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이지함, 제주를 세 번 다녀가다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81. 토정(土亭) 이지함

2011-03-28     제민일보
조선시대 기인(奇人) 토정, 철모자 쓰고 다니다 그것에 밥해 먹어
가난한 백성 없는 국부론 주장한 토정, 조선시대 '대중 슈퍼 스타'


   
 
  이지함의 《토정유고(土亭遺稿)》, 규장각 소장.  
 
# 토정의 가문


한 해가 시작 될 때 가장 많이 팔리는 책 중 하나가 《토정비결(土亭秘訣)》이다. 문명이 발달한 지금에도 혼인(婚姻), 상·장례(喪葬禮)시 택일(擇日)을 하거나 재미로 운수를 본다는 사람들이 줄지 않고 있다. 요즘 도심지 대학가 앞을 지나다 보면 점을 보는 학생들이 곧잘 눈에 띈다. 연인과의 관계, 직업의 미래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하면서도 '혹시~'하는 마음에 컴퓨터 점을 치는 사이트는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이 이지함(1517~1578)의 저서인가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토정비결(土亭秘訣)》의 '토정(土亭)'이 이지함의 호라는 사실 때문에 이지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지함의 자는 형백(馨伯), 흙으로 몇 자 올려 그 위를 평평하게 해 집을 짓고는 스스로 호를 토정(土亭)이라 붙였다, 또 '물의 신선'이라는 의미의 '수선(水仙)'이라고도 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그의 형 지번에게 학문을 배웠다. 본관(本貫)은 한산(韓山). 토정의 한산 이씨는 고려말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과 그의 아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가문으로, 이색은 토정의 7대조가 된다.

이색은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처음 정주학(程朱學)을 일으켰다. 그의 벼슬은 공민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우왕 때에는 왕의 사부(王師)가 되었고, 공양왕 때에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가 잠시 함안(咸安) 등지로 귀양 갔다가 복직되어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정국이 혼란하여 정몽주가 피살되자 그 또한 다시 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 이성계는 그의 재능을 아껴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고, 큰 예를 갖춰 출사(出仕)를 종용했지만, "망국(亡國)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고 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이지함의 출생지는 충남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라 전해온다. 그의 아버지는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07년 의금부도사, 수원 판관을 지냈다. 어머니는 광주(光州) 김씨로, 학식이 높은 집현전 학사 김맹권의 딸이다. 김맹권은 세종의 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이 대권을 차지하여 세조로 등극하자 고향 보령으로 돌아와 평생토록 은둔생활을 했다.

아버지 이치는 이지함이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는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지함은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 형 이지번(李之蕃, ? ~1575)과 함께 한양으로 갔다. 동생 지함을 남달리 아꼈던 이지번은 천문지리에 능통하였다. 그는 인종 때 관직에 발탁되어 노비에 관한 문서와 노비소송의 업무를 보는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정6품)으로 있다가, 국권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단양의 구담(龜潭)에 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토정의 조카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쓴 관덕정 편액.  
 
# 토정, 관덕정 현판 쓴 이산해의 숙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토정(土亭)의 맏형 이지번(李之蕃)의 아들로 당조카가 된다. 《남사록(南차錄)》에 의하면, 현재 전해오는 제주도 관덕정 편액은 이산해의 글씨이다. 이산해가 태어났을 때 이지함이 산해의 울음소리를 듣고 큰 형 지번에게 "이 아이가 기특하니 꼭 잘 보호하십시오. 우리 가문(門戶)이 이로부터 흥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산해가 5세 때 처음 병풍에 글씨를 쓰니 그 운필(運筆)이 귀신같고, 6세 때 큰 글씨를 쓰니 용이 잡아끌고 범이 움켜쥐는 듯하여, 재상들이 그의 필적을 귀히 여기며 신동(神童)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지함은 종실(宗室)인 모산수(毛山守) 정랑(呈浪)의 집에 장가들었다. 수(守)란 《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조에 의하면, 왕의 종친들인 왕자나 대군의 증손(曾孫)들에게 처음 주는 품계이다. 경관직(京官職)은 정4품, 외관직(外官職)은 종4품을 부여받았으나 사실상 실직(實職)이 아닌, 종친 대우를 위한 명예직인 것이다. 이지함이 처가에 잠시 살 때 '처가의 화'를 예언하였다. '화가 자신에 미칠 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하여 모면한  일화'는 유명하다. 사실 그가 피한 후 얼마 없어 장인 모산수는 충주의 33인 역적 모의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이지함에게는 적실 소생의 아들 셋과 서자가 1명 있었다. 적실 소생의 아들들은 약관에 호랑이에게 물려 죽거나 역질로 죽는 불운을 겪었다. 서자 산겸(山謙) 만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적군을 토벌하는 등 의병장으로 신망이 높았지만, 유성룡과 선조의 의심을 사 역적 혐의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아들들의 불운함은 이지함의 유랑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지함은 아산 현감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마포 강변의 흙집에 살았고, 서경덕의 문하에서 의학과 천문, 음양, 지리를 배워 그것에 밝다는 소문이 나면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는 또 전국의 길지와 명당을 찾아 돌아다녔다. 성리학의 대가 남명(南冥) 조식(曹植)이 그가 거처하는 마포의 흙집을 찾아와 중국의 도연명에 비유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벼슬살이하는 과정에서 걸인(乞人)과 굶주린 사람(飢人)들을 구제한 일은 그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그가 죽은 뒤 현감으로 지냈던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고, 고향인 충남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3년 숙종은 그의 학덕을 인정하여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충남 보령군의 이지함을 모신 화암서원(花巖書院)  
 
