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간과 인권 존중할 줄 알아야 하는 것"

[허영선이 만난 '사람'] 역사학자 이이화

2012-06-07     허영선

 오로지 독학입니다. 물론 독학도 기본기가 있어야 하는 법. 아버지는 한국 주역의 대가 야산 이달 선생. 대둔산에 들어가 종일 아버지 한테서 한학만 배우다 학교에 가고 싶어 가출. 열다섯에 부산, 여수 등 고아원에서 고아 아닌 고아 생활했습니다. 당시 굴러다니는 책이란 책은 전부 삼켰지요. 생활고를 해결한 직업만 20여가지. 학벌만이 능사인 아, 한국사회! 작가를 꿈꾸던 그 소년, 결국 고교 졸업장 하나로 우리 역사학계의 거목이 됐습니다. 우리 역사 대중화의 상징, 재야 사학자인 그는 역사 저술로 먹고 삽니다. 과거사 진실,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도 주도했습니다. 질풍노도, 가열찬 삶. 이젠 책 쓰고, 대중강의하고, 나홀로 바둑 두며 목청껏 삽니다. 우리 시대 '프리랜서 글쟁이' 이이화. 제주4·3 강의차 온 그를 만났습니다.

   
 
 

 역사학자 이이화는

 1937년 대구 출생. 50여 년간 역사 탐구와 저술활동을 해온 역사학계의 거목. 15살까지 학교를 다니지 않음. 가출해 홀로 1955년 19살 때 고학하며 광주고 입학하고 졸업.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중퇴. 1964년 불교전문지 기자. 1967년 동아일보사 출판부 임시직으로 들어가 국사 및 국문학계의 저명한 학자들을 알게 됨. 1973년부터 「뿌리깊은나무」 등에 한국사를 대중적으로 풀어 쓰는 작업을 시작. 민족문화추진회, 서울대 규장각 등에 봉직.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 소장, 기관지 「역사비평」 편집인 등. 한국통사 「한국사 이야기」(22권)를 비롯해 「허균의 생각」,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 열전」, 「인물로 읽는 한국사」 최근에 낸 「처음만나는 우리문화」 등 저서 수십종과 논문. 한국전 이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상임대표 역임.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 등.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2001년 단재학술상 등 수상.

 
 
이이화. 제주도 역사의 가치를 매우 일찍 발견해낸 역사학자이자 저술가, 역사운동가. 작은 몸, 맑은 눈, 우렁찬 목소리. 그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역사 강의는 쉽다. 구수하다. 익살스런 독특한 입담. 술 마시면 더 술술. 객석의 웃음소리 몇 번 쏟다보면 끝난다. 역사가 이런거야? 단군왕검은 왜 뾰족한 빗살무늬토기에 밥을 지었을까? 역사를 문화에서 분리해 놓으면 역사관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읽는 정직한 눈이란다.

 역사 속의 민중들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삶에 주목하는 휴머니스트 이이화. 시대정신 속에서 역사를 보는 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물었다. "우리의 뿌리지요. 인간과 인권을 존중할 줄 알아야하지요. 더불어 살줄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 제주, 압박 받았기에 의식 깨어

 "근현대사에서 제주도는 식민지 겪으면서 일반적인 수탈 착취의 대상이 됐지만 정서적으로 일본에 가깝기도 해서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갔잖아요. 성공한 사람들 많고. 서울사람들이 제주사람들을 깔봤잖아요. 조세 공물 특산물을 가져 갔고. 제주 어민들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냐하면 김이 없으면 육지 완도 같은데 가서 가져다 바쳤잖아요. 일제시대, 해방공간에서 양면성 같은 것을 미묘하게 가지고 있었던 곳이 제주도예요. 어떤 점에서는 압박을 받아야 의식도 깨는 거야. 제주도가 얼마나 중앙에 압제를 받고 차별을 받았어요? 제주사람 벼슬 안시키고, 육지에도 못 나오게 했으니 말이 되는 소리야?"

