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를 잇기 위해 걸었던 짜디 짠 기억
[제주 ‘길’에서 묻다] 소금길
4면 바다 불구 지형적 영향 등으로 생산 어려워…표류 이유에도 포함
구엄 소금 빌레…하늘 의존·여성 노동 집약·'하루 거리' 기준 물물교환
'소금길'이다. 섬 땅 어디에 소금길이란 길이 있었을까. 있었다. 섬이어서 더 구하기 어려웠던 소금은 그 것을 유일한 생계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소금을 구하러, 또 소금과 먹을 것을 바꾸러 다니던 길은 아직도 끈적끈적한 소금기가 남아있는 듯 싶다. 그저 느낌이다.
# 돈이나 쌀보다 귀했던
제주사람들에게 '소금'은 빼놓을 수 없는 생활문화 아이템이었다. 육지 밭과 바다 밭 말고 '소금밭'이라는 말을 쓰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생업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바다밭이 물 속을 이야기한다면 소금밭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있었다. 4면이 바다인 섬에서 소금이 귀했던 이유는 지형적 특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염전을 만들 만한 지형이 드물다 보니 소금은 돈이나 쌀보다 더 귀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제주인의 표류사 중에도 소금을 구하기 위해 바닷길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이원진(李元鎭, 1594~?)의 「탐라지」(1953)에도 "이곳에는 쇠가 나지 않아 가마솥을 가진 자가 많지 않으니 소금이 매우 귀하다"는 언급이 있다. 자연의 힘을 빌려서도,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도 소금을 만들기가 어려웠다는 방증이다.
소금이 귀했던 배경에는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제약 외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한계도 있었다.
'빌레'라 부르는 평평한 지형을 애써 찾는다 하더라도 소금을 얻을 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 생산이 쉽지 않았다. 오락가락한 섬의 날씨 역시 소금 생산과는 맞지 않았다.
늦어도 16세기 이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지역 염전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농상공부가 발간한 「한국수산지」의 자료(3권, 1908)를 통해 그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제주군·대정군·정의군을 통틀어 도내 염전 수는 23곳으로 이들 염전 면적은 모두 합쳐 5만3059평(약 17만5402㎡)에 달하고 연간 생산량은 35만4326근(약 213톤)으로 집계된다. 이들 염전 중 '빌레'(암반)에 굴려서 소금을 만드는 곳이 3군데, 나머지에서는 모래밭에 바닷물을 부어 얻은 함수를 솥에 넣고 불을 지펴 증발시켜 소금을 얻었다. 이렇게 만든 소금의 양은 당시 제주민 100명 중 23명이 먹을 것밖에 되지 못했다.
모자란 부분은 진도까지 나가 미역과 바꿔 먹었다. 미역을 지고 소금을 바꾸러 나선 길도 엄밀히 따지면 '소금길'이다.
제주에서 소금밭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구엄 소금빌레가 거의 유일하다.
제주시 용담2동에도 현 사범대부속중학교 후문 앞 쪽으로 몰(아래 아)머리 소금빌레와 어영마을 소금빌레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해안도로 개설 등으로 사라지고 없다.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소금 곧 '염(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소금을 만들어 먹고 살았다는 기억은 있지만 단지 그 것뿐이다. 소금 빌레는 그만큼 중요했다. 20년 가까이 마을 어촌계장으로 마을 사정에 누구보다 밝다는 조두헌 옹(77)에게도 구엄의 소금 제조사는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다.
"소금 맨들앙 쇠에 실렁 이 마을 저 마을 댕기멍 보리도 바꽝 오곡, 조도 바꽝 오곡 했주. 구엄 땅이 물왓이란 비가 오민 농사도 잘 안 되곡 해부난 소금을 안 만들민 살질 못했주(소금을 만들어 소에 실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보리도 바꿔오고, 조도 바꿔 오고는 했지. 구엄 지역 밭들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비가 오면 농사도 잘 안 되고 해서 소금을 만들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지)"(제주민속유적 295∼299쪽)
구엄 소금빌레는 단순히 지형적 조건 때문만 발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물이 빠지지 않고 차는 특성으로 인해 밭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배로 물고기를 잡았다. 여자의 노동력은 그렇게 소금을 만드는데 쓰였다.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일에서부터 바닷물을 소금밭에 뿌려 수차례 건조하는 작업, 몇 시간이고 걸어 나가 생필품이나 곡식과 바꾸는 일까지 모두 여자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소금은 80% 이상 여성 노동력에 의존해 생산됐다. 심지어 '큰 딸'에게 물려줬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들었다'는 말 뿐 '기록'이 없다.
