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 세계적 거장이 되다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4. 앙리 루소의 <잠자는 보헤미아 여인>
고향 소장 원해 시장에게 편지 보낸 작품, 뉴욕 현대미술관이 구입
앙리 루소, 현대미술사에 빛나는 원시주의와 초현실주의 어머니
아마추어 화가
보통 아마추어 화가라고 하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특정 화가에게 사사를 받고 활동하는 화가를 지칭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경우 도화서 화공이 전문 화가에 속하고, 문인화가나 민화를 그리는 민중 화가들은 아마추어 화가에 속한다. 문인화가는 여가 시간에 취미로 그림을 그렸고, 민중 화가들은 대중 취향을 고려해 생계를 위한 그림을 그렸다.
아마추어나 전문가라는 분류는 제도의 구분에 다름 아니다. 제도적인 학벌로 볼 때 우리나라 아마추어 출신의 대표적인 화가는 고(故) 박수근 화백과 안창홍 화백이다. 박수근 화백은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을 통해 한국미를 구현한 한국 최고의 화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고, 안창홍 화백은 동시대 한국 100대 작가 반열에 든 화가로 응시의 미학을 독창적으로 전개했다.
서구의 경우 아마추어 출신 유명한 화가로는 반 고흐와 앙리 루소가 있다. 특히 앙리 루소는 독학으로 초현실주의 미학의 길을 열었고, 원시주의 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루소는 살아생전에 일반인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그러나 피카소, 르동, 마티스 등 화가들과 전위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앙리 루소(1844~1910)는 1844년 프랑스 마옌 주 라발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도산 후 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음악과 데생에 재능을 보였다. 19살에 변호사 밑에서 서기로 일하다 또래 직원 두 명과 고객의 소송 의뢰비 20프랑을 훔친 것에 연루돼 낭트에 있는 소년원에 한 달 동안 구금되었다가 군대에 자진 입대해 1868년까지 복무했다.
루소는 1868년 군 복무기간 중 아버지가 사망하자 제대하여 집달관 밑에서 조수로 일했다. 이듬 해 하숙집 주인 딸 클레망스와 결혼했다. 1871년 루소는 아내의 권유로 파리 관세청의 말단 세관원으로 취직해 생활의 안정을 찾았고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관원 때 그린 그림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왠지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느꼈다.
루소는 1879년까지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딸 줄리아 만이 오래 살았다. 루소의 아내는 1888년 5월, 37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루소에게 화가로서의 인생의 전환이 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1884년 화가 펠릭스 클레망의 추천으로 루브르 등 유명 미술관에서 고전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模寫)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 자격은 루소가 아카데미 교육에 대한 콤플렉스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1885년 루소는 처음으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장만했다. 또 이 무렵 앙데팡당전(독립미술가전)이 폴시냑과 조르주 쇠라에 의해 창립됐다. 이 앙데팡당전은 루소가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주 통로가 됐다. 앙데팡당 2회전에 동료화가 막시밀리안 뤼스의 권유로 <카니발의 저녁>, <숲 속의 산책> 등 4점을 출품한 루소는 거의 매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루소를 가장 먼저 인정한 사람은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였고,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의 주목을 받았다.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자화상은 400년 전 이탈리아 회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루소의 이런 방식을 '풍경-초상화'라고 한다. 이 그림을 본 폴 고갱도 "여기에 회화의 진수가 들어있다."고 감탄했다.
1891년 루소는 첫 번째 정글 주제의 <놀라움!>을 앙데팡당전에 출품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루소의 그림을 열광적으로 수집했던 로슈 그레이는 《앙리 루소》라는 책에서, 루소를 '일요화가'라고 불렀다.
