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인재를 낳는 것은 고금이 다를 바 없다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80. 문경공(文敬公) 고조기

2011-03-14     제민일보

 

   
 
  정비된 고조기 묘역 입구  
 
성품 강개하고 경서(經書)·역사에 해박…특별히 오언시 잘 지어
본도 최고 명신이자 문학가 정치·군사·외교에 뛰어난 수완 발휘


# 《동문선》에 전해오는 고조기 시
   
숲길 끝나 멈추어서니(行盡林中路)
포구에 때때로 오고가는 배(時回浦口船)
천리의 땅 물로 둘러진 곳(水環千里地)
한라산이 하늘가를 막았네(山一涯天)
대낮에 테우 탄 외로운 나그네는(白日孤차客)
청운에 올랐던 천상의 신선이었네(靑雲上界仙)
돌아오니 느낀 것이 하도 많아(歸來多感物)
취한 김에 시를 읊어 강바람에 날리네(醉墨灑江煙)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고조기(高兆基)의 <진도강정(珍島江亭)>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다. 벼슬살이 중 제주를 다녀온 직후 진도에서 고향의 감회를 적은 시로 보이는 이 시에서는 고조기의 포부와 제주의 토속적인 정서가 절절히 묻어나온다.

《동문선(東文選)》에는 이 시 외에 <영청현(永淸縣)>, <금양현에 묵으며(宿金壤縣)>, <산장의 밤비(山莊雨夜)>, <기원(寄遠)>, <서운암진(書雲巖鎭)>, <안성역(安城驛)> 등 7편이 수록되어 있어 고조기의 시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문선(東文選)》은 조선조 성종의 명으로 1478년(성종 9년)에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의 시문선집(詩文選集)이다. 본문 130권, 목록 3권, 모두 45책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대제학(大提學)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양성지(梁誠之) 등 23인의 편찬자가 참여하였다. 《동문선(東文選)》은 신라시대 김인문(金仁問),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조선시대 성종조 편찬 당시의 문인까지 모두 500인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한 방대한 문집이다. 1인 1편을 수록한 문인이 있는가 하면 다수의 시문을 실은 역대·당대 최고의 시·문장가, 그리고 29인의 승려, 약간의 무명씨의 글까지 수록하여 55종의 문체를 선보이고 있다. 후대에 이런 다양한 경향을 무분별하게 수록했다고 비판한 학자들도 있었으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우리나라 역대 시문 문체의 전범(典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훌륭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고조기의 오언율시 7편은 고려시대 제주출신 문사(文士)가 지은 중요한 문학작품으로 희귀하면서도 소중한 작품들이다. 이 시 가운데 제주에서 지은 시로 보이는 것이 바로 <산장의 밤비(山莊雨夜)>다. 비온 뒤 중산간 마을의 정취를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젯밤 송당(松堂)에 비 내리니(昨夜松堂雨)
내에 흐르는 물소리 베개 밑까지 들려오네(溪聲一枕西)
먼동 트자 뜰 앞의 나무를 보니(平明看庭樹)
새들은 잠에 취해 아직 둥지를 떠나지 못하네(宿鳥未離棲)

이 시에 나오는 송당(松堂)이라는 지명은 현재 제주시 구좌읍 지명과 같다. 이로 미루어 당시 고조기가 송당의 어느 산장에서 이 시를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송당은 900여 년 전에 설촌 되었다고 한다. 제주 고씨와 여산 송씨가 먼저 송당에 자리를 잡았고, 후에 김해 김씨는 셋송당에, 광산 김씨는 웃송당에 입촌하여 마을이 커졌다고 한다. 솔당, 손당, 소남당은 송당의 옛 이름들이다. 제주 고씨가 송당의 설촌과 관계되었다고 하는 데서 고조기와의 연관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고득종 또한 송당 인근 교래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조기의 방묘  
 
# 고려시대 제주인으로 최고 벼슬길 올라

고조기(高兆基, ?~1157)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사가집(四佳集)》, 《동사강목(東史綱目)》, 《홍재전서(弘齋全書)》, 《일성록(日省錄)》, 《해동역사(海東歷史)》, 《심재집(心齋集)》 등에 보인다.

