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여, 내리사랑만 받았지, 치사랑은 못하였구나

[허영선이 만난 '사람']산악인·한라산 화가 소산(素山) 안흥찬

2012-07-19     허영선

 내리사랑은 있었으나 치사랑을 못해 미안하다 했다. "한라산은 나의 수호신이다. 연인이며, 부모다. 수양의 도장"이라 했다. 깊은 연모는 바다처럼 한도 끝도 없다. 연애도 이만하면 지칠만하지 않는가. 산과 하나가 되어 한 생이 흘러갔다. 산의 영감에 기대 붓을 들었다. 산이 그리라했으니 그린다. 등반 50년 제주산악사의 산증인, 한라산 전문 화가. 눈을 뜨면 한라가 있고, '몽중한라' 꿈결에도 한라가 일으키면 붓을 든다는 이 '산 하르방' 소산 안흥찬. 그럼에도 자신은 산꾼이지 미술인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이 겸허. 그림으로 왕관릉도 오르고 백록담에도 서 본다. 언젠가 오르지 못할 그 황혼무렵을 위한 흑백의 화폭. 그를 만났다. 장맛비 속에서도 그는 힘차게 '도상등반'을 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젊은 산처럼 파랗다. 그의 소산산악관에서.

 # 등반로 개척…안전대 조직 생명 구해

 1930년 제주시 출생. 조천초등학교, 제주농업학교 졸업. 1961년 제주도 적십자사 산악안전대 창립위원·제2대 안전대장, 1964년 제주 산악회 창립 2대 회장, 1968년 사단법인 대한산악연맹 제주도연맹 초대회장, 명예회장 고문 역임, 1974년부터 대만 옥산, 백두산, 일본 북알프스. 히말라야 트레킹(알파트 히말라야) 등. 1979년 한라산 묵화전을 시작으로 고상돈기념사업회 기금마련을 위한 한국일보 초대전(1985), 등반 40주년 기념전, 한라산 연구소 초대전 등 10여회의 개인전. 1985년 한국서화작가협회전 한국화 부문 최우수상, 1986년 한·불 수교 100주년 기념 서울국제미술대전 입선. 2008년 제주시 연동 자택 뜰에 2층 작업실을 겸한 소산산악관을 개관했다. 제주등반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등산장비, 신문스크랩 등 각종 소중한 자료들과 그의 한라산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지난 4월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50인의 산악인에 선정됐다.
   영산 한라. 겁없이 도전했다. 1957년 군제대 후였다. 와서 보니 직장도 없고, 갈 데가 없었다. 4·3으로 입산통제됐던 한라산은 그제야 가슴을 열고 있었다. "일제때 숯 운반 다닐때 본 한라산, 열 다섯에 봤던 그 한라산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 농업학교에서 일년에 한번 연중행사로 등산했는데 나는 관음사까지 밖에 갔다오지 못했지. 처음 고백이야(웃음)." 도대체 한라산이 어떤 신비의 산일까. 알고 싶었다.

 나침반도 등산로도 없던 50년대 말. 밤엔 별 나침반을 보고 산을 올랐다. 그보다 한달 늦게 제대한 '오름나그네' 김종철 선생과 동반했다. 11월. "산은 너무너무 신비하고 신령스러웠지. 이대로 가다가는 조난자들이 많이 생기겠다. 등산로를 만들자." 산악안전을 위해 리본을 만든 것도 그때였다. 젊은 그들이 결성한 적십자 산악안전대. 국내 최초였다.

 "구조? 수없이 많이 했지. 탐라계곡에서 대학생이 급류에 휩쓸려 죽은 것을 순사 몇과 김종철 선생과 같이 가서 들것 만들어서 들고 오고. 조난자 안내하고. 우리가 습득한 실력으로."

 생명의 가치와 봉사의 기쁨을 준 시간이었다. 허나 산은 슬픔을 주기도 했다. 한국을 여덟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으로 선사한 고상돈의 사고사를 들은 날은 기가 꽉찼다. 이불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그보다 먼저 산의 별로 떠난 산사나이들, 김종철 부종휴 강태석 고상돈 오희준. 어떻게 잊겠는가. 산도 원망스러웠다. "이놈도 나를 버리고 가버렸구나. 산신령이시여, 안흥찬이가 그렇게 밉습니까? 가까운 사람들을 어찌 먼저 데려가십니까." 어쩌면 신앙도 산도 같은게 아닐까. "산을 모르고 가면 무모한 일, 사고를 당해도 자연의 책임 아니다. 인간 자신이다."는 소산.

