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화가, 인간의 본성 탐구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5.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의 <초상>

2012-05-08     전은자

빠른 붓질로 뚜렷한 얼굴 윤곽선과 표정에 생동감 주어
모딜리아니가 사망하자 잔도 그의 뒤를 따라 생을 마쳐

파리에서 활동했던 유대인 화가들, '파리파'

세상을 바꾸게 한 두 개의 혁명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이다. 산업혁명은 기계문명의 시대를 열었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는 바로 세계사의 대전환의 시대인 만큼 다양한 미술운동이 몰아친 시기이기도 하다.

20세기는 전적으로 전 시대를 기반으로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이때부터 예술가 개인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개인성의 강조는 미술 본연의 독립적인 가치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즉 자연에 종속되지 않는 회화, 역사나 문학에 의존하지 않는 회화, 예술을 위한 예술의 형식미 추구 등 19세기와는 다른 조형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대적인 미술의 경향을 모더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첫 장을 연 미술운동은 표현주의다. 표현주의는 강렬한 색채, 힘찬 터치, 구도, 형태, 소재 면에서 공통적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개인의 내면에서 불거져 나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회화의 한 방법이다.

현대미술의 가장 독창적인 화가 중 한 사람은 모딜리아니다. 그는 오로지 자기식의 독창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 화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작업을 고수한 화가들을 역사는 에콜드파리, 즉  '파리파'라는 이름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전시대 예술과 동시대 예술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국을 떠나 활동함으로써 생기는 우수(憂愁)·애환·가난·향수(鄕愁) 등의 고독한 감정을 주제로 하여 서정성을 표출하였다.

'파리파'의 대표적인 화가는 모딜리아니, 샤갈, 위트릴로, 수틴, 세베리니, 자코메티 형제, 브랑쿠지 등이 있다. 20세기 벽두 파리의 예술적인 분위기는 표현의 자유, 다양한 혼합문화로 점철된 아방가르드의 새로운 물결이 일렁거렸다. 

▲ 모딜리아니
이탈리아에서 온 모딜리아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유태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보르노는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도시로 자유롭고 국제적인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문화도시였다.

 그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했지만 국제 문화에 관심이 높았고, 어머니는 교양 있고 자유분방한 여성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외조부, 이모는 모딜니아니에게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심어주었고, 모딜리아니의 성격 형성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런 가정의 분위기와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했던 모딜리아니의 건강 상태는 이후 그가 독창적인 작품을 그려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898년 병에 걸린 모딜리아니가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는 화가 굴리엘모  미켈리의 지도를 받도록 해주었다. 1899년에서 1900년 어머니는 폐렴에 걸린 모딜리아니를 데리고 미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의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를 돌아보았다. 1901년 5월,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의 누드화 학교에 입학해 조반니 파토리로부터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당시 피렌체는 상징주의 미학이 유행했고 모딜리아니는 이에 자극을 받았다.

1903년 베네치아 여행 중 모딜리아니는 칠레 출신 화가로부터 유럽의 인상주의 회화에 대한 소문을 듣고 파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1906년까지 베네치아에서 뭉크, 클림트, 로트렉 등 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1906년 파리에 간 모딜리아니는 다양하고 복잡한 그곳의 문화지형에 정서적인 불안을 느꼈고, 급기야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파리의 유대인 화가 모임에 참석하면서 활력을 되찾았고, 모딜리아니 주변으로 동유럽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파리에는 동유럽 화가 모임,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 모임, 피카소가 참여하고 있는 스페인 카탈루나 화가 모임 등이 있었다. 당시 파리는 야수파와 입체파회화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미술 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개인 창작에 열중하였다. 모딜리아니는 1908년부터 1914년까지 <유대인 여인>, <리보르노의 걸인>, <부랑자>, <첼로 연주자>, 그리고 몇 점의 누드 작품과 7점의 조각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하였다.

모딜리아니는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조각에 몰두하였는데 한때 미켈란젤로의 고향에 내려가 생활하였다. 그는 그림보다 조각에 더 희망을 걸었다. 1909년 모딜리아니에게 조각을 권한 브랑쿠지를 만나게 되면서 조각에 더욱 열중하다보니 미세한 돌가루 때문에 폐에 이상이 생겼다. 1915년부터 조각을 할 수 없게 된 모딜리아니는 그의 후원자이기도 한 즈보로프스키 덕분에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모딜리아니에게는 두 여인이 있었다. 1914년에 알게 된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는 기자이자 영국 문학 작가였다. 모딜리아니는 2년 동안 그녀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고 그녀에게 11점의 초상화와 여러 점의 스케치를 헌정하였다. 1917년 모딜리아니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다니는 열아홉 살의 여학생 잔 에뷔테른을 만났다. 잔의 집안은 가톨릭을 믿는 부르주아 집안이었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고 가난한 무명의 화가이자 유대인인 모딜리아니와는 계급적으로 맞지 않았다. 두 연인을 지켜본 레옹 인덴바움은 "잔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고 긴 머리를 땋아 내린 가냘픈 여인이었지만 때로는 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성모 같기도 했다."고 전한다. 잔은 모딜리아니를 지켜주는 천사와 같았다. 잔은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

1917년 12월 모딜리아니는 첫 개인전을 베이티 바일 화랑에서 열었다. 하지만 개인전에 출품된 누드화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찰의 철거 권유를 받았다. 1818년 이후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후원자 즈보로프스키는 따뜻한 지중해 연안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모딜리아니는 지중해에서 다시 활력을 되찾았으나 모델을 구할 수 없어 처음으로 풍경화 4점을 그리게 된다.

1918년 잔은 니스에서 딸 잔 모딜리아니를 낳았다. 이듬해 모딜리아니는 홀로 파리로 돌아왔다. 이 무렵 모딜리아니는 즈보로프스키의 노력으로 프랑스 근대화가 중 중요한 화가로 부상하였다. 예술적 열정은 더해갔고 재능은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모딜리아니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쓰러져 1920년 1월 24일 자선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 <앉아있는 잔 에뷔테른>
영혼의 빛을 그린 잔의 초상 

모딜리아니와 운명을 같이 했던 잔 에뷔테른은 화가 지망생이었다. 모딜리아니와 함께 전설적인 사랑을 남기고 떠난 잔의 그림은 현재 몇 점이 전해온다. 잔이 그린 <자화상>과 <정물화>는 색채 감각이 뛰어나고 마티스 풍에 가깝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의 초상화 중 <앉아있는 잔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그려졌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초상화를 해석하였는데, 인물의 내면을 촉각적으로 그려내듯 그 인물의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하였다. 그가 그린 얼굴에는 그 초상화 주인공의 내면의 세계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표정과 시선이 생생하다.

▲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또 다른 잔의 초상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잔의 측면의 얼굴을 그린 그림인데 잔의 지순한 영혼을 그려낸 듯하다. 빠른 붓질은 뚜렷한 얼굴의 윤곽과 표정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2년 후 모딜리아니가 사망하자 얼마 없어 임신 8개월이었던 잔 역시 자살로 생을 마쳤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 "겉모습 내부에 숨겨진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을 탐구(파졸로 델라르코)했다"거나, 그의 작품이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를 "창조적이나 사회와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오스발드 파타니)"이라고 한다. 리오넬로 벤추리는 "모딜리아니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얻은 사상과 회화이다."라는 말로 그를 정리하였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