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기차는 그렇게 우리들의 로망을 싣고
[양학용 여행작가의 라오스 여행학교]③ 기차 타고 치앙마이 가는 길
"삼촌, 우리 기차 몇 시간이나 타요?"
"음… 15시간 정도."
"2층에서 자고 싶어. 그래도 괜찮죠?"
"그건 친구들에게 물어봐야지."
"침대기차는 더 비싸겠다, 그죠?"
"아마도."
"누워있어도 가는 거죠? 맞죠?"
아이들 마음은 이미 방콕을 떠나 기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왜 안 그렇겠는가. 굳이 밤을 새워서 달려야 할 만큼 땅덩어리가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그나마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을 끊어놓았으니, 아이든 어른이든 열차 침대칸에 누워 낮과 밤을 온전히 달려 보고 싶은 로망을 한번쯤 가져보았을 만하다.
나 역시 그랬었다. 처음, 인도였던가. 기차를 좇아 해가 뜨고 해가 지던 그 신비롭던 기억. 덜커덩덜커덩 2층 침대칸에 누워 올려다보던 밤하늘과 차창 안으로 수북수북 쌓여들던 달빛. 하얀 아침과 함께 "짜~이"를 외치던 소년과 그이에게서 전해진 한 잔에 2루피 하던 달착지근한 그 이국의 맛과 향. 그리고도 한나절을 더 달려야했던 들판과 시간들…. 아이들에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아이들은 게스트하우스 앞마당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손에는 한 보따리씩의 먹거리가 들렸다. 기차간에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한다고 했더니, 모둠별로 햄버거나 과자나 과일 등을 사온 것이다. 어떤 모둠은 용케도 컵라면까지 구해왔는데, 과연 기차에서 뜨거운 물을 어떻게 조달할 지 지켜볼 일이다. 줄줄이 배낭을 메고 기차역으로 가는 53번 버스를 탔다. 부모들이 본다면 큰 배낭을 메고 복잡한 버스를 잡아타는 아이들이 안쓰러울 법도 하지만, 택시보다는 버스를 좋아하는 우리부부를 만난 이상 한 달동안의 아이들의 운명(?)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1인당 7바트 하는 버스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방콕 특유의 후덥지근한 열기와 매연이 끼쳐들었다. 버스는 도심을 헤쳐 나갔다. 그런데 로터리를 몇 개쯤 지났을 때다. 개울 옆 도로변에 버스가 멈췄다. 손님들 반 정도가 내렸고, 잠시 후에는 운전사도 내렸다. 그는 곧장 길 건너편 식당가로 들어갔다.
"곧 내릴 거야! 다들 깨우고, 모둠별로 인원 확인 해."
"삼촌이 곧 내린데. 잠 깨워!"
"얘들아,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지금 시간이 기차를 놓칠 지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버스에서 내리면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거다! 다들 알겠지?"
승객들은 술렁였다. 도로는 정체 중이고 버스는 만원인데, 이방인 하나가 낯선 언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자 아이들도 덩달아 떠들어대는 형국이었다. 그때 차장이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의 급한 사정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운전사는 고맙게도 기차역 광장 건널목 바로 앞에다 버스를 세웠다. 우리들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빨리 내리기를 독려했고, 차장을 비롯한 방콕의 시민들은 아이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길을 내어주며 응원의 환호성을 보내주었다.
출발시간 5분전, 기차역을 향해 질주했다. 내가 선두에 서고 아내가 마지막에서 뛰었다. 아이들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잘들 달렸다. 우르르르 달리면서 기차표를 손에 들고 '치앙마이'를 외치면 철도역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플랫폼 방향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뒤따라오는 친구들에게 '여기! 여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한 편의 영화를 찍는 것처럼 신이 났다. 어떤 상황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놀이'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들이 경이로울 뿐이다.
그렇게 우리들이 간신히 객차에 오르자마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곧 방콕 도심을 빠져나갔다. 열대의 숲이 지나가고 들판이 나타났다. 아이들은 어느새 카드게임에 빠져들었다. 경찰관과 도둑이 나오는, 나로서는 그 게임이 왜 재미가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상한' 놀이를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혼자 앉아 일기를 쓰고 음악을 듣거나 창밖을 내다보고, 또 그러다 잠이 든 아이들도 있었다. 목이 마르면서도 바가지 가격이라고 생수 한 병을 안 사먹는 아이들이 재미있었다. 과연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저런 모습이 있음을 알고 있을까? 그래도 컵라면에 넣을 뜨거운 물은 안 사먹을 수가 없다. 녀석들은 그 가격이 또 바가지라고 투덜거린다. 아이들에겐 한편으론 설레고 한 편으로 지루할 것 같던 15시간의 기차여행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덜커덩덜커덩. 아이들은 침대칸 아래위로 누워서도 쉬 잠들지 않았다. 덜커덩덜커덩. 막막하면서도 자유로운 밤이 차창 밖 달빛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글·사진 양학용 여행작가/ 0908ya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