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 분모 '독서'가 즐거워졌어요
[제주교육 희망순례] 7.‘통’하는 책읽기 소통하는 힘 쑥쑥
독서마라톤 완주 유철호씨 가족·이재호씨 가족
'자신감'과 '성취감' 큰 수확, 독서생활화는 '덤'
올 초 학교폭력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참 많은 일들이 이어졌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이 연일 부각되고 이른바 문제 학생들의 배경에 시시콜콜 말이 많다. 가정 환경이 불우하고, 온라인 게임 등에 빠져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경쟁중심의 교육 체계가 만든 문제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쟁이 다 나쁜 것일까. 가족들 사이 '은밀한' 경쟁이 시작된다. 서로 얼마만큼 목표에 다가갔는지 정보를 빼내느라, 좋은 책을 먼저 차지하느라 얘기할 거리도 늘었다. 엄마·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고, 아이들만의 고민이 이해가 되는 등 학교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된 밥상머리 교육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 빠른 '책장 앞'교육이다.
△가족, 독서마라톤
아이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
부모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부모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는다. 하지만 부모의 말과 행동이 어긋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이른바 '삐딱선'을 타게 된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부모의 말에 의심을 품는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이야기 한 들 정작 부모가 인터넷에 매달리고 TV 앞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면 그저 기분 좋게 책장을 넘길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특히나 경쟁식 책읽기의 폐해로 '독서' 평가가 시들해지면서 책과 가까워지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힘든 미션이 되고 있다.
이런 흐름들 속에 벌써 3년째 독서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다. 우당도서관이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된 책읽기 이벤트다. 방학을 이용해 열리는 이 대회는 책 1쪽을 마라톤 1m로 환산, 경기전 설정한 독서량 만큼 완주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3개월 동안 개인부문 5㎞(5000쪽), 10㎞(1만쪽)와 단체부문 하프코스 2만1095㎞(2만1095쪽), 풀코스 4만2195㎞(4만2195쪽)를 읽는다는 일은 사실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시작은 의욕이 넘치지만 거의 매일 일정량의 책을, 그것도 쉽고 편한 만화나 기타 단행본을 제외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은 금세 부담이 된다. 그래서 완주율이 18~20%를 넘지 않는다.
지난해 열린 대회에는 470명의 개인부문 참가자와 36개팀 137명의 단체부문 참가자들이 함께해 개인 85명과 단체 28명이 최종 완주 메달을 받았다.
이 중에는 가족이 한 팀으로 단체 부문에 기록을 남긴 유철호씨 가족과 가족 개개인이 경쟁자가 되어 코스를 완주한 이재호씨 가족이 있다.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 사는 유철호씨(37) 가족 3명이 지난 여름 함께 소화한 독서량은 2만1095쪽, 200페이지 책 105권 분량이다.
'책나라로'라는 팀명으로 출전한 이들은 충실한 독서 메모와 서로에 대한 끈끈한 믿음을 확인시키며 완주메달 외에도 제주시장상을 받았다. 책읽기의 비밀을 찾고 싶다고 찾아간 유 씨의 집, 익숙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다름아닌 TV다.
어머니 조은숙씨(45)는 "집에 TV가 없다보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며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산책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책 읽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귀띔했다.
한 참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열살 호은이(10)는 그런 엄마 맘과 달리 간혹 TV타령을 한다.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호은이의 투정에 "TV가 생기면 엄마랑 아빠가 호은이랑 놀아줄 시간이 줄어들 텐데 그래도 괜찮아?"하고 조용히 타이르고 이해를 구한다. 책에서 배운 대로 아이들의 가슴높이에 맞춰 하나 하나 설명하다보면 답이 찾아진다.
조씨는 "무슨 일이든 즐기면서 해야지 즐기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꾸준히 하기 힘들다"며 "아이도 마찬가지라 부모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아이들에게 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딸아이와 함께하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유씨 부부는 호은이가 2학년이 될 때까지 번갈아가며 소리내 책을 읽어줬다. 역시 TV를 내려놓고 얻은 시간을 활용한 일 덕분에 호은이도 자연스럽게 혼자서 책을 읽는다.
지난해 독서마라톤에서 상을 탔던 때의 기분은 호은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해마다 완주메달을 모으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책 읽기에 단단히 재미를 붙인 호은이의 독서법은 간단명료하다.
"책 제목을 보고 흥미가 당기는 책을 읽으면 좋은 것 같아요. 심심하다가도 책을 읽으면 재밌어져요"
△독서마라톤 올해는 이랬으면
이재호씨(50)는 딸과 아들, 이렇게 세 명이 독서마라톤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단체가 아닌 개인 참가다.
첫 도전부터 욕심은 금물이란 생각에 이씨와 아들 찬영이(13)는 10㎞, 딸 예영이(11)는 5㎞를 신청했다. 단체 참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책을 읽는 습관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싸움인 마라톤처럼 개인 참가를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주효했다.
이씨는 "10㎞ 부문인 경우 매일 평균 109페이지를 92일동안 읽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며 "매일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감상문을 써야하는 등 꼬박 하루 3~4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다"고 회상햇다.
그렇게 3개월 가족들의 일상은 책읽기로 시작해 책읽기로 끝났다. 누군가 지쳐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응원하고 격려하는 일을 아끼지 않았다. 여름방학 동안 하고 싶은 일 리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서마라톤에 참가하지 않은 가족들까지 호흡을 맞춰준 덕택에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
이씨 가족이 완주했을 때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자신감'과 '성취감'이었다. 오히려 독서습관은 저절로 생긴 '덤'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함께 정말 다양한 책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됐다. 자신의 흥미를 찾고 책에서 필요한 것을 찾는 방법을 채득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교훈이다.
두 가족 모두 독서마라톤 참가에 만족과 함께 아쉬움을 전했다. 만족한 부분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고 대화할 거리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눈을 맞추다보니 서로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배려의 마음을 알게 됐다. 진심을 담아 서로를 응원하고 또 믿어준다는 것이 주는 효과는 가족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이다.
아쉬운 부분은 생각보다 참가하는 사람들이 적고, 참가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로 중도 포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개인별 독서일지를 공개하지 않아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들이다.
혼자 외롭게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은 자칫 책읽기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두 가족 모두 독서마라톤 이후 책읽기 예찬론자가 됐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은어는 모르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예쁜 말이며 표현을 더 많이 알게 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밖에 대한 관심 역시 커졌다. 인터넷이 세상을 가깝게 했는지 모르지만 호기심을 반감시키는 반작용도 만들었다. SNS같은 소통 창구가 늘었지만 어법에도 맞지 않는 신조어가 쏟아지고 '사이버린치' 같은 눈에 보이지 않은 폭력을 만들어냈다.
책은 그런 것들을 순화하는 필터로 아직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두 가족이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