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안 속리산방(俗離山房), 저 너머 희망과 이어져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7. 도예가 송충효

2011-02-07     제민일보

 

   
 
  송충효가 빚은 그릇들  
 
360여개의 오름의 모습이 다르듯, 그의 사발도 같은 것 없어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은 거칠지만 새롭게 갈 만한 가치가 있어


   
 
  송충효 근영  
 
# 도예, 실용성과 예술성의 통일


인류의 여명(黎明)은 도구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문명사'를 다른 말로 '도구의 발달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류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도구 중 으뜸은 그릇이다. 그릇은 생활의 필수품으로서 식기(食器), 저장, 운반, 제사 등 해당 문화, 즉 지배문화와 기층문화를 모두 담지(擔持)하기 때문이다. 

그릇을 한자로는 명(皿), 기(器)라고 하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명(皿)은 '밥 먹을 때 쓰는 그릇(皿, 飯食之用器也)'이라고 하였다. 皿의 위 모양은 담을 수 있는 모양을 상형한 것이고, 가운데는 몸체, 아래는 바닥(굽)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부수로 명(皿)이 들어가는 한자는 동이(盆), 쟁반(盤), 사발(盂) 등과 같이 모두 그릇과 관계가 있다. 또 기(器)는, 器의 본자(本字) 犬이 고대 식료(食料)로서 무덤에 묻히는 일이 많았는데, 개고기를 네 개의 접시에 담은 모습으로, 먹을 것을 제각기 덜어먹는 접시를 의미한다.

문명과 함께 그릇도 진보한다. 재료나 모양에 따라 사용하는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청동기로 만들어진 하(夏)왕조의 구정(九鼎)은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신성한 예기(禮器)로서 특별한 목적이 담긴 그릇이었다. 예기는 과거를 기념하려는 의미가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금은기(金銀器)는 남북조 시대에 와서 왕공(王公), 귀족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였고, 당대(唐代)에 이르면 중국화 된 금은기가 왕실에 넘쳐났다. 왕실 전용 금은기의 제작소인 '금은작방원(金銀作坊院)'이 장안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청자는 왕실 전용의 관요(官窯)에서 구워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목기(木器)는 제사용이기 때문에 그릇이긴 하지만 제사 이외의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상징성을 띠었다.

도자기는 흙으로 빚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태토(胎土)의 굳기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자기(瓷器)로 나눈다.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세지 않은 불로 구운 그릇이고, 도기는 유약을 발라 1000도 넘는 불에 구운 그릇이다. 그러나 자기는 1200도 이상 고온에서 굽기 때문에 표면에 유리질화가 진행되어 두드리면 쇳소리를 내게 된다. 자기는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부터 시작되었는데, 중국 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영어로, 중국과 자기(瓷器)는 'china'로 불리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17세기경부터 중국 자기를 모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707년 독일의 베트라는 사람이 백자를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유럽 각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일명 '법정스님 찻잔'  
 
# 사발로 제주를 빚어내다


고우(古牛) 송충효(宋忠孝, 1944~  )는 제주 출신으로, 40세 불혹의 나이에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30년 가까이 도예가로 살고 있다. 당호(堂號)는 '속리산방(俗離山房)'. 서예의 대가 소암 현중화 선생이 생전에 지어준 이름이다. 속리산방은 세상 한가운데 있다. 하지만 그 안은 저 너머 희망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는 교사시절, 예술적 근성(根性)이 발동하여 내로라하는 선배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기를 즐겼다. 초등학교 5학년 송충효의 장래희망은 '도공'이었다고, 당시 그의 스승이 전해준 것처럼 어릴 적부터 그는 예술적 끼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송충효가 도예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기까지는 주변의 가까운 스님을 비롯, 예술가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경기도 곤지암의 보원요(寶元窯)로 가게 된 것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인 정채봉(丁埰琫, 1946~2001) 선생 덕분이었다. 보원요는 지헌(知軒) 김기철(金基哲, 1933~  ) 선생의 작업장이다. 보원요의 김기철 선생은 고려대 영문학 교수를 건강 때문에 그만두고 도공의 길로 들어선 백자의 권위자이다. 송충효가 보원요를 찾은 것이 도예가로의 인연이 되었다. 

송충효는 보원요에서 3년 간 도예의 배움은 고사하고 청소, 농사, 장작패기 등 허드렛일만 하고 지냈다. 정신수행의 과정이었으리라. 그러나 적잖은 나이에 마음의 갈등이 일었다. 그때 마침 보원요에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이 찾아왔다. 그러나 바람결에 들리는, "고생을 더 시키라"는 법정스님 말씀에 그는 참을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었다. 훗날 송충효는 법정스님 찻잔을 만들게 된다. 제주살빛과도 같은 은은한 찻잔. 일명 '법정 스님 찻잔'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그가 신풍리에 작업장을 마련하여 고향 제주에 내려온 지 10여 년. '조경도자'를 공부한 그는 진정 제주를, 제주의 오름과 정낭을 흙으로 빚고 싶었다. 하지만 큰 작품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깊은 생각 끝에 사발로 제주를 빚기로 하였다.

