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역사와 혁명을 그린, 선구적 벽화가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7.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2012-06-04     전은자

▲ 록펠러 센터에서 철거된 벽화와 똑같이 그린 벽화
리베라 유학중 유럽의 현대미술 버리고 멕시코 민중 벽화가로 변신 
색채의 대비가 강렬, 외세에 저항하는 역동적 민중의 생명력 표현

명화(名畵) 중의 명화(名畵)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 교과서는 앎과 행함에 있어서 인생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래서 교과서에 수록될 내용이나 관점의 문제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감한 사안이 되고 있다. 교과서는 겉으로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텍스트가 되지만, 실은 역사의 평가에 대한 체제의 견해로 최종 표출된다. 교과서는 민중의 관점, 혹은 지배계급의 관점이라는 두 가지 목적에서 배회하게 된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민중을 위해 일했던 화가들을 수록할 수도 있고, 역으로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교과서는 문화투쟁의 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 어떤 화가보다도 피카소와 이중섭을 먼저 알게 되는 것도 바로 미술교과서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는 이데올로기의 집적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교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여간 힘들 일이 아니다. 

우리들이 서점에서 쉽게 접하는 서양미술사는 말 그대로 서양 중심의 미술사다. 현재 시중에 떠도는 서양미술사 통사는 대개 유럽과 미국의 저자에 의해 집필된 것이다. 그러니 제2세계나, 제3세계의 미술사는 거의 다뤄지지 않거나 소홀하게 다뤄진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 대상의 미술교과서는 물론, 미술대학에서까지 멕시코 혁명을 벽화로 그린 화가에 대해서 다루지 않았다. 멕시코의 3대 벽화가인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오로츠코를 소개한 적이 없다.

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 독일의 케테 콜비츠, 러시아의 일리야 레핀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이다. 1980년대는 한국의 민중미술운동이 전국으로 퍼지는 시기이다. 이때 소위 '명화(名畵)'와 함께 몰래 들여온 제2세계, 제3세계 민중화가들의 작품이 민중미술 화가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려졌다. 1980년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1920년대 멕시코를 닳은 때문일까. 제2세계, 제3세계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미술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하는 미대생들이 생겨났다.

▲ <멕시코의 역사>
멕시코의 혁명미술

19세기 초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외국자본과 대지주(大地主)의 지배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멕시코에 소개되는 미술은 여전히 유럽의 지배자 귀족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다. 아카데미도 여전히 유럽식 교육이 행해지고 있었다. 즉 정치적인 독립은 얻었으나 경제적인 토대가 불안했고, 교육, 예술 같은 상부구조는 여전히 지배자들의 입김으로 가득 찼다. 혁명전의 멕시코는 독재자 디아스가 34년 동안 지배하고 있었다.

1911년 멕시코 국립 아카데미 산 카를로스 미술학교에서 아카데미 교육을 개혁하고자 한 학생운동이 점화됐다. 학생운동의 리더는 이후 혁명가이면서 멕시코 3대 벽화가 중 한사람인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iros, 1896~1974)였다. 시케이로스는 마침내 학교 측에게 아카데미 교육 개혁을 위한 요구를 관철시켰다. 1913년에 시작된 멕시코 사회혁명의 화가로서 해골로 부르주아지를 풍자한 구아다르페 포사다(1851~1913), 호세 오로츠코((1883~1949), 시케이로스가 혁명군에 가담했다.

멕시코 혁명은 내전의 성격을 띠며 약 10년간 진행되었지만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중도에서 끝났기 때문에 '동결된 혁명'이라고 부른다. 멕시코 혁명은 정치혁명으로는 좌절됐지만, 문화혁명으로는 새 전망을 보이고 있었다. 1921년 혁명군으로 내전에 참가했던 바스콘셀로스가 문교부 장관이 되면서 멕시코의 벽화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혁명의 내전 기간인 1919년 잠시 파리로 건너간 시케이로스는 리베라를 만나 멕시코 미술의 방법과 앞날을 상의했고, 두 사람이 일치한 것은 멕시코에 벽화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당시 파리에 머물면서 입체주의 작업을 하던 리베라도 전망을 달리하여 유럽의 근대미술에서 멀어졌다. 이들은 유럽의 미술을 거부하고 멕시코로 돌아와 자신의 조상인 인디오 문화의 르네상스를 시작했다. 이 운동이 곧, '인디헤니스모에 의한 멕시코 민족주의 미술운동'이다. 두 사람은 1921년 미술가 조합(syndicate)을 결성하여 벽화운동을 전개했다.

