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아주망 '작은 제주'를 만들다"

[제주, ‘길’에서 묻다] 제주 잠녀길②

2012-02-15     고 미 기자

▲ 구룡포 어촌계의 제주 잠녀들. 일찌감치 어촌계 작업을 끝낸 후 다른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오후 늦게 집으로 들어오고 있다. 김대생 기자
물질 가는 길 보이지 않는 '마디' 삶의 고달픔 지탱
우리나라 동쪽 끝 마을 잠녀들 "먹고 살젠 허난…"

같이 '바람'이라고 불러도 섬 바람과 땅끝 바람은 엄연히 다르다. 섬 바람이 휘휘 바다를 내달려 거침이 없다면 땅끝 바람은 조금은 주춤하는 기세가 매섭다. 누가 허리라도 붙드는 냥 온몸을 뒤흔들며 버둥대는 모양새에 슬쩍 기가 죽는다. 그래도 그 뿐이다. 그 바람을 뚫고, 섬에서는 북쪽 낯선 찬 기운까지 보태진 바다에 제주 어머니들은 몸을 던지고 또 세월을 건진다.

#멈춤과 의지의 마디 아로새겨

바다만 보고 자란 탓이다. 아예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을 골라 살면 모를까 멀리서 비릿한 바다 냄새만 나도 온몸이 근질거린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몸 속 깊숙이 똬리를 튼 서릿발같이 날선, 그러면서도 정 넘치는 제주 잠녀의 숙명 때문이다.

섬에서 태어나 자라 바다에라도 갈 수 있다면 그 것 만큼 좋은 일은 없었다. 누구는 먹고 살기 힘들어 바다 일을 했다지만 정작 그녀들은 바다에 갈 수 있어 좋았다. 밭에서 온종일 허리를 굽히고 땀을 흘려봐야 손에 쥐는 것이 몇 푼 되지 않던 시절 물때에 맞춰 작업을 하고 망사리를 채운 만큼 바로 대가를 받았으니 그만한 일이 세상 어디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는 딸 중에서 물질을 가장 잘하는 딸을 더 아꼈고, 놀이처럼 바다 일을 배우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대를 물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어떻게든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은 까닭이었다.

말로는 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잠녀들이 직접 다진 길에는 '마디'가 있다. 사람 사는 일에 삶에 대한 순종만이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마냥 따라 가기보다는 이끌고 만드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쏟았다. 배가 불러와도 일단 바다에 갔다. 물질 가던 길에서 그냥 아이를 낳았던 이야기는 그나마 무용담 앞자리에서 손을 들지만 '아이를 낳고 3일 만에 물에 들었다'하는 얘기는 흔할 정도다. 당장 먹고살기가 힘든데 '산후조리'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노잠녀들의 몸과 마음은 더 아프다. 그냥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띵하고 아파오는데다 뼈마디가 녹아내리고 손가락이며 발가락, 허리가 구부정해진다. 그렇게 한 주먹씩 약을 삼키면서도 바다에 간다. 마디와 마디가 지주대 역할을 하며 키 높게 자라도 쓰러지지 않는 대나무처럼 잠녀들 역시 마디를 만든다. '멈춤'의 마디이자 '의지'의 마디다. 땅 위에서 내쉬는 숨비소리 마냥 그렇게 숨을 고르고 마음을 다잡지 않고서는 그렇게 바다로, 바다로 갔다.

산목숨을 어떻게든 산다고 기를 쓰고 가슴팍을 파고드는 젖먹이를 매정히 떼어놓고 바다에 갔다. 엄마를 삼킨 바다가 다시 엄마를 토해낼 때 까지 아이들도 물때에 맞춰 컸다. 이렇게 순간순간 만들어진 약간의 마디는 시간이 흘러 불편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으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곤 했다.

