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꼬마여행자들의 '비장의 카드'

[여행작가 양학용의 라오스여행학교]② 방콕에서 스스로 여행하기

2012-03-30     양학용

▲ 낯선 도시에서 낯선 거리로 나선, 열네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의 용감한 꼬마여행자들.
   방콕에서의 아침. 여행 첫날이었다. 차오프라야 강이 보이는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돈'을 나누어주었다. 방콕에서 지낼 이틀 동안 각자가 쓸 여행비용이다.

 "이제부터는 모둠별로 너희들끼리 알아서 환전하고, 밥 사먹고, 취향에 맞게 사원이든 미술관이든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거다. 알겠지?"

 돈을 받고 마냥 좋아할 것만 같던 아이들의 눈빛에 의외로 긴장감이 생겨난다. 뭘까?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 자유에 대한 책임감? 그것이 무엇이든 찌릿하게 가슴 안쪽이 저려오는 것을 보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참 어렵다. 믿어주는 것 말이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에서 아이들을 믿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그날도 보석사기 같은 방콕의 대표적 주의사항만 몇 개 일러준다는 것이 말이 많아졌다. 분명 불필요한 염려와 개입이 끼어들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자유를 주고, 또 안전을 위해 어떤 것에 제한을 두어야 하는지, 그 경계가 흐리고도 아프다.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으면,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쉽지 않다. 기다리는 것과 나서는 것 사이에 수만 가지의 생각과 길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모둠은 세 개고, 각 인원은 네 명 혹은 다섯 명이었다. 저녁 때 '동대문(카오산에 있는 한국음식점)'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환전소로 향하는 모둠이 있고, 벌써부터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리거나 군것질거리로 직행하는 녀석들도 있다. 다시 입이 근질거린다. 그 환전소는 환율이 나쁜 것 같아…. 똑같은 물건이라도 기념품점이 시장보다 더 비싸단다. 벌써 군것질을 그처럼 해대다간 내일까지 쓸 돈이 모자랄지 몰라…. 할 말이 차곡차곡 목구멍을 채워가지만, 참는다. 이제 다 그들의 몫이고 그들의 선택이니까.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아내와 나만 남는다. 한 시간쯤 후, '왓포 사원'에 갔더니 윤미, 희경, 성호, 승현이가 있다. 언제 헤어졌다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심전심인지 녀석들도 강아지들 마냥 뛰어와서 참새들처럼 재잘거린다.

 "이모! 삼촌! 여기 댑따 좋아요!" "저 안에 엄청 큰 불상이 누워있어요." "그런데 여기 공짜예요, 입장료도 없어요!"

 그렇지, 여기 '와불상'이 유명하지, 그런데… 뭐, 공짜? 아니다. 태국 국왕의 생일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녀석들이 나온 곳은 태국 사람들만 드나들도록 되어있는 옆쪽으로 난 문이다. 여행자가 입장하는 문은 앞 쪽에 있고, 당연히 입장료가 있다. 녀석들에겐 군것질을 맘껏 하고도 보고 싶은 것 다 관람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던 셈이다. 그 이름하여 단순 혹은 무지.

▲ 차오프라야 강에 방콕의 새벽을 알리는 사원 '왓 아룬'을 오르며.
 이번에는 왕궁 쪽으로 걷다 보니 큰길 건너편에 상훈이네 모둠이 보였다. 왕궁 담 아래 길바닥에 중학교 3학년 동갑내기 도솔이와 정호, 1학년 동갑내기 영준이와 수경이가 퍼질러 앉아있다. 더위에 지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쪽은 왕궁 출입구 방향이 아니었다. 소리를 질러서라도 일러줄까 하다가, 또 그만둔다. 되돌아가는 것도 다리품을 파는 것도 이제 다 저 아이들의 팔자고 몫이다. 아이들에겐 스스로 여행하는 일이 어렵고, 우리부부에겐 스스로 여행하는 녀석들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어렵다.

 차라리 보지를 말자 싶어, 관광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다. 인터넷에서 체크해둔 코코넛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가기로 한다. 어느새 길은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었고, 집들은 적당히 낡고 적당히 낯설었다. 아이스크림 맛은 별로였지만,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손님 하나 없이 한가한 이발소와 그 앞에 세워진 기름때 절은 스쿠터, 그리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고집스런 인상의 노파…. 다음엔 식당을 하나 찾아들어갔다. 영어로 된 메뉴가 없는 걸로 보아 현지인들 식당이다. 옆 사람 요리를 보고 대충 시키자, 해물 튀김국수가 나왔다. 라면처럼 뽀글거리는 튀김 면과 해물이 든 소스가 따로 한 그릇씩이다. 소스를 튀긴 면에 부어서 먹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또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생각이 난다. 낯선 거리, 낯선 식당, 낯선 음식에 잘 적응하고 있는 걸까? 향신료 강한 이 나라 음식이 입에는 맞는 걸까? 빵이나 햄버거로 때우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했다.

▲ 그림과 손가락만을 이용해 주문한 해물튀김국수.
 기차표 등 일처리 몇 가지를 해치우고 나서 아이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동대문' 앞으로 서둘러 나갔다. 아이들이 "이모! 삼촌!"을 외치며 폴짝폴짝 뛰었다. 벌써 '히피형 몸빼바지'와 '조리'를 사서 입고신고 온 아이도 있었다. 녀석들은 서로의 무용담으로 신이 나 있었다. 과연 그들의 하루가 어땠을까.

 "삼촌, 우리 오늘 엄청 걸었어요." "다리 아파 죽겠어요. 지인~짜예요." "우리 모둠은 시장만 4개 구경했어요." "사고 싶은 거 대빵 많았는데, 돈 아까워 안 샀어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던가 보다. 한 모둠은 시장만 네 군데 돌아다녔다 하고, 한 모둠은 왕궁에 갔다가 출입구를 못 찾고 헤매다가 카오산 로드를 구경한 모양이고, 또 한 모둠은 미술관에 갔다가 역시 카오산 로드에서 쇼핑을 한 모양이었다. 세 모둠의 공통점은 다들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밥은 뭘 사 먹었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핫칠리 뭐라 했는데…. 아, 이름은 몰라요. 근데 별로 맛없었어요." "하영이 언니하고 나운이 언니는 냄새가 이상해서 하나도 못 먹었어요." "쌀국수요." "우리 모둠은 이슬람식당에 갔는데, 코코넛주스만 빼고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결국은 나의 기우였던 셈이다. 아이들은 낯선 길이든 낯선 음식이든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김치가 그리워 벌써 한국식당에 발을 들인 모둠도 있고, 입맛이 맞지 않아 군것질로 대신한 아이들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여행 첫날부터 용감하게 낯선 이방의 세계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 같다. 이제 겨우 하루 여행하고도 저토록 시끄럽게 떠벌여대는 것도.

글·사진 양학용 여행작가/0908y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