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의 수련(水蓮), 인상주의 예술의 극치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6. 끌로드 모네의 '수련'

2012-05-21     전은자

▲ 오랑쥬리 미술관의 모네의 수련의 방
'인상주의'라는 용어, 모네 작품 <인상, 해뜨는 광경>이 계기
배에 화실 마련, 새벽부터 저녁까지 캔버스 번갈아가며 작업

미의 출발점, 자연

인간이 찾는 아름다움은 두 종류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간이 자연에서 찾는 아름다움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창작한 아름다움이다. 로제 카이유와는 아름다움이란 인간이 느끼고 내리는 평가라 할지라도, "자연의 구조는 상상 가능한 모든 미의 출발점이며 최종적인 참조 목록"이라고 하였다.

화가들이 자연을 보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인상주의는 자연을 보는 방식이 어느 시대보다도 특별하였다. 인상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밝은 색채를 추구하는 것이다. 빛의 변화를 관찰하여 아름다운 색채를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인상주의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다.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윤곽선을 분명하게 그리지 않고 흐리게 그린다. 검은색을 쓰지 않고 그림자 또한 투명한 색채로 표현하며 보색대비를 중요시 여긴다. 원근법을 구도에 적용하지 않으며 원근법이 필요할 경우 직관을 중요시 여긴다. 한 마디로 인상주의 특징을 설명한다면, '자연의 빛의 변화를 화면에다 표현하고자 한 19세기 후반의 미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는 유럽의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 미술운동이다. 인상주의는 산업혁명의 흥기하면서 사회적 모순이 커져가는 시대에 쿠르베로 대표되는 사회적 사실주의를 넘어 모더니즘의 길을 새롭게 여는 전환점을 제공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사회 객관적인 표현을 거두고 빛의 아름다운 작용에 반해 직관의 표현을 중요시함으로써 표현주의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인상주의 눈에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중시 여기던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기차역, 공장, 거리, 항구와 같은 시설마저도 빛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19세기 유럽은 농촌이 붕괴되면서 도시로 몰리는 노동자들의 생활 상태는 극빈에 달하였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와지의 삶과는 반대로 열악한 삶의 조건과 환경에 시달렸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의 눈은 그것을 외면하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작품보다 자유롭고 밝아졌다. 색채에 리듬이 있어 활기가 넘쳤다. 점점 자아의 표현에 치중하게 되면서 개인의 중요성, 즉 개성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표현주의 미술로 발전하였고, 이후 20세기 미술의 든든한 기초가 되었다.

▲ 모네 초상화
인상주의라는 말의 시초, 모네

인상주의는 자연주의 전성기인 1860년대 프랑스에서 등장하였다.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nism)'라는 용어는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출품된 끌로드 모네의 작품 제목 <인상, 해뜨는 광경>이 계기가 되어 탄생하게 되었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루이 르르와(Louis Leroy)라는 기자가 1874년 4월 25일 <르 샤르바리(Le Charivari)>지에 기고하면서 탄생하게 되었는데, 모네를 야유하는 의미에서 모네에게 '인상주의자'라고 불렀던 것이 정확한 이유였다. 루이 르르와(Louis Leroy) 기자는 모네의 작품을 보고 "이 색깔의 얼룩들은 우물 벽의 쑥돌을 칠하는 기법에서 얻은 것이다! 퍽! 팍! 찰싹! 철썩!......이는 실로 놀랍고도 무시무시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 당사자들은 그 말이 시각적 인상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오늘날 미술운동으로서의 인상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직접적인 기원은 낭만주의 화가 으젠느 들라크루아, 까미유 꼬로, 사실주의자 귀스타브 꾸르베이며, 전(前)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으젠느 부댕, 장 프레드릭 바질리(Jean-Fr?d?ric Bazille)를 꼽을 수 있다.