 오래전부터 제주도에 대한 애정을 기울여온 그는 제주도를 깊게 이해한다. "오랫동안 제주도가 중앙에서 여러가지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야한다, 독립심을 쌓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지요. 육지를 믿어선 안된다. 독립국가 설도 나오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내가 제주의 역사인물 양재해를 발굴한거야."

 연구자들이 없을 때, 일제 식민지부터 모순과 탄압을 받으면서 살아온 제주도. 그 섬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이이화. 그의 개인적인, 역사가로의 소신은 나라가 잘못하면 저항해야 된다는 것. 제주 4·3도 그렇게 단계적으로 여기까지 왔고, 성공한거란다. "민주화 과정에서 4·3을 갖고 얼마나 싸웠어. 다른 과거사에 비해 제주도는 잘 된거야. 사건이 제일 컸지만. 제주도가 가장 저항이 컸어. 모두가 단합했으니까."

 허나 4·3의 길은 멀다는 생각이다. "인류의 전쟁을 반복하지 말고자 하는 것이지. 진정한 평화를 하려면 상대 이해도 필요한 것. 일방적으로 가면 깨져요. 그런 속에서 제주 4·3 아픈 것은 진정한 평화, 인권존중 운동사상과 연계해야 한다 하는 것이지. 무엇을 제시할 순 없지만."

 # "역사는 종합적인 것…문학에 빠진 것 도움"

 한문만 공부하던 아이. 동네에 내려오니 소설책이 잔뜩 있었다. 곧장 문학에 빠졌다. 이광수 「사랑」 「청춘극장」, 심훈 「상록수」 이런 것들. "해방공간에서 나온 것들을 갖다 무조건 읽었지. 고교시절, 카뮈, 톨스토이, 카라마조프 좋아할 때야."

 열한명의 남매 가운데 다섯째. 아버진 주역 팔괘의 하나인 이(離)자를 넣어 이화(離和)라는 특이한 이름을 주었다. 총명한 아이, 신동 소리 들을만했다. '사서'를 뗐지만 아버진 학교에 가면 '일본놈'이 된다며 보내지 않았다. "가풍이 너무 엄격했어. 아버진 오히려 부드러웠어. 양반가정이란게 그리 좋은게 아니라니깐. 아버지는 유학자라도 족보도 만들지 말라고. 직계만 알면 된다고. 주역이 참신하다고. 아이들한테 교육도 자유롭게 해버렸어. 나는 고학하고 돌아다니고."

 홀로 가짜 중학교 졸업장을 만들어 명문 광주고 시험을 치르기까지 그의 생은 처음부터 독학, 그 실력의 바탕은 한문이었다. 팔삭동이, 허약한 몸으로 풍진 세상을 일찍 경험한 아이. 절절 가난하던 소년은 신간이 나오면 책방에서 눈치 보며 책을 읽었다.

 그의 역사책은 쉽다. 문학적 글쓰기, 한문실력, 교열과 해제 작업 통한 원전 자료 통독 등이 전업 역사저술가로서 입지 조건을 두루 갖추게 한 비결이 아닐까.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조선시대사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해방공간의 분위기를 익히는 도움을 받은 그의 스승은 책이다. "나중에 역사를 종합하는 데는 한문이라든가 문학에 빠진 게 도움이 됐지. 역사는 종합적인 거잖아요."

 "요즘 교보문고 같은 데서 아이들이 앉아서 쓰고 읽는 게 보여. 그러면 그게 지금 부럽지." 

 # 주입식 역사교육, 가치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젊은 이이화의 한문실력이 소문나기 시작한 것은 30대. 동아일보 출판부와 색인실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책을 만들 때. 쟁쟁한 학자들과의 교류가 시작됐다.
이이화. 얼마나 우리의 민족사, 생활사, 민중사를 풍부하게 했는지 그가 낸 방대한 양의 저술에서 드러난다. 1995년 집필을 시작해 2004년 완간한 「한국사 이야기」는 그의 필생의 역작.

