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보검, 피리를 좋아하는 조선 최고의 시인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83. 백호 임제

2011-04-25     제민일보

조선시대 뛰어난 천재시인, 자주독립사상 견지한 인간성 소유자
「남명소승」 기행문학 백미, 16세기 제주 문화 연구에 중요 자료

#  황진이 무덤에 제사를 지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하면,《남명소승(南溟小乘)》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紅顔)은 어디가고 백골(白骨)만 묻혔으니
    잔 받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임제의 묘  
 
이 시는 임제가 35세가 되던 해인 1583년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발령받아 가는 길에 송도(松都)에 이르러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을 찾아가 술상을 차려놓고 지은 시조이다. 이에 임제는 조정으로부터 '기생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비난을 받았다. 이 일은 엄격한 신분사회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황진이는 개성의 기생으로 자색(姿色)이 뛰어났다. 성품이 활달하고 남자 같았으며, 거문고를 능히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평생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을 사모하여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그의 집에 가 놀다오곤 했다고 한다. 황진이는 생전에 화담 선생에게 '박연폭포, 화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할 정도로 배포가 큰 여성이었다. 시 또한 절묘하다는 품평(品評)을 받았다. 다음은 황진이가 지은 유명한 <상사몽(相思夢)>이다.

    그리운 님 만남은 꿈이 있을 뿐 (相思相見只憑夢)
    내 님 찾으면 님도 날 찾는 것을(농訪歡時歡訪농)
    이 뒤엔 꿈마다 님을 원하여(願使遙遙他夜夢)
    길 위에서 만났으면 하노라(一時同作路中逢)

# 16세기 조선의 걸출한 시인이자 소설가

   
 
  임제 기념관  
 
풍류와 함께 여행을 즐기며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한 임제. 그는 1549년 12월 20일 전라도 나주 회진의 절도사 임진(林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풍강(楓江), 백호(白湖), 소치(嘯癡), 벽산(碧山), 겸재(謙齋) 등 여러 개이나 백호로 널리 알려졌다.

어릴 적부터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15세에 경주 김씨와 결혼하였다. 20세가 되던 해에 성운(成運, 1497~1579)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위해 속리산에 입산하였다. 2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하산하여 3년 상을 치르고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임제의 스승 성운은 초야에 숨어사는 은사(隱士)였다. 호는 대곡(大谷). 30세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그의 형이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 자락 보은(報恩)에 숨어 살았다. 조정에서 여러 번 등용을 권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자연과 더불어 산수를 즐기며 일생을 은자(隱者)로 살았다. 시와 거문고를 벗 삼아 소일하면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1578), 화담 서경덕,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사후 승지에 추증되었다.

임제는 속리산에서 성운에게 3년간 배우면서 학업에 힘썼는데, 그때《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1576년 28세가 되던 해 스승 성운을 속리산에서 하직하고,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하였다.

생원·진사시는 소과(小科)라고 하는데, 주로 양반들은 이 생원·진사시와 문과(文科)에 응시하였다. 문과는 오늘날 고시에 해당하는 식년시로서 3년에 한번 치러지는 과거였고 합격 정원은 33명이었다. 소과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불리는 데, 일종의 예비시험으로 정원은 100명에 불과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50대 1의 경쟁률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원·진사시는 정식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에 100명안에 들어도 합격이라고 하지 않고 입격(入格)이라고 하였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의 능력을 시험하였고 진사시는 문장 능력을 주로 평가하였다. 이 생원·진사시에 입격해도 바로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김학수, 2009).

알성시(謁聖試)는 임금이 문묘(文廟)에 참배할 때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시험인데 대과(大科, 문과)에 속하며, 시험 당일에 발표하고 일정한 정원은 없었다. 임제는 1577년 29세에 알성시에 급제하자, 바로 그 사실을 제주목사로 있는 부친에게 알리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 제주를 찾게 된 것이다.

