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람들이 아름다움, 자연을 지켜낼 줄 알죠"
[허영선이 만난 '사람'] 베트남 소설가 레 민 퀘
열여섯 소녀가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것도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현장을. 그가 본 것은 하노이 거리를 울면서 가던 아이들과 노인들의 피난행렬이었으며, 자식 아홉을 잃은 어미였으며, 포탄이 휩쓸고 간 거리의 냄새였다. 종군기자가 됐고, 소설가가 됐다. 기나긴 전쟁. 차마 소설로도 직접적인 전쟁을 건드릴 수 없다 했다. 너무 기막혀서 눈물이 안나왔다던 4·3의 슬픔처럼. 베트남전은 소설보다 더 리얼했으리. 레 민 퀘. 청춘의 시기, 포탄이 난무하던 전장을 누비던 하노이 작가. 한국사와 닮은 아픔을 간직한 베트남 전쟁의 상처. 깊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4·3이 여러번 스쳐갔고, 포개졌다. 얼마전 제1회 평화문학 국제포럼차 제주를 찾았을 때다. 레 민 퀘, 그는 선한 사람들이야말로 아름다움, 자연을 사랑할 줄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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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소설가 레 민 퀘는 1949년 베트남 하노이 남쪽 타인 화에서 출생. 본명은 브우 티 미엥. 16살(1965년)에 청년 돌격대로 전쟁에 참가. 참전 중 군사 기관지 「선발대」와 「해방」지의 전쟁통신원. 선봉지 종군기자. 1973년부터 1975년까지 해방라디오 기자. 1978년 베트남 문인협회 출판사 편집원 역임. 1968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1970년 첫 단편집을 낸후 10권 출간. 주요 작품집으로 「작은 비극」 「레 민 퀘 소설선」 「별 땅 강」 등 다수의 작품이 미국 스웨덴 이탈리아 독일 등서 번역 출판됨. 2008년 한국에서 주관하는 제1회 이병주 국제문학상 수상. 1987년에 베트남작가협회가 선정한 최고의 단편소설상을 수상했다. 그의 소설은 그녀만의 독특한 문체와 인간내면에 대한 진지한 탐구로,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평을 듣는다. 5월에 레 민 퀘 단편집 「머나먼 별들」이 국내 출간된다. | ||
레 민 퀘. 그녀는 단편작가다. 국내에선 단편적으로만 번역돼 생소하지만 그의 소설은 이미 세계 여러나라에서 번역, 출간되고 있다. 한국방문 세 번째. 마침 곧 그녀의 단편소설집이 이번 제주길에 통역을 맡아준 최하나의 번역으로 나온다.
1975년 베트남 중부 다낭시에서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그의 전쟁은 여린 감수성을 지배했다. 그가 19세에 쓴 첫 단편집 「머나먼 별들」은 베트남 중학과정 문학교과서에 소개가 되고,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 출판된 작품. 레 민 퀘. 전쟁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 전쟁에 뛰어든 열여섯 소녀
태어나서보니 전쟁이었다. 다섯 살, 토지개혁때 교사였던 부모를 잃었다. 친족에 남겨진 두 자매는 함께 자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열여섯에 청년돌격대로 전쟁에 참가한다. 두렵지 않았을까?
"어려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땐 전쟁이 굉장히 낭만적인게 아닌가 생각도 했었지요. 저희들은 거기서 전쟁속의 영웅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됐죠. 그 당시,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을 암살하려하다가 원만쪼이란 사람이 잡혀서 총살당했죠. 그 사람이 멋있었고, 영웅처럼 느껴졌던 때죠. 그의 죽음이 그 당시 몇십만명의 청년들을 군대에 가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포탄으로 부수던 굉장히 위기였던 때였으니까요."
그녀는 이미 전선에 나가기 전, 포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정리하는 일도 했었다. 미국이 마을을 포격하던 시기,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때가 열두살. 열아홉살부터 군사기관지의 통신원,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글로 써내던 레 민 퀘. 종군기자를 하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들. 많다. "B52기가 하노이를 폭격했을 때 피난민 중에서 아주 어린 애가 배낭을 메고 있는 것을 봤어요. 아버지는 전쟁터로, 어머니는 피난지로 가던 길이었죠."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국의 입장, 너무 무겁다. 그때 전쟁의 기저에 드리운 미국사람과 러시아사람들의 그림자였단다. "북쪽 같은 경우는 러시아 사람들, 남쪽은 미국사람들. 그렇지만 미국의 폭격은 굉장했습니다. 저는 북중부 쪽에 포탄이 많이 투하되는 지역을 다 겪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남부에 굉장히 무시무시한 감옥을 만들어냈지요. 직접 미국사람들이 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심문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미국사람들이 했습니다."
# 죽은자들 향 피우기 위해 어머니들 살아남았을 것
인간의 성격마저 바꿔놓는 것이 전쟁이다. 여럿의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경우는 더 힘들다. 그런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 여성들의 운명일까. 그런 점에서 베트남 여성들은 생명력이 강하단다. 그녀는 직접 봤다. 4·3의 상처를 견디는 제주여인들과도 겹쳐진다.