 우리문화의 해설도 엉터리가 많다는 그는 가령, 왕릉이 크다, 위대하다, 화려하다가 중요한 게 아니란다. "경복궁에 돌멩이 울툭불툭 벼슬아치들이 달려가지 못하게하려고 했다. 말도 안되는 얘기. 자연과의 조화라든가 검소하게 대리석을 깔지 않은 것을 얘기해야지. 경복궁은 나무가 수두룩해. 물굽이도 틀지 않고. 과학이 역사와 연결되는 것이지. 왜 가치가 있느냐가 중요한 거야."

 역사를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는 그는 주입식 우리 역사교육을 우려한다. "달달 '태정태세 문단세…' 같은 왕의 이름 나열부터 시작하잖아요. 입시에 연대를 묻는 문제가 왜 그리 중요해요?"

 # 제주도, 평화의 섬 설정 잘해…해군기지 막아야

 제주도. 평화의 섬 설정은 잘했다고 보는 이이화. 허나 제주해군기지 문제는 다르다. "오키나와도 그거야. 제주섬은 4·3도 겪었고. 이곳은 평화의 섬 지켜야돼. 그런 것이 들어옴으로써 상징적인 의미에서 평화이미지 깨지는 거야. 돈도 들어오고 가게도 생기고. 다 헛소리야. 막아야돼. 현실적인 얘긴데 제주에 엄청난 중국 동남아 사람들이 온다고. 해군기지 이런것 보러 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연경관 역사유적 이런 것을 보러오는 것이지."

 4·3공원에서 이어진 대화는 국수거리의 막걸리 한잔 놓고도 이어졌다. 역시 술 한잔에 더 술술. 김정기 전 제주교대 총장과의 인연 등으로 제주도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그는 요즘 대필 세태에도 꼬집는다. "박사논문이나 저술 또는 자서전마저 돈을 주고 사서 내는 이른바 대필은 표절보다 더 비양심적인 거여. 이런 자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고,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어린시절부터 혼자서 노는데 익숙한 그는 고수급 바둑 애호가. "정식 6단 받은 사람하고 해서 이기고 올라왔어." 바둑 대목에서 그는 행복해 보인다. "바둑을 내가 아주 좋아하는데 오늘 세계여자바둑대회 일본하고 한국이 붙어. 막바지 들어갔어. 아직 안끝났어." 이야기 도중에도 그의 관심사 한쪽은 바둑에 가 있었다.

 술, 바둑, 글쓰기, 읽기가 전부인 그의 삶. 풍상을 겪고도 명랑한 삶을 살아온 그의 앞엔 아내가 있었다. 장서로 빼곡한 그의 집필실. 그 아내가 마련해준 그 곳에서 이젠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참 은퇴할 나이지만 독일 유학간 딸 학비대려면 돈 벌어야돼. 꼭 필요한 강연은 나가." 아들은 '불청객'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이응일.

 매달 원고지 250장 정도 쓴다는 이 원로 역사학자. 그의 저력은  어디서 오는가. 남 탓 안 하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라는 성격에서 오는 건 아닐까. 잠시만 그와 대화를 해보면 안다. 그의 에너지를. "담배는 일주일 끊었다가 다시 피우고, 술은 좋아해. 대중적이라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노래방이야."

 무엇이든 과도하면 안된다는 그는 제주 환경도 파헤쳐 놓기 시작하면 금이 가기 시작한다고 본다. "너무 잘 살면 오히려 타락해. 적절하게 배분하는게 중요해. 조절이 굉장히 중요해. 쓸데없는 건물 짓지말자. 약간 불편해도 올레길도 만들어주자. 아파트만 다 좋은 게 아니다. 상식적인 절제가 중요하죠. 절제 안하면 하나하나 금가고 깨지게 돼. 제주도 전체가 인공으로 만들어지면 안되지."

 인생을 살다보면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겠만 「한국인권사」나 「한국여성사」를 마무리 짓는 일에 힘을 쏟으려 한다는 이이화. 아직도 그의 꿈이 보인다. 역사가로서의 길, 힘든 이들에게 용기가 되었으면 하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