그는 1577년 11월 3일, 임금이 급제자에게 내려주는 어사화(御史花) 두 송이, 거문고 한 벌, 보검(寶劍) 한 자루로 행장을 꾸려 아버지가 기르던 말을 타고 고향을 출발하였다. 유유히 남쪽으로 내려오며, 술대접도 받고 거문고도 타면서 풍류를 즐기며 포구까지 왔다. 여러 날을 후풍(候風)하다 참지 못해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사나웠지만 배 띄우기를 고집하여 출항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11월 9일 저물어 조천관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제주 목사인 부친을 뵐 수 있었다.

임제의 자유분방함은 스승 성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과 교유했던 명현들은 모두 당대 조선의 기인(奇人)이거나 내로라하는 유학자들이다. 기상천외한 행동이나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행을 즐기는 것은 토정을 닮았다.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기는 것은 화담을 닮았다. 물론 화담은 임제가 태어나기 전에 타계하여 직접적인 대면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스승 성운에게 익히 들어 화담을 흠모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황진이의 무덤을 찾게 된 것이다. 또한 굽히지 않는 꼿꼿한 기개는 남명을 닮았다. 비록 이들이 임제에게 직접적인 가르침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스승 성운을 찾아오는 토정과 남명과는 대면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실제로 송강 정철, 율곡 이이, 허곡 허봉과도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백호의 마지막 벼슬은 36세 때에 예조정랑(禮曺正郞)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인데, 후에 벼슬을 버리고 전국의 명승 대천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일평생 호방하게 살면서 술과 기생을 벗하면서 거문고, 칼, 피리를 좋아하였다. 1587년 6월 4일 부친이 돌아가신 상중(喪中)인 같은 해 8월 11일, 39세를 일기로 고향 나주 회진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제는 임종시 아들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는 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마라"라고 하는 <물곡사(勿哭詞)>를 유언으로 남겼다. 이 <물곡사>는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원하는 그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저서로는 《임백호집(林白湖集)》4권이 전해온다. 또 소설로는 20세 때 쓴 <원생의 꿈(元生夢遊錄)>, <재판받는 쥐>, <시름의 성(愁城誌)>, <꽃역사(花史)> 외 다수가 있다.

# 16세기 제주기록과 시편 담은 「남명소승」

   
 
  임제의 필체  
 
《남명소승》은 임제가 문과에 급제하고, 1577년 11월 3일 고향을 떠나 부친을 뵈러 제주에 왔다가 쓴 기행문으로, 1578년 2월 그믐에 제주를 떠나는 배를 타고, 3월 3일 고향 집에 이르는 동안의 여정을 적은 것이다. 《남명소승》은 각종 제주 관련 기록이 풍부하여 16세기 제주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당시 강진에서 제주까지의 해로(海路), 호송선의 규모, 평생 군역에 시달리는 늙은 민중들의 모습, 남장(男裝)으로 말 타는 기생의 유풍(流風), 우도, 천지연, 한라산 등 여러 지역의 경승(景勝) 탐방, <제주김충암사신수문(濟州金沖菴祠新修文)>, <영랑곡(迎郞曲)>, <송랑곡(送郞曲)>, <열녀 김천덕의 기록>, <귤유보(橘柚譜>, 풍속 등의 기록이 흥미로우면서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마다 제주 남자들이 배 침몰로 100여 명이나 죽기 때문에 남자가 귀하다는 슬픈 기록도 있다. 바로 <영랑곡>, <송랑곡>은 육지 원병을 기다리고 보내는 제주 여인들의 애달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다. 

《남명소승》의 가치는 기행문학의 백미로서 수려한 문장과 함께 그 속에 제주를 노래한 시편들이 많아 한국 고전 시문학을 연구할 때 귀중한 자료라는 데에 있다. 임제를 평가함에 있어서 이은상은, "조선 왕조 500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이자 "자주독립사상을 견지하여 사대부유(事大腐儒)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던 높은 인간성의 소유자" 라고 하였다. 중국의 한인 문학평론가 박충록도 "조선문학사에서 임제만큼 전설화된 작가도 드물다. 그에 대한 일화들은 한결같이 임제의 반봉건적 지향, 민중성, 그의 호방하고 소탈한 성격을 잘 말해준다"고 하였다.

또한 임제의 《남명소승》은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충암 김정의 <풍토기>를 보완하는 역사적인 자료이자, 16세기 제주인들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조선시대의 제주의 풍정(風情)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전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