알이 굵고 비교적 양질이어서 예로부터 임금에게 진상이 되기도 했을 만큼 명품으로 꼽혔던 구엄 소금이지만 판로만큼은 열악했다. 민속지식에 의지해 일년 중에서도 음력 5월부터 8월까지 하늘이 허락하는 만큼 소금을 생산했다. 나머지 기간은 말려 보관중인 소금을 가마솥에 넣고 산에서 해온 나무로 끓여 정제했다.
너됫박 정도를 생산하면 바로 팔러 길을 나섰다. 보관이 쉽지 않았다기 보다 소금을 팔지 않고는 당장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만큼 생활이 퍽퍽했다.
오늘 저녁 만든 소금은 바로 다음날 아침 팔러 나갔다. 한번에 30~40㎏나 되는 소금을 지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만큼 걸어가 판매를 했다.
구엄에서 수산·장전·소길·유수암까지 18㎞ 남짓을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등짐을 지고 걸어갔다. 집집마다 소금 판매 의향을 묻고 그것을 되나 말로 팔았다. 소금 대신 조나 보리, 콩, 팥 등 양식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은 무게에 고단함까지 더해져 더 무겁다.
멀리 한림과 제주시까지 나서기도 한다. 제주시까지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꼬박 세기간 거리다. 당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덕정이나 성안장에서 소금을 팔았다. 여기서는 양식 대신 돈을 받았다. 걸음을 서둘러 중산간까지 나서기는 했지만 산을 넘지는 않았다.
산남 중 서쪽은 일과리와 동일1리 두 마을에 걸쳐 있는 날뤠소곰밧에 의존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뻘밭형 소곰밧으로 제주도의 서부지역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고 소금 생산량도 많았다. 당시는 화폐보다는 물물교환이던 때라 거개가 소금 한 되에 좁쌀이나 보리쌀 두 되를 받았다. 소금 물물교환 기준은 그 당시 비슷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유통망 역시 '도보'가 기준이 됐다.
조금 모아둔 소금은 상인이 와서 사가기도 했다. 이 때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을 이용한 마차가 동원됐다. 그런 풍경은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해 시나브로 사라졌다.
이후는 직접 만들었다기 보다 공급받았다.
제주4·3 당시 세 번의 습격으로 중산간과의 단절이 커지면서 주요 소금 판매지를 잃었다. 소금을 끓일 때 쓸 나무를 구하는 일 역시 어려워 졌다. 한국전쟁이 지나고 나서는 외지에서 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을 들여 만든 소금에 비해 가격이 헐해 구엄 소금을 찾는 사람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구들소금이며 산에서 나는 소금(암염) 등의 진입은 구엄 소금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삶마저 흔들었다. 뒤틀린 생활 기반은 다시 현대 문물로 채워졌다. 배수로를 만들어 물 빠짐을 좋게 하는 것으로 밭작물을 키웠고 그 의존도도 높아졌다. 생활이 여유로워지면서 관광과 연계한 산업들도 늘었다. 부근에 늘어선 음식점이나 펜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간판을 내건다. 소금길의 흔적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차로 달려 20분이면 제주 도심에 닿을 일이니 과거 서너시간의 다리품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것도 있다. 옛 소금빌레의 이름을 빌린 정체 불명의 체험장이다. 여기에 소금빌레가 있었다는 설명만으로도 충분한 일에 눈에 불편한 오렌지색 경계까지 처연하다. 해안도로를 내면서 많은 부분 훼손된 위로 어중간한 반창고를 붙여놓고 원형 보전이라 말을 하는 모양새에 입이 짜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경제부장·고미 교육체육문화부장·한권 사회부 기자·김오순 제주문화예술재단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