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신례·하례 3개 마을 주민 일심동체로 설립
마을의 역사와 함께하는 제주의 학교 7)위미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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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년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마을 주민들의 성금과 노력 봉사로 건립된 위미초등학교. 위미초등학교 운동장에서 4학년 학생들이 플라잉디스크를 날리고 있다. 장공남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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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귤재배로 유명한 위미리 소재 위미초에서 4학년 학생들이 교실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장공남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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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미초 운동장 한쪽에 세워진 개교 60년 성장의 보람탑에는 위미초 개교에 얽힌 이야기가 생생히 기록돼 있다. 장공남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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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에 학교 감귤원이 조성됐던 터는 게이트볼장과 체육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마을 주민들이 게이트볼을 하고 있다. 장공남 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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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주민들이 위미초에 세운 초대교장 이관석 선생 송덕비. 장공남 기자 | ||
# 위미·신례·하례 주민들의 염원을 담은 학교 설립
개량서당 인명사숙이 문을 닫자 위미리 학생들은 일제의 1면 1교제에 의해 1924년 남원에 설립·개교된 서중공립보통학교(현 남원초등학교)에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먼 거리의 보통학교에 2세를 보내야 했던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3개 마을 주민과 유지들은 기성회를 조직해 자녀들을 위한 학교 설립 운동에 나섰다.
마을 유지들은 제주도청을 찾아 서중공립보통학교 야아베 교장, 도사(현 도지사, 당시는 일본인) 등이 참석한 한 가운데 학교 부지를 마련한 후 학교시설을 마련하면 학교 설립을 승인하겠다는 조건부 승낙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위미리, 신례리, 하례리 3개 마을은 합동 회의를 열어 학교 부지는 위미리가 책임을 부담하고 학교 건물 건축과 이에 따른 예산과 인력은 3개 마을이 함께 충당하기로 함으로써 결국 학교 설립의 꿈을 이뤄냈다.
위미공립심상소학교(현 위미초등학교)는 1939년 5월 1일 설립 인가돼 이해 6월 1일 초대 교장에 이관석을 임명해 개교했다.
위미초의 개교 과정은 1998년 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개교 60년 성장의 보람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람탑에는 "우리 학교는 일제 말기 공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2세들을 위하여 위미, 신례, 하례 3개 마을 주민과 유지들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1939년 5월 1일 위미공립심상소학교로 인가를 받아 1939년 6월 1일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 남호 이관석 선생과 김상옥 기성회장을 비롯한 3개 마을 유지와 1100세대 주민들이 학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뜻을 모아 113일간 연인원 124,000명의 노력봉사로 비탈진 땅을 정리하여 교실을 신축함으로써 오늘의 아름다운 학교로 성장시킨 초석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마을지 「위미리지」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지를 보면 "교사부지와 운동장 정리 및 축장 조성에 부역을 제공했는데 당시 장비는 재래식 도구인 지게, 따비, 골채 등이었다. 150여일간의 건축에 동원된 연인원도 1만5000여명에 이르는 각고의 노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람탑과 「위미리지」 등은 주민들의 노력봉사 일수와 동원 인원만 다를 뿐 주민들의 학교 설립에 대한 염원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양영근·이창언씨 등 마을 촌로들은 "남원읍 서부지역 3개리 주민들의 일심동체가 돼 학교를 설립했다"며 "당시는 공출하는 것과 부역하는 것이 생계보다 더 중요시 하던 때였다. 장비가 변변치 않아 사람의 힘으로 했다. 학생들도 운동장의 흙과 돌을 운반했다"고 말했다.
# 감귤원을 운영했던 학교
속칭 '뛔미'라 불렸던 위미리는 서귀포시 남원읍 서부에 위치한 마을로 위미 1리, 2리, 3리로 구성돼 있다.