그는 "물이 담겨지면, 그것은 사발"이라고 한다. 제주 오름의 분화구가 모두 사발 모양이다. 또 해안의 모래판에 남겨진 바람선(風線)에서는 아름다운 도자기선을 볼 수 있었다. 지형과 바람, 물결이 남긴 선은 제주 자연이 주는 숭고한 선물이었다. 제주 바다는 곱기도 하지만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신비함이 있었다. 그의 그릇에서 서서히 제주의 선과 색이 살아났다. 제주의 풍토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는 답답했던 마음을 토해내듯 활화산 같은 그릇들을 구워 내었다. 그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제주의 모든 사물을 그릇으로 담아낸다. 그가 제주를 닮았고, 그릇이 그를 닮고 있었다.

송충효는 어쩌면 제주의 귀한 것들을 기록하는 심정으로 사발을 빚고 있는지 모른다. 대우주로서의 제주자연과 소우주로서의 그의 그릇이 함께 호흡을 한다.

송충효의 사발은 그 때 그 때의 심성(心性)과 느낌, 분위기에 따라 다 다른 모습을 보인다. 물레를 뒤로 하고 주로 손으로 작업하는 그의 사발은 360여 개의 오름의 모습이 다 다르듯, 그의 사발도 같은 것이 없다. 그의 독자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실용성을 염두에 두되 질리지 않는 예술성을 찾는 것이야말로 사발을 쓸 사람의 마음까지 배려한 것이 아닐까.

그는 2003년 김영갑 갤러리의 첫 번째 기획초대전에서 첫 도예전을 가졌다. 이제 송충효의 바람이 있다면 도예의 길 30년이 되면 그간의 작업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하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육지의 가난한 작가나 화가들이 제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쉬면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 노을홍, 저 너머 세상에 있다

송충효는 그릇에서 최고로 추구할 가치가 무엇이냐고 하면 단번에 홍(紅)이라고 말한다. 도자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홍을 추구하지만 만족할 만한 홍이 나오기는 힘들다고 한다. 그는 우리 도자기에서 홍은 바로 제주흙과 제주 옹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송충효는 홍을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두홍(豆紅), 혈홍(血紅), 도홍(桃紅), 황홍(黃紅), 노을홍. 홍의 의미에는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관념이 들어있다. 상례(喪禮)의 팥죽, 부적 쓸 때의 주사(朱砂), 결혼식의 연지곤지, 출생의 붉은 고추는 모두 축귀(逐鬼)의 속신(俗信)이 있다.

두홍(豆紅)은 팥색이다. 혈홍(血紅)은 젊은 혈기의 빛, 도홍(桃紅)은 복숭아빛, 황홍(黃紅)은 누런빛을 띤 붉은 색, 노을홍은 노을의 붉은 빛이다. 모두가 붉은 계열색이나 그 채도는 다르며 의미 또한 다양하다. 제주는 안료 없이 홍이 가능한 땅이다. 돌가마에서 붉은 옹기가 나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만의 홍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가 된다.

노을은 순식간에 변하므로 폭이 넓은 붉은 색이다. 한 가지 홍이면서 짧은 시간차에 여러 가지 붉은 색을 띠는, 그런 노을홍을 만들어 낼 때까지 송충효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송충효의 그릇을 눈여겨보면 그만의 미학이 있다. 굽 없는 그릇을 만들고 굽을 과감하게 뚫어버리는 행위는 가히 파격에 가깝다. 굽 없는 그릇을 엎어 놓으면 오름 형상이 된다. 뚫린 굽은 피안의 세계로 통하는 길, 저 너머 희망의 공간이 된다. 그릇에 구멍을 내는 것은 다시 나갈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노을홍을 이루어낼 때까지 끊임없이 그릇에 구멍을 낼 것이다.

송충효는 그릇 중 최고 가벼운 것과 최고 무거운 그릇을 만들고 싶어 한다. '남들이 간 길을 돌아서 가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수히 발자국이 찍힌 길은 지나가기에 편한 길이지만 그저 평범하고 식상한 길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은 거칠지만 새로 갈 만한 가치가 있기에, 길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제 그는 그릇에 감성적인 이야기거리를 담고자 한다. 그것은 나를 알지 못하는 후대의 사람들과의 소통이자, 또 하나의 맥을 이어가는 길인 것이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