1894년 루소는 <전쟁>이라는 작품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이때 젊은 청년 시인 알프레드 자리를 알게 됐다. 알프레드 자리는 루소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나이 차이나는 루소에게 세관원 직업을 가진 아마추어 화가라는 뜻의 '세관원 루소'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루소는 첫 아내가 사망한 후 11년 만에 조세핀과 재혼을 했지만 조세핀마저 4년이 채 안 돼 병으로 운명했다. 조세핀은 재혼 후 문구점을, 루소는 생계를 위해서 미술교습소를 운영했지만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루소는 한때 교육부에서 후원하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에 미술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루소는 다시 정글 그림에 매달렸다. 1891년 <놀라움!>을 발표한 후 13년 만에 두 번째 정글 그림 <호랑이에게 습격당한 정찰병>을 내놓았다. 루소는 1910년까지 25점의 정글 그림을 그렸다. 1906년 루소는 화가 로베르 들로네를 처음 만났고, 알프레드 자리의 소개로 시인 아뽈리네르와 그의 아내 마리 로랑생을 알게 됐다. 로베르 들로네의 어머니가 들려준 인도 여행의 이야기를 듣고 유명한 <뱀을 부리는 마법사>를 그렸다. 들로네의 어머니 소개로 독일의 화상 빌헴름 우데를 알게 되면서 루소는 화상과 고객, 전위예술가들과 교유했다.
<꿈>은 루소가 생애 마지막에 그린 대작으로 정글 주제의 26번째 해당하는 작품이다. 1910년은 어느 해보다도 많은 작품을 그렸다. <꿈>은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여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이 해에 루소는 그림에 계속 몰두했고, 1년 전 법정에 연루된 고충을 겪은 탓에 몸은 크게 쇠약해져 9월 2일 네게르 병원에 입원했으나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폴 시냑과 로베르 들로네를 포함해 7명이 참석했다. 루소가 사망한 이듬해 들로네가 루소 작품 47점으로 앙데팡당전에서 추모전시회를 가졌으며, 1913년에 조각가 브랑쿠시와 자라트가 묘비를 만들고, 아뽈리네르가 묘비명은 지었다. 루소의 묘비는 1947년 고향으로 옮겨졌다.
루소의 명작 <잠자는 보헤미아 여인>은 많은 일화를 남긴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97년 앙데팡당전에 처음 소개됐고, 자신의 고향 라발 시가 이 그림을 소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루소는 고향의 시장에게 자신의 작품을 사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소의 작품 중 가장 신비로운 <잠자는 보헤미아 여인>은 전시 중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13년 만에 찾게 되었으나 훼손이 심했다. 칸바일러라는 화상이 찾아낸 후 그림은 다시 복원됐다. 이 그림은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구입하면서 미술관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잠자는 보헤미아 여인>은 무지개 옷을 입고 사막의 달빛 아래 맨발에 입을 약간 벌린 채 한 팔을 베개 삼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서 잠을 자고 있다. 옆에는 늘 가지고 다니는 만돌린과 물병이 놓여 있다. 어디선가 사자 한 마리가 다가와 잠자는 여인을 지켜본다. 사자의 눈빛은 공포의 분위기가 아니며, 오히려 약간의 긴장감 속에 여인을 지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막은 고요 그 자체이다.
아프리카나 이집트는 고사하고 해외에 한 번 가본 적이 없는 루소가 이런 진짜 사막 같은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루소의 다른 정글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막의 그림은 순전히 루소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린 것이다. 루소는 상상력을 떠올리는 장소로 식물원과 미술 전시관을 택했다. 사자와 호랑이의 등장은 선배 화가들의 그림에서 빌려왔다. 그러고도 부족하면 동·식물도감을 보고 그리고 또 그렸다.
루소의 그림을 먼저 알아준 이들은 전문 화가들이었다. 당시 화가들은 뭔가 탁 트이는 새로운 그림을 원하고 있었다. 사실 당시는 인상파가 대두되고 권위적인 아카데미 화가들은 시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9세기말 20세기의 거장들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현대미술사에 빛나는 화가인 루소는 원시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로 추앙받고 있다. 루소는 아마추어만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현한 화가가 됐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