고조기(高兆基)의 본관은 제주. 초명(初名)은 당유(唐兪), 호는 계림(鷄林)이다.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 아버지 고유(高維)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고유는 고려 정종(靖宗) 을유년(1045)에 남성시(南省試, 또는 國子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과거(賓貢)에 등제(登第)하여, 임금의 실책을 바로잡는 벼슬인 우십유(右拾遺)가 되었다. 문종(文宗)이 고조기를 총애하자 주위에서 '제주사람'이라는 이유로 "간(諫)하는 벼슬을 시켜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의 재주가 아깝거든 다른 벼슬을 시키소서"라고 말리니, 왕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라 1070년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에 임명하였다. 고조기는 이듬해 과거를 주관하는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있으면서 국자시(國子試)를 주관하여 인재 77명을 뽑기도 하였다. 탐라 고씨로는 고려에서 최초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조기는 '성품이 강개하였고, 고금(古今)의 경서(經書)와 역사를 많이 읽었으며, 특별히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었다…재직 중에 청백하게 복무하였다'고 한다. 성품이 곧고 꿋꿋하다보니 그를 배척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모두 헤쳐 나갔다.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오는 그의 7편의 오언율시가 단아하면서 간결한 시어(詩語)로 자신의 감흥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고조기는 예종(睿宗) 정해년(1107)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들어섰다. 내관과 외직에 두루 종사하면서 주변으로부터 청렴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인종(仁宗)때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시어사(侍御史)는 고려초기의 설치된 사헌대(司憲臺)를 어사대(御史臺)로 고치면서 설치한 것으로서, 관청 명칭에 따라 두기도 하고 폐지하기도 하였는데 고려 문종 때에는 종 5품벼슬아치 2인을 두기도 하였다.

고조기는 이자겸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정의 관리들이 이자겸 측에 서서 절조(節操)를 잃은 것을 보고 분개하였다. 이자겸의 파당(派黨)들 가운데 화를 면했다가 후에 재상 자리까지 오른 자가 적지 않음을 알고, "비록 성상(聖上)께서는 관대하시어, 그들의 병질(病疾)을 덮어 주신다한들 그들이야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서서 일월(日月;임금)을 우러러 보겠나이까?"라고 하며, 왕에게 극력 간쟁(諫諍)했으나 왕도 비록 고조기의 말이 옳다고 인정은 했지만 차마 관련된 대신들을 모조리 내보내지는 못했다. 그 후 고조기를 예부낭중(禮部郎中) 으로 등용했으나 사실은 대관(臺官)의 자리를 뺏기 위한 방편이었다.   

의종(毅宗)이 즉위한 후 무진년(1148)에 정당문학판호부사(政堂文學判戶部事, 종2품)를 제수 받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여러 인재를 뽑았다. 지공거(知貢擧)란 고려 때 과거(科擧) 시험관이다. 지(知)는 '주관하여 본다'라는 말로서 각 지방에서 추천해서 올라온(貢來) 선비를 뽑는 주임관(主任官)이라는 뜻이다. 공(貢)이란 '추천하여 보냄', 거(擧)란 '뽑아서 씀'을 말한다. 원래 지공거(知貢擧)란 당(唐)·송(宋)에서 통용된 말인데 고려에서 그대로 이를 받아들여 사용한 것이다.

고조기는 다시 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에 전직되었다가 다음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정2품)에 배수(配受)되었고, 왕이 국사를 자주 논하였다. 얼마 뒤 상서사부사(尙書史部事)가 되었다. 김존중(金存中)이 실권을 잡았는데 조정 신하 대부분이 그에게 붙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청렴 강직한 고조기가 절개를 굽혀 김존중에게 뜻을 맞춘다고 해서 김존중의 반대파가 고조기를 탄핵하여 상서좌복야로 좌천되었다가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평장사판병부사(中書侍判兵部事)를 제수 받았다. 신미년(1151)에 중군병마판사겸서북면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兼西北面兵馬判事)의 벼슬을 얻었고, 의종 11년 정축년(1157) 봄 2월에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평장사란 문하부(門下府)에 속한 정2품 벼슬이다. 문하부는 나라의 모든 정사를 맡아보던 최고의 관청이다. 고조기의 죽음이 알려지자 왕은 3일간의 조회를 멈추고 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문경공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 후대의 귀감이 된 문사(文士)

고조기의 방묘는 제주시 아라동에 소재한다. 고조기 방묘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 일대에는 제주 고씨 문중에서 탐라원(耽羅苑)을 조성하여 역대 조상들을 기리고 있다. 고조기의 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방묘로 편년을 알 수 있는 현존 제주 무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고조기를 기억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 "제주 사람으로서 문장과 사업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는 평장사(平章事) 고조기로부터 아래로 고득종(高得宗), 좌윤(左尹) 고태필(高台弼) 4형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신(立身)하여 청현직(淸顯職)을 지내 이름을 떨쳤다."

정조(正祖)는《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하늘이 인재를 낳는 것은 실로 고금이 다를 바가 없고, 사람의 본성은 섬이나 육지나 차이가 없다. 가난한 집이라고 어찌 고유(高維), 고조기(高兆基)처럼 훌륭한 선비가 없겠는가"

제주 출신 한학자 오문복 선생은 "본도 최고의 명신이며 문학가다. 그는 정치, 군사, 외교에 놀라운 수완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사궤장(賜궤杖)을 받았으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