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도」, 고향땅에 가지 못한채 집필…괴로웠다"

[허영선이 만난 사람]재일 소설가 김석범

2012-03-29     허영선

 "4·3의 부활은 우리 역사의 부활이다" "슬픔의 자유를 아는가" 카리스마 눈빛, 형형했다. 꼿꼿한 걸음걸이도, 술도, 여전했다. 이따금 모순된 제주도의 비극에 이르면 분노와 비통에 휘청여 눈을 지긋 내리감는 모습도 여전하였다. 20년 이상 몰입한 대하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고독한 반세기, 4·3 사슬에서 나오지 못하는 재일문학의 신화. 고향의 슬픈 기억을 굽이굽이 돌아서 쓴 「화산도」의 문장은 그냥 4·3문학이 아니다. 화산도다. 작년, 제주에 왔던 시인 고은이 그랬던가. "김석범은 저 산방산같은 인간이야. 약간 흔들리면서 지탱하는 사람이야." 재일동포 문학의 거장, 김석범. 그를 만났다. 출간 15년. 「화산도」를 다시 음미했다. 도쿄 우에노 한국 음식점 '청학동'이었고, 바깥은 겨울.

   
 
 

 재일 소설가 김석범은

 대표적 재일작가. 1925년 일본 오사카에서 제주 삼양동 출신 부모 아래서 출생. 교토(京都)대 문학부를 나와 조선신보 기자 등으로 활동. 일본에서 처음으로 4·3을 대중적으로 알린 4·3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1957년에 발표. 1976년 대하소설 「화산도(火山島)」를 일본 「문학계」에 연재하기 시작, 1997년 7권 완간. 아사히신문의 오사라기지로(大佛次郞)상 수상. 마이니치신문의 제39회 마이니치예술상 수상. 일본어판 「김석범문학전집」, 「지저의 태양」, 「과거로부터의 행진」(이와나미서점) 등이 있다. 한국어판으로 「까마귀의 죽음」(1988년 소나무), 「화산도」(1부)(실천문학사).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1998년 제주에서 열린 4·3 50주년 기념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참석이 거부당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입국하기도 했다.

 
 
저 도저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얼마전 일본에서 나온 「과거로부터의 행진」.팔순의 작가가 70년대 재일동포유학생 간첩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다시 한번 사람들을 전율하게 만든다.

 고향의 슬픈 역사, 인간 존재의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살아온 이 혁명 작가. 생의 어귀에서 한 번은 휘청거릴만도 하건만, 그가 겨눈 언어는 흔들림 없다. 분단 역사의 고통스런 밤이 그의 문학을 완고하게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인가. 고향땅을 밟지 못하던 조선적 작가를 위해 아사히 신문이 전세기를 내준 사람. 허나 하늘에서 구름에 휩싸인 한라산만 보고 갔다던 사람. 몸서리치는 꿈벼락에 박혀 40년만에야 고향땅을 밟았던 작가.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과거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혹독한 지배자들은 사람들의 기억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망각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사람들을 기억이 없는 시체와 같이 취급해왔다"는 이 작가. 변함없다. "사람이 죽었다. 어떻게 죽었나. 싸운 사람이 누구냐. 죽은 원인에 대한 것에 대해 캐고 그런 것에 신경써야지." 그에게도 눈부시던 순간은 있었다. 2003년 4·3특별법이 통과되던 날이었고, 그나마 스스로 지켜볼 수 있어 눈물나게 행복했다. '망각이 기억으로 재생하는 아주 극적인 시대의 흐름'앞에서였다.