"어떤 어머니는 자녀 9명이 다 죽었습니다. 제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겁니다. 헌데 그 죽은 자식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살아나신 것이 아닌가해요. 베트남에서는 향 연기라는 것이 있죠. 죽은 사람들을 위해 향을 피우기위해서 어머니가 살아남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춘기시절 전쟁을 살았던 이 겁없던 여자. 하지만 아이를 갖고, 아이가 생기면서 무서운 것이 뭐라는 것을 알았단다. 이후의 트라우마는 없는 것일까.
"물론 두렵지요. 아무도 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지요. 저는 습관이라고나 할까요? 남들이 안가는 곳을 가고 싶어하는 것이 있어요. 귀가 멀면 총소리가 안들린다는 말이 있는데(웃음), 저는 굉장히 위험하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어요. 저는 군사 운송 수송 차량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거기 있으면 신났어요. 그렇지만 애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내장이, 창자들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자들한테는 전쟁이란 게 그런 것 같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냐는 거지요. 그때부터는 공격에 대해, 전쟁에 대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자식이 제게 평온이란 것을 생각하게 했지요. 그 전에는 두려운게 없었지요. 저는 혼자였으니까요."
# 베트남, 아직도 정신적으론 완벽한 통일 안돼
"실제로 베트남 내에서는 내전이 분명히 있었고, 미국에게 항미하는 전쟁도 같이 있었던 전쟁이었습니다. 어떤 가족들은 한 집안에 남북으로 갈려서 서로 싸워야 하는 집안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렇게치면 그런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가장 힘든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그 어머니는 양쪽 다 내 자식이고, 그 자식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운다는 것이. 그런 어머니가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런 집이 베트남에서는 상당히 많았습니다. 상당히 복잡하고 현재까지도 복잡한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산당이 싫다고 외국에 나가고, 어떤 사람은 국내에 있다가 사상이 틀리다는 이유로 서로 얼굴도 보고싶지 않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상처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사라지고 아물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레 민 퀘.
"40년이 지나고 나니까 젊은사람들과는 같이 어울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게 아마 한국과 다르겠지요. 한국도 예전에 그런 전쟁이 있었고, 시간이 오래 흘렀으니까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베트남은 양쪽 모두가 피를 굉장히 많이 흘렸었고, 그래서 그렇게 이룩한 통일입니다. 그리고 통일이 됐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통일은 현재까지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세대가 그런 것을 극복하고 국가를 건설하는데 힘을 모았으면 해요."
제주해녀들에게서 감명을 받았다는 이 종군기자출신 작가. 제주해녀들에서 베트남 여성들의 이미지를 본 것일까. "제주해녀들이 굉장히 강하고,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아요. 그녀들을 보면 한국의 여성들이 굉장히 힘들었다는 것이 보여요. 베트남 여성들 역시 옛날에도 힘들었지만 지금도 힘들어요."
# 문화가 세계로 알려진 다음 경제가 따라가는 것
"한국사람들에게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태도를 봤습니다. 제주도 풀밭에서 양도 보고 말도 보고, 나무가 있는 숲도 봤어요. 베트남에서는 그런 광경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베트남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주도가 평화를 상징할만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돼야지요. 아름다운 것을 지켜낼 줄 안다는 것.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문화가 세계로 알려지는 것처럼 문화를 알리고, 또 문화가 알려진 다음에야 부차적으로 경제가 따라가는 것 아닙니까."
제주4·3평화공원을 잠시 둘러봤다는 레 민 퀘. 전쟁의 슬픔은 여기에도 있었다. "기념관 내 시설은 베트남에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베트남에서도 학살이 있는 곳들이 있는데, 많이 지워버렸죠. 그런데 가봐야 젊은 사람들이 삶의 가치가 어떤지 알텐데. 제주사람들이 역사에 대해서 굉장히 책임감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의 친구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지요. 베트남은 전쟁을 30년 했고 굉장히 많은 학살이 있었습니다. 어떤 지역들은 굉장히 큰 사건들이 있었는데 지역사람들이 알기도 전에 지워지기도 했지요. 돌아가신 분들한테 참 잘못한게 아닌가합니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녀. 전쟁이 그녀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비로소 조용히 일을 하게 된 것은 1978년 문인출판사의 편집일을 하면서부터. 지금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현대 베트남 소설을 영어권에 소개하는 일도 활발히 하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하노이 거리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세계의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경제발전을 위한 대가를 치른다. 그러나 그들은 출발점이 잇고 중단점이 있다. 베트남에는 멈출 때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세계에서 하노이만큼 말할거리와 안타까움이 많은 곳도 얼마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어느 곳 사람들도 하노이처럼 문화의 역사에 무책임하지 않을 것이다."(수필 '하노이를 걸으며'중 일부)
그는 종종 홀로 옛거리를 걷는다. 하노이의 어지러운 거리. 역사의 거리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 그 거리, 야시장에서 맹인의 노래를 듣는 그녀, 슬픈 전쟁을 몸으로 겪어낸 그 작가, 레 민 퀘를.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