▲ 구룡포 어촌계 해녀들이 물질하러 가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삼삼오오 구룡포 어촌계로 모여들고 있다. 강만보 사진집 「동해안의 제주해녀」중
# 어디서건 근면함의 대명사로

칼바람이 쉴 새 없이 뺨을 후려친다. 그냥 서있기 힘들어 발을 동동 굴러야 할 만큼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찬 기운에 저절로 몸서리가 처진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우리나라 동쪽 땅끝 작은 어촌마을에서 제주 잠녀를 찾았다. 구룡포 역시 참 기구가 팔자한 지역이다. 역시 '팔자가 드센' 제주 '아주망'들이 척척 자리를 잡아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주 잠녀들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허남한 구룡포리 어촌계장은 "아마 한참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작업중'이라는 말이다. 심지어 인근 마을 바다로 작업을 갔단다. "아주마이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우리 어촌계 작업은 일찌감치 끝냈고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바다는 죄다 찾아 다닌다". 허 어촌계장에게서 이제는 물질을 하지 않는 고령의 '삼춘'들 전화번호를 받았다. 경로당으로, 어른들끼리만 아는 작은 '사랑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제주'라는 말은 프리패스처럼 작용한다. 선 듯 아랫목까지 내주시는 어른들 앞에서 저절로 작아진다. 그저 거칠해진 손등이며 험하게 패인 얼굴 주름에 눈앞이 아득하다.

▲ 하루 물질을 마친 잠녀들이 마지막 작업으로 잠수복을 빨고 있다. 김대생 기자
"아이고 이 먼 데꺼정(까지)…". 어른들의 기억은 채 꺼내기도 전에 작업 나갔던 잠녀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잠녀들을 싣고 온 소형 트럭에는 성게가 한 가득이다. 인사도 꺼내기 전 반쯤 젖은 몸으로 작업이 시작된다. 이럴 때는 무슨 애기를 꺼내도 '퇴짜'다. 결국은 오징어 덕장이며 과메기 덕장과 눈싸움이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흘렀을까. 잠녀들의 손이 조금 느려졌나 싶은 순간 어디선가 "뭐 하러 왔냐"는 말이 던져진다. 몇 번을 답을 해도 일부러 못 들은 척 여기 저기 손사래가 겨울 바람마냥 차다. "제주에서 어머니들 얘기 들으러 왔수다" 그때서야 기척을 한다. "무슨 할 얘기가 이서".

여기서는 '제주'도 안 통한다. 강아지마냥 졸래졸래 어머니들의 손수레며 바구니 뒤를 따라 묻고 듣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서로가 더 잘 알거라 공을 미루는 탓에 작업장 여기저기 저 혼자 분주하다. 어떻게 멀리 구룡포 바다까지 왔는지, 그 사연은 물론이며 어떻게 구룡포에 왔는지 알고 싶은 것 투성이다.

질문은 수 십 개인데 답은 하나다. "먹고 살젠 허난 별 수 있어".

붙들고 늘어진 덕분에 조각조각 잠녀들의 기억이 모아진다. 세 살 배기 때 어머니 등에 업혀 연락선을 타고 왔다는 김춘자 어머니(74·한경 고산 출신)와 카페리를 타고 시집을 왔다는 고춘선 어머니(63·구좌 행원 출신), "이제야 다들 비행기를 타지 않냐"고 애정 가득한 면박을 주는 고인덕 어머니(52·서귀포시 표선)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간을 포갠다.

"그건 저기 태옥이 삼춘이 잘 알건디. 지금은 집에 어실거라. 병원에 가지 않으면 누게 집에 놀러가거나 하니까. 귀가 먹언. 바다에서 일하당 보난 귀 안들리고 하는 건 다반사여서. 여기저기 안 아픈데도 없고. 작년엔가 재작년부터 아예 삼춘 나오지 맙써 했주게".

여기서도 꾸덕꾸덕 시간만 간다. '작은 제주'가 형성되고 '부지런하고 일 잘하는'의 이미지마저 정형화됐지만 늙어가는 것만은 말릴 재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