 # 일본에선 「화산도」 에 가슴 데인 사람들 많아

 「화산도」. 재일의 삶을 사는 젊은 가슴들을 데이게 해버린 '사건'이다. 4·3을 생각하는 모임의 조동현, 오사카 4·3유족회장 오광현 등이 그들. 그것은 젊은 그들을 4·3 운동에 빠져들게 해버린 강렬한 천둥. 김석범. 그의 강연엔 일본 지식인들도 줄을 선다. 그의 정치적 발언은 일본 중심의 뉴스를 장식한다. 2006년 시작된 동경의 '「화산도」를 읽는 모임'엔 그의 문학에 매료된 일본사람들이 많다. 「화산도」를 다 읽고 난 그들은 이제 '김석범 문학을 읽는 모임'으로 나아간다. 1988년 일본에서 처음 열렸던 4·3 40주년. 그것도 「화산도」의 힘이 원동력이다.

 「화산도」 1부는 1948년 2월26일 관덕정 분위기에서 시작, 1948년 5·10총선 전야까지의 상황을 청년활동가 남승지와 이방근을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료도 거의 없던 시대였고, 4·3은 침묵이 강요되던 시대였다. 총 원고분량도 200자 원고지 2만수천장, 작품속 인물만 100여명이 등장하는 대하.

 "「화산도」가 일본잡지에 발표되긴 했지만 난 일본문단하고 상관없이 써 온 사람이야."
어떻게 그리 쓸 수 있는가? 겪지 않고도, 4·3을 쓴 그를 두고 그런다. "나의 고향땅에 취재조차 하러가지 못한 채 집필을 계속한 것이 가장 괴로웠다고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화산도」를 마치며 쓴 그의 고백. "화산도는 단지 4·3소설이 아니다. 60년전 제주의 풍경, 풍속을 재생시켰다. 관덕정 근처 구석구석까지 세밀한 묘사가 거의 맞아떨어져서 놀라웠다"고 한 이는 「화산도」 1부의 제주출신 번역가 김석희다.

 # 대마도에서 들었던 4·3고문 이야기 '글쓰는 힘'

 김석범. 지금도 그는 컴컴한 대마도의 밤을 잊지 못한다. 스물다섯 대학생시절, 친족의 부탁으로 대마도에 그 두 여인을 데리러 갔던 날을. 고문 끝에 4·3의 생지옥을 건너와 만났던 두 여자. 고향의 친족, 그리고 함께 왔던 젊은여인. 그들의 경험 앞에 젊은 그의 가슴은 파도처럼 들끓었다. 그것은 그에게 숙명이 된 4·3문학의 고동이기도 했다.

 "내가 대마도에 갔다 온 6년 후에  「까마귀의 죽음」이란 소설로 쓰고, 10년 후에 조그만 동포 출판사에서 나오고, 이것이 3년쯤 후에 고단샤라고 하는 큰 책방에서 나오게 돼요. 일본에 그런 소설 써도 통하지 않아요. 난 일본문단하고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잖아. 양쪽에 협박 당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야. 대마도에 그때 안갔으면 나는 아마 4·3 안 썼을 겁니다."

 "제주에서 밀항으로 온, 9촌 삼촌 아내 되는 분과 함께 온 젊은 여자가 있었어. 서른도 안된 분들. 제주에서 밀항해 와도 말하는 사람이 없던 땝니다. 제주경찰 감방. 두평도 안되는데 말이야 수십명 박아놓고. 거기서 이튿날 되면 트럭이 와서 시체 송장 실어가서 정뜨르에 가서 묻고 혹은 산사람도 트럭에 태워 정뜨르에 땅 파그네 묻고. 그런 얘길 듣긴 들었는데. 그때 충격이 보통 아니었습니다." 그때 대마도에서 하룻밤 함께 자면서 9촌 삼촌 부인한테 들은 얘기. 그게 지금도 글쓰는 힘이란다.

 "사형당할 한 여자는 수건에 자기 이름하고, 생년월일을 쓰는 거야. 그걸 허벅다리에다가 묶었어. 가족이 와서 시체 찾을 적에 표가 없다해서. 그걸 생각해서 내가 죽는 걸 각오해서 숨겼습니다 하는 거야." 말을 잇지 못한다. 끝내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울먹이는 눈. 그의 눈에 기억이 다시 스민다.