# 한라산에 오른 토정(土亭)


이지함은 조선시대의 기인(奇人)으로 생전에 외출할 때는 철관(鐵冠)을 쓰고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벗어서 밥을 지어먹고는 씻어서 다시 모자로 썼다. 행동에 거침이 없었고, 인색함이나 구애됨이 없었다.

김석익의 《심재집(心齋集)》에 "온 나라 안을 돌아다녔다......한라산을 세 번 올랐으나 당시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고청(徐孤靑)이 토정을 따라 한라산에 들어갔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 조카 이산해가 지은 토정의 <묘갈명(墓碣銘)>에도 '이지함은 배타기를 좋아하고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구내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평소에 자식과 조카를 가르칠 때 여색을 가장 경계 하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이지함의 제주에서의 일화가 전해온다. 이지함은 "제가(諸家)의 잡술(雜術)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조그만 배 네 귀에 큰 박을 달고서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으나 풍랑의 위험을 겪지 않았다." 제주에 온 토정은 관원들이 익히 그를 알아보았다. 관원들은 그를 객관(客館)으로 맞아들이고는 기생을 불러 잠자리를 모시도록 하고, 기생더러 창고를 가리키면서 "만약 이공(李公)의 사랑을 얻는다면 한 창고를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하니, 기생은 갖은 아양을 떨었으나 이공의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제주 관원들은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지함과 함께 한라산에 같이 올라간 사람은 서기(徐起)이다. 서기의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이다. 심재가 말한 서고청(徐孤靑)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서기는 나이 20세에 토정을 만나 유학(儒學)이 바르고 큼(正大)을 알고는 전에 배운 것을 다 버리고 지함을 좇았다. 이지함과 함께 한라산에 올랐다가 돌아와 지함이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소개하니 그의 문하에서 3년간 배워 고향 홍주로 돌아왔지만, 그 고을의 풍속이 나쁜 것을 알고 고향을 떠나 계룡산 고청봉(孤靑峰) 아래 집을 짓고 살았다.

이지함의 제주 행적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제주를 세 번 다녀갔고 한라산에 올랐다는 기록, 제주 기생과의 일화가 전할 뿐이다.

특히 이지함이 해양을 중시한 것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이지함의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도 중농(重農)에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의 경제적 입장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바다와 섬을 잘 알았다. 섬에 들어가 박 수만 개를 심어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로 바꾼 것, 조류를 잘 알아 항해 중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 어업, 염업(鹽業) 등 해양 경제에 새로운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공도(空島) 정책 중심의 조선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탁월한 식견이었다. 또한 걸인이나 빈민, 서민을 대상으로 무작정 구휼하기보다는 수공업, 상업 등 생산기술과 유통 기술을 가르쳐 자생력의 계기를 마련한 것 등은 나라가 부강할 수 있는 국부론의 시각이 깔려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학자 신병주는 이지함을 가리켜, "《국부론(國富論)》을 지은 애덤 스미스보다 앞선 시기에 적극적인 국부론을 주장한 이지함은 그것만으로도 재평가되어야 한다…이지함은 조선시대 대중 슈퍼 스타였다"고 말한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