끌로드 모네(1840~1926)는 1840년 11월 14일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아브르 지방에서 보냈다. 반찬가게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모네는 캐리커쳐를 즐겨 그렸다. 1858년 으젠느 부댕(Eugene Boudin, 1924~1898)으로부터 그림을 그리라는 독려를 받았다. 그 이듬해 모네는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가 아카데미 쉬스를 자주 드나들면서 피사로를 만났다.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군 복무를 마친 모네는 파리로 돌아와 바질르, 르누아르, 시슬레와 사귀었다. 모네는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퐁뗀느블로 숲 사이의 앙 비에르 지방으로 가 밝은 빛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모네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보다는 밝아졌지만 여전히 쿠르베와 디아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두운 색깔과 윤곽선이 남아있었다. 1871년 모네는 네덜란드에서 돌아와 프랑스 아르장퇴유에 정착해 1878년까지 약 6년 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그곳에서 배를 한 척 마련하여 세느강을 오가면서 빛의 효과를 연구하였다. 이 시기에 모네는 특히 참신한 시각, 미묘한 분위기의 묘사, 강렬한 빛, 물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과 반사광선의 사실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 순수한 색채의 하모니를 구현할 수 있었다(모리스 세륄라즈, 1991).

10여년이 흐른 1883년 모네는 아르장퇴유를 떠나 지베르니(Giverny)에 집을 마련하였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63km 떨어진 마을이었고, 이곳에서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라고 칭했던 <수련>시리즈를 그리게 된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이사를 오는 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몇 포기의 꽃을 심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원을 가꾸기 위해 등나무, 버드나무, 대나무 등을 심시 시작하였다. 매일 정원사가 와서 정원과 연못을 가꾸었다. 심지어 연못에 핀 수련의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기 위해 물로 수련을 매일 씻었다고 한다. 모네는 정원 가꾸기와 그림밖에 그릴 줄 몰랐다고 한다. 1900년부터 모네는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고 1910년 이후 자신 만의 정원을 그리게 된다. 모네는 연못의 크기를 점차 늘리면서 자신의 작품 사이즈도 늘렸다. 그러나 백내장 때문에 시력이 약해짐에 따라 <수련>도 갈수록 흐릿해져서 물과 반사광이 혼합되어 형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모네는 1926년 12월 26일 지베르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 모네, <청수련>
모네의 <수련>

모네는 물을 사랑하여 배 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는 바닥이 평평한 배를 구입하여 배에 화실을 마련하여 새벽부터 저녁까지 많은 캔버스를 펼쳐놓고 번갈아가면서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1899년경부터 1926년 그가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지베르니 연못의 <수련>을 그렸다고 한다. 이 <수련>이야말로 모네의 예술에 있어 극치라고 평가하고 있다.

1900년~1926년까지 모네는 수백 점에 달하는 <수련>을 그렸는데, 윤곽선 없이 형태와 선이 수많은 색채에 의해 뒤섞이도록 칠하였다. 연못의 물과, 꽃, 잎이 뒤섞여 표현하고 있고, 원근법은 무시되면서 그려진 대상들이 추상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즉 모네의 그림의 진수는 '시각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세잔은 모네에 대해, "모네가 가진 것은 오직 눈밖에 없다. 그러나 얼마나 위대한 눈인가?"라고 말하였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자연을 탐구한 그의 결정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보여준다. <수련>연작들은 모네의 예술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자 이후 추상화의 길을 제시한 선구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랑쥬리 미술관에는 두 개의 커다란 타원형 방에 오로지 모네의 수련만이 그려져 있다. 두 개의 방 사이에 작은 문을 내었고, 가운데에는 관람객들이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타원형 의자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연못에는 흰색, 붉은 색의 연꽃이 피었다. 물과 연꽃은 분리되지 않았고 색채의 조화가 아름답다. 모네는 19세기 후반 파리 박람회를 계기로 소개된 일본의 우키요에를 좋아해 연못의 수련을 그릴 때 우키요에에 그려진 일본풍의 다리를 그려 넣기도 하였다.

연꽃은 인도에서 빛과 생명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중국에서는 군자, 선비의 풍모에 비유된다. 불교에서는 연꽃은 오랜 수행 끝에 번뇌의 바다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른 수행자의 모습에 비유되거나 극락정토를 상징하기도 한다. 민속에서는 연꽃이 씨가 많기 때문에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여 자수, 여자의 의복 문양으로 즐겨 쓰인다. 서양에서는 연꽃이 생명의 바퀴, 부활, 불사, 풍요에 비유된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