 "그러니까 꿈같지만 혹시 반세기 넘는 수건이 나올까 싶어서 말이야. 먹으로 쓰면 글잔 남는 법이야. 정뜨르 공항 만들 적에 다 그대로 고스란히 뭐헌거 아니잖소. 내 거기서 옛날 소설에 쓴 그 수건 조각이나 나올까 싶어서 말이야."

 몇해 전, 제주 공항 유해발굴 하던 시기. 마침 그는 그 곳, 시산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떠오른다.

 # 드라마틱한 삶…"일제가 나를 단련시켰어"

 일제시대 식민지의 아들, '황국소년'이었던 그를 작은 민족주의자로 만든 것은 고향 화산도, 제주다. 반년정도 살았던 고향의 자연과 말씨, 사람들에 압도당해버렸다. 1940년, 열네살에 처음 고향을 찾았을 때였다. 오랜 사상적 편력의 바탕인 조국의 독립사상은 그때부터 자리잡았다.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나 감각적으로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작가. 오사카에 도착한 어머니는 2~3개월 지나서 그를 남의 땅에서 낳았다. 젊은 그는 오사카의 공장노동자, 츠루하시에서 포장마차 일도 해야했다. 해방직전 한라산 관음사의 1년여 생활, 서울에서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 드라마틱한 그의 삶, 그 자체가 시대다. 그를 지탱시킨 것은 글쓰기다.

 "말하자면 일제가 나를 단련시켰어. 일제에 대한 반항정신. 그래서 친일파에 대한 내 증오심이란 보통 아니야. 「화산도」에서도 나오는데. 그거야. 그러니까 일제에 대한 식민지인로서, 식민지 사람으로서의 그건 자기 인생을 통하는 법 아니야. 난 나의 자유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야. 해방이란 건 나를 위한 해방이란 것. 그러니까 압박이란 것은 자기 속에 있는 압박을 없애는 거야. 그러니 아직은 완전히 해방이 되지 않았지. 제주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해방이 안됐습니다."

 # 「화산도」 완간 15년…1부만 국내 번역

 "그러니까 4·3평화공원 거기 백비 있잖소. 지금까지 통일 안되는데 10년, 20년 기다릴거라. 소위 정명이야. 바로 이름을 지어야 되는데 역사의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지. 정명이란 것은 4·3사건이란 것은, 정통적인 싸움, 통일하기 위한 투쟁말이지." 그런 그도 언젠가 85세쯤엔 진한 연애소설 한편 쓰고싶다 했다. 지금도 유효할까? 연애소설? 답은 의외.

 "그런 것이 안 나와. 그런 욕구가 안 생겨. 창작이란 것은 창작적인 욕망이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전율이 없으면 안되는 거요. 시도 그렇잖소. 옛날같이 정의가 없어졌단 말이야. 지금은 여자가 강해. 말하자면 김빠진 셈이지."

 "지금껏 내가 살아온 것은 고독이지." 그를 만나고 돌아오던 동경의 겨울. 한기가 가슴에 스몄다. 그의 시대는 과격하였다. 정치의 시대였고, 격정시대였다. 겪지 않고도 고향의 슬픔은 그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 시대가 「화산도」를 탄생시켰던가. 한 인간이 고향을 향한 활화산같은 위대한 역작 「화산도」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였던건가. 오래도록 시달리게 하는 이 부채감. 이 답답함은 다 무엇인가. 우리는 저 깊고 거친 맛의 김석범 문학의 정수를 모른다. 제주의 한없는 자존 「화산도」 완간 15년이 흘렀다. 허나 우린 그것을 모국어로 다 읽어내지 못한다. 하긴 어렵사리 우리글로 세상에 나온 제1부의 「화산도」의 울음을 깊이 들여다 보긴 하였던 것인가. 부끄럽지만, 희망한다. 이 땅에서, 저 「화산도」를 완전한 꼴을 갖춘 우리글로 곧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