위미리는 제주도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감귤재배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감귤을 진상했던 기록이 옛 문헌에 수록돼 있어 제주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과수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미는 1960년대를 전후해 감귤재배를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감귤묘목재배와 함께 재일동포들의 감귤묘목 보내기 운동 등에 힘입어 감귤재배 붐을 일으키며 일약 '대학나무' 황금열매로 부상하는 등 최근까지 위미감귤은 소비자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감귤의 위미 보급에는 학교의 역할도 컸다. 위미초는 개교 전후 감귤원을 가꿔오다 감귤재배 붐이 일던 1970년에는 학교주변 불모지를 개간, 과수원을 조성해 감귤판매 수익금을 학교 운영에 보태는 등 자활학교로 성장했다.
1975년 10월6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1970년 위미초 교장으로 취임한 오남연 교장은 학교주변 황무지를 개간해 학생 등으로부터 감귤묘목을 기증받아 과수원을 조성해 1972년 65만원을 수익을 올린 것으로 시작으로 1974년에는 280만원의 감귤수익을 얻었다.
1973년에는 감귤수익금과 지역주민들의 성금, 국고 등을 모아 새마을 교육관을 준공하는 결실을 맺었다. 새마을 교육관은 최근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까지 다목적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감귤원에는 '귤나무 한 그루의 희망을 교육동산에 심어 길이길이 자활을 위하자'라는 팻말이 붙었으며 감귤원 이름도 '통일의 귤밭'이라 명명됐다.
학교 감귤원은 현재 폐원, 체육공원으로 활용돼 게이트볼장 등이 들어서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위미 출신으로 1970년대 위미초 교사를 지낸 오대익 제주도의회 교육위원장은 "오남연 교장이 황무지를 개간해 학부모와 재일동포로부터 감귤묘목을 기증받아 과수원을 조성했다"며 "감귤수익금, 새마을 훈장(오남연 교장) 포상금과 주민성금을 모아 새마을 교육관을 지었다"고 말했다.
# 사랑과 신뢰로 꿈을 키우는 아름다운 학교
올해 개교 72주년을 맞은 위미초는 1945년 2월 제1회 졸업생 70명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2월 제67회 졸업생 52명을 배출하는 등 684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신례리와 하례리가 각각 신례초와 하례초를 설립, 각 학생들은 먼 거리 통학의 불편을 덜고 자신과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현재 위미초의 학구는 위미 1·2·3리와 신례 2리(공천포) 등 4개 마을로 1862세대에 4991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수는 239명이다.
위미초는 개교 때 마을 주민들이 심은 소나무, 녹나무, 팽나무, 담팔수 등 다양한 수종이 학교의 역사와 함께 하며 '아름다운 학교'를 만들고 있다. 1996년 '아름다운 학교'에 선정됐으며 2004년에는 '아름다운 학교 숲 상'을 수상하는 등 제주의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수려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사랑과 신뢰로 꿈을 키우는 아름다운 학교'를 표방하고 있는 위미초는 올해 특색활동으로 '느영나영 기초학습(읽기, 쓰기, 셈하기) 1·1·1 운동'을 펼치며 학생들의 기초능력을 다지는 것과 함께 독서력과 학력향상을 꾀하고 있다. 읽기는 1인 70권을 목표로 독서기록장 작성하기 활동을 펴고 있으며 쓰기는 1~2학년은 바른 글씨쓰기, 3~6학년은 한자 쓰기를 익히고 있다. 셈하기는 1일 1쪽 창의성 문제를 푸는 활동이다.
또 학교 자율스포츠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은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플라잉디스크', 양궁, 배드민턴, 태권도 등의 종목 중 하나를 선택해 즐기면서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주민을 위한 운동장 야간 조명 서비스를 제공해 지역주민과 함께 하고 있다.
김윤현 위미초 교장은 "학교는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다. 어린이들이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자질을 키워주는 공간"이라며 "학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육의 본질인 삶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어린이를 기르는데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교육관을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