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와인속에 담긴 추억
[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17> 14코스 저지-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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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령 마을의 자생 백련초밭과 짙푸른 바다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 ||
어제는 심산와인반의 월례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다른 와인 모임들은 뭐 세미나다 비교 시음이다 제법 학술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던데 심산와인반의 콘텐츠는 단순 무식하다. 그냥 먹고 마시고 놀 뿐. 계절이 계절인지라 어제의 메뉴는 생선회와 육회 그리고 화이트와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중간 즈음에 레드와인도 끼어들었고 끝내는 꼬불쳐둔 위스키까지 등장했다. 빈 병들을 주욱 훑어보자니 어제 최고의 화제(?)를 몰고 온 군계일학의 와인병이 눈에 띈다. 바로 제주 월령 선인장마을의 헬스 와이너리에서 만든 '백년초야'다.
백년초 선인장으로 만들었다는 이 와인의 품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 다만 서른 개가 넘는 와인병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빈 병'이 아닌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는 사실만을 부기해 놓으니 독자 제현께서 짐작해보시라. 하지만 와인을 꼭 품질만으로 마시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추억으로 마시기도 한다. 나는 남겨진 '백년초야'를 한 잔 따라 홀짝이면서 제주올레 14코스의 사진첩을 연다. 내가 찍은 사진들 속에 헬스 와이너리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에는 그저 신기한 마음에 셔터를 눌렀을 뿐 구입하지는 않았는데 최근 다시 찾은 제주에서 한 지인이 억지로 배낭 속에 쑤셔 넣어준 덕에 이렇게 만나게 된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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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 14코스로 출사를 나온 김진석사진반 사람들이 노을을 기다리고 있다. | ||
저지에서 한림에 이르는 제주올레 14코스는 '다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다. 용수 포구에서 시작하여 숲과 오름을 넘나들며 내륙으로 파고들었던 코스가 다시 돌담길과 하천길과 숲길을 통과하여 바다로 나아간다. 홀로 부슬비를 맞으며 걷던 그 길은 참으로 유장하고 고즈넉했다. 내가 찍은 사진들 속에서 당시 내가 불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다. 얼론 어게인, 내처럴리(Alone Again, Naturally). 14코스는 어쩌면 '선인장의 길'이라 부를만도 하다. 코스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김정문 알로에의 계약재배농장을 지나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외래 선인장들은 비닐하우스에 갇혀있다. 나중에 만나게 되는 월령 마을의 자생 백년초들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름도 예쁜 큰소낭 숲길과 오시록헌 농로 그리고 굴렁진 숲길을 지나자 드디어 바닷가에 자리 잡은 백년초의 마을 월령에 이른다. 사진작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곳에 이르면 누구나 카메라의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게 된다. 참으로 독창적인 모습으로 뒤엉킨 채 바다와 하늘을 향해 가시를 곧추세우고 있는 백년초들의 자태가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바위 틈에 똬리를 튼 백년초도 신기하지만 집 담벼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백년초도 경이롭다. 이 마을에서는 뱀이나 쥐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렇게 백년초로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월령 마을부터 한림항까지는 '비양도 갤러리'다. 제주에 딸린 화산섬들 중 가장 최근에 생성되었다고 하는데 그게 천년 전의 일이다. 고작해야 백년도 못 사는 인간들로서는 상상의 저편에 속하는 거대담론이 눈 앞에 현현해 있는 셈이다. 발길을 옮기고 각도를 틀 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비양도의 자태는 아무리 봐도 지겹지가 않다. 지겹기는커녕 저 섬의 구석구석에는 어떤 비경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 역시 제주올레의 후유증이다. 제주올레 덕분에 가파도와 추자도까지 드나들게 되면서 '섬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즐거움'에 눈뜨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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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림항에서 바라보는 지는 해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 ||
한림항 비양도 선착장 부근의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때는 봄이었고 평일이었으며 하루 종일 부슬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14코스는 길다. 거의 20㎞에 육박한다. 고어텍스 재킷을 걸치거나 우산을 써도 옷이 젖기는 마찬가지다. 선술집 탁자 위에 배낭을 내려놓으니 행복한 피로감이 혼곤히 밀려온다. 저무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창문 앞 탁자에 앉았다.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전복회를 씹으며 묵묵히 한라산을 마셨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완벽한 하루였다.
글 심산(작가·심산스쿨 대표)/사진 김진석(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