스)이나 한 번 더 뛸걸 그랬어. 이런 친구들에게는 그저 피식 웃어줄 도리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제주올레라는 '전혀 새로운 길'을 음미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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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산행을 하게 되어 있는 대수산 정상에서는 제주 동해안의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 ||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제주올레를 걷는 여성들의 얼굴이 그토록 밝고 환한 것은. 그들은 무언가를 꼭 성취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걷기를 즐기고, 함께 걷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마주치는 사물들마다 사랑의 눈길을 보내면 그뿐이다. 얼마나 많이 걸었느냐 혹은 얼마나 빨리 걸었느냐는 그들의 관심 밖이다. 가다 못가면 어떤가? 다른 길로 에둘러 가면 또 어떤가? 그들에게 제주올레는 '소풍'이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이 지긋지긋한 남성중심사회의 폭력성과 성취문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제주올레는 그 길을 걷는 여성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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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올레 제2코스는 제주 시조의 설화가 서린 혼인지를 통과한다. | ||
제주올레의 제2코스는 나 홀로 걸었다. 식산봉 아래 오조리 마을을 지나칠 때 즈음 역시 나처럼 홀로 걷고 있는 대구 출신의 한 여성을 만났다. 우리는 오래된 지인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이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자 자기 페이스대로 걸었다. 혼인지에서 재회한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사과 한 알을 깎아 먹었다. 고, 양, 부 삼신인이 벽랑국에서 찾아온 세 공주를 만나 신접살림을 차렸다는 바위동굴을 들여다보며 그 소박함 내지 질박함에 빙그레 웃어보기도 했다. 이윽고 온평포구에 도착한 우리는 해삼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기울이며 우리의 만남과 이별을 자축했다. 위의 이야기는 그 술자리에서 내가 즉흥적으로 펼쳐보인 '제주올레 후천개벽설(!)'이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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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치기 해변에서 식산봉으로 가는 길에 지나치게 되는 방조제 길 옆의 저수지. | ||
/글 심산(작가·심산스쿨 대표) / 사진 김진석(사진작가)
※이 연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