"한 점의 벽화는 멕시코 역사를 열렬하면서도 경쾌한 어조로 찬양하는 글이 담긴 책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고 생각한 리베라는 공공장소에 많은 벽화를 제작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태어났다. 국립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호세 벨라스코에게 그림 지도를 받았다. 그는 첫 번째 유럽 여행 후  1911년 파리 몽파르나스에 살면서 1912년부터 후기 인상주의를 선호하여 입체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피카소, 모딜리아니, 몬드리안, 립시츠, 세베르니와 교류했다.      1914년부터 리베라의 작품에는 멕시코 고유의 소재가 등장한다. 1919년 리베라는 화가이자 혁명가인 시케이로스를 파리에서 만나면서 미술의 사회적 역할의 방향을 전환했다. 1921년 멕시코로 돌아온 리베라는 장 샤를로, 카를로스 메리다, 페르민 레부알타스타 등과 함께 최초의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이후 리베라는 멕시코와 미국에서 많은 벽화를 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그린 벽화로는 샌 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디트로이트 미술관, 록펠러 센터의 벽화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생전에 멕시코에서 유명해진 리베라는 1949년 1,200점의 작품을 가지고 국립박물관과 멕시코 미술궁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열었다. 

리베라의 부인은 여성화가인 프리다 칼로이다. 그녀는 독특한 화풍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리베라와의 결혼 생활 중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부터 자신의 고통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리베라의 바람기에 대한 분노와 상처, 유산의 아픔, 교통사고에 의한 육체의 아픔 등 자신의 삶의 경험을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는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리베라는 1955년 약 60,000점의 소장품으로 아나후칼리 박물관을 건립했다. 또 1954년에 타계한 부인 프리다 칼로를 위해 코이요아칸에 미술관을 만들어 헌정했다.     

▲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리베라의 벽화  

리베라의 벽화 중 명성을 떨친 벽화는 록펠러 센터의 벽화이다. 이 벽화는 1933년 벤 샨을 조수로 하여 그렸다. 그러나 리베라는 그 벽화에서 계급투쟁을 주제로 삼아 러시아 혁명의 주역인 레닌의 초상을 그림으로써, 미국 뉴딜 미술운동 공공사업촉진위원회(WPA)를 경악하게 하여 결국 벽화작업은 중지된 이후 철거됐다. 이에 대해 뉴욕의 진보적인 화가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리베라는 그 때 번 돈으로 뉴욕의 뉴 포커즈 스쿨에 착탈식 벽화 21장을 제작했다. 리베라 벽화를 철거한 록펠러 센터의 벽에는 자본주의의 <진보와 변영>이라는 생기 없는 내용의 주문 벽화가 그려졌다. 그러나 리베라는 그 이듬해인 1934년 멕시코로 돌아와 국립미술관(National Palace of Fine Arts)에 철거된 록펠러 센터의 벽화를 비슷한 크기로 제작했다(富山妙子, 1985).

리베라는 거의 모든 벽화에 멕시코 민족의 일상과 역사를 그려 넣었다. 리베라의 작품은 민중의 역사나 신화, 전설, 종교, 과학기술, 농업, 자연, 혁명과 투쟁, 농민봉기 등 멕시코 사회의 전반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의 창작 방법은 문맹의 민중이라도 알기 쉽게 민족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전통인 아스텍 문명 이후의 간결한 구성, 화려한 색채의 특징을 계승했고, 유럽에서 익힌 현대미술의 세련됨을 작품에 조화시켰다. 리베라의 작품에는 색채의 대비가 강렬하면서도 외세에 저항하는 역동적인 민중의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멕시코의 역사>에서 보여준 원시적 생명력과 혁명성은 이후 세계적인 거장으로서 리베라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 운동도 멕시코 혁명미술에서 일정 정도 자양분을 받았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