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주는 자유와 학문적 호기심, '제주학'으로 향하다
[제주 ‘길’에서 묻다] 에필로그-이제 신발을 벗고
옛 지도 속의 길에서부터 바다 건너 잠녀의 길까지 '제주' 관통
섬 위의 역사·문화 살아있어…학문적 응축 진정한 복원으로
여기 저기 '길'이다. '눈만 뜨면 새로운 길이 만들어 진다'는 말은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없이 일주일 버티기에 도전했던 누군가처럼 하루 한 번 이상 '길'과 부대끼지 않고는 생활하는 것은 무모할 정도다. 길과 함께 '제주'를 더듬어가는 과정은 실크로드나 누들로드처럼 광활한 거리감은 없지만 그 안에 응축된 것들로 웅대하다. 특정한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하지만 '제주'라는 말 하나로 가슴을 내주는 것들을 서슴없이 밟고 더듬었다. 그렇게 오래 묵었던 숨을 토해낸 길에서 제주를 봤다.
# 변화로 포장된 기억의 조각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원래 땅 위에 길이란 게 없었다'는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 루쉰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밟으면 가고, 또 밟으면 서는 자동차란 것이 보편화되고 탈 것이 고르기만 하면 될 만큼 늘어서 있지만 결국은 '발'이다. 조금이라도 체온이 보태지지 않으면 길은 입을 열지 않는다. 심지어 눈을 맞춰주지도 않는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길이 됐지만 그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며 '길'이란 이름표를 알아서 내려놓은 길도 부지기수다.
제주 목축사를 따라 더듬어간 중산간 잣성의 흔적에는 이제 작은 표식들이 나부낀다. '제주올레'이후 우후죽순 늘어난 옛 흔적을 따라 걷는 길의 하나로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제주 바닷길의 지킴이였던 도댓불은 또 어떠한가. 시원스레 해안도로를 질주하는 사이 쓰임을 잃은 속도보다 더 빨리 모습을 잃었다. 간신히 남아있는 것들 역시 주변의 무관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옛'이란 이름을 조금 밀어둔다고 해도 사정은 비슷하다. 제주 잠녀들의 작은 보따리를 따라 간 길이며 현대사의 굴곡 속 아픔으로 점철된 4·3의 그늘은 이젠 일부러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이 됐다.
# 문화 잎맥으로 호흡하고
과거를 지운 현재보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은 섬을 보다 풍성하게 한다. 서둘러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섬사람들에게 '올레'는 무거운 물허벅이나 나무짐을 이고 지고 걸었던, 물에 간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힘겨운 노동 현장으로 가거나 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던 기억이 앞선다. 하지만 거기에 시간이 보태지고 새로 트인 혈류를 따라 역사와 이야기가 따라 나오면서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길은 스쳐가는 통로에서 생활의 한 부분으로 존재감을 찾기 시작한다. 문화 DNA란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은 아닌 셈이다.
길의 매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것 뿐 만 아닐 할리우드에서도 미처 시도해보지 못했던 여러 시대의 이야기가 우루루 쏟아져 나와 얽기 설기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며 오늘을 만들어간다. 섬 남서쪽 대정 알뜨르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된다. 더듬어 유배의 역사며, 이재수의 난 같은 민란의 흔적에 일제 침략기의 아픔과 제주4·3의 슬픔까지 제주사(史)의 한 흐름을 꿰차고 있다. 그저 발을 옮기고 귀를 대는 것 만으로도 책 열권으로는 모자랄 분량의 이야기가 꼬리를 문다.
머무름보다 떠남이 익숙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것은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섬은 여전히 머문다. 그 안에 역사며 문화 같은 것이 살아 숨 쉰다. 그 다양성과 불규칙성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사람을 끈다. 오히려 빠르면 놓치는 게 많다. 특히 잎맥처럼 섬을 뒤덮고 있는 소통의 길은 제주를 살게 한다.
공동체가 사라지고 역사는 '과거'라는 포장에 쌓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섬에 산다. 그 위에 놓인 길을 걷고 다시 길을 만든다. 한 번 지나온 길을 다시 찾아가라, 걸어보라 하면 못할 것 같아도 갈 때 마다 내놓는 다른 느낌, 다른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걷기 열풍이니 느림 문화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가 아니더라도 길을 따라 숨이 오고 간다.
길이란 것이 그저 '평탄대로'였다면 사실 재미가 없었을 터다. 섬에서 출발했던 까닭에 많은 길은 바다로 향해 났다. 제주에서 바닷길은 뭍의 그것 보다 더 많은 시간과 이야기성을 품고 있다.
그리고 하나 과거로의 회귀보다는 '지속가능한'을 전제로 한 복원 역시 길에서 찾은 열쇠다.
제주가 여전히 '섬'인 것처럼 제주가 안고 있는 역사와 인문의 정신 역시 섬 위에 있다. 무너지고 없어진 것을 다시 짓거나 재현하는 것도 '복원'이지만 그 안에 있던 정신을 찾아 읽고 사라진 연결고리를 찾아 다시 잇는 것 역시 '복원'이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 그리고 비어있는 것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바른 인지와 문화적 상상력이다. 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