 철쭉제를 처음 시작할 때였다. 홀연 광풍. 간곡히 산에 기도를 드렸다. 10년간 그가 산악회 회장을 하면서 철쭉제하는 동안 날씨는 청명했고,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서북벽에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사람에 밀려서 4시간이 걸리던 시절. 백록담에서 목탁소리 나고, 목사가 와서 설교하고,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지내야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 일제강점기, 비행장 공사 동원도

 어려서 묵화를 좋아했고 의사가 꿈이었던 아이였다. 일제강점기, 반일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그가 다니던 조천초등학교의 교감이었다. 연단에 올라 황국신민의 선서만해놓고 입을 떼지 못한 아버지를 두고 '바보다'했다는 아들. "커서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의 소년시대 역시 가혹했다.

 전쟁말기, 정뜨르 비행장 활주로 공사의 근로봉사에 농업학교 학생들도 동원됐다. "오전엔 수업, 오후는 비행장 건설 근로봉사를 하면서 반쪽 수업을 받았지요. 잔디를 깔아야하는데 잔디가 없어서 오름의 봉분에 입힌 잔디까지 캐야했어. 그때 도랑을 파고, 잔디를 메우는데 학생은 한사람이 사방 20㎝ 잔디 스무장씩, 일반인은 서른장 매일 심었어요."

 뿐인가. 탱탱 얼어붙은 겨울, 한라산 관음사까지 가 시내 군부대까지 숯을 운반해야 했다. 당시 한 일본 상사가 일본은 얼마없어 망한다. 전쟁은 다 끝났다하는 것을 들었던 적도 있단다. "겨울인데 손을 넣지 못하도록 바지 호주머니까지 꿰매버렸지, 발은 눈이 들어가 동상걸리고. 군인하고 제주도민하고 같이 죽는다고 했어."

 잡곡 섞은 두홉이 하루 식량. 빵 배급을 해주는데, 칠성통 빵집에 가서 빵 두 개씩을 타먹던 시절의 예화. "학교에서 학생들이 저녁 일곱시 지나 빵집 가보니 빵이 없어. 시위를 했어. 칠성통에서 빵 내놔! 빵 내놔! 순사들이 잡으러 왔어. 나는 키가 작아서 싹 빠져 도망갈 수 있었지." 그러곤 곧 해방.

 태어난 지 3일 만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던 그는 급우들 사이에서도 승인된 학생 종교인. 4·3의 도화선을 목격하였고, 우여곡절 속에서 살아났다.

 # 그를 키운 두 어머니, 아내의 내조

 낙향 3대. 그의 생의 길엔 세 여자가 있다. 광주에 살던 그의 생모와 어머니의 벗이었던 양어머니 최정숙 여사. 서예를 잘하던 아버지가 마흔에 병으로 세상을 뜨자 어머닌 갖은 고생을 했다. "제주북교 6회 첫 여자 졸업생이었던 어머닌 바느질도 하고, 6남1녀를 키우려니 대단한 분이셨죠."

 그를 가슴으로 낳은 양어머니 최정숙은 평생 독신이었던 제주 초대 교육감. 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 신성여학교 교장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이다. "사람들이 뭔가 많은 것을 가졌으려니 생각하지만 집 한 채 없었죠, 돈 없는 사람들, 부두 노무자들 전부 공짜로 정화의원에서 진료했지. 판사의 딸이었으나 돌아가시며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학교에서 월급을 타지 않고, 병원에서도 거의 돈을 받지 않고, 아무것도 없었죠. 단벌 통치마 저고리로 살았지요. 커서 그것을 깨달았어요. 갈칫국 올라오면, 어머니 몰래 고기를 내 국에. 할머니는 또 고기를 당신 딸 한테 주었는데…." 울컥 치미는 기억, 결국 그가 울먹였다. "어머니의 그 영향, 교회 하느님의 가르침, 산에서 얻은 것. 이것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해."

 또 한 여자. 지금까지 내조 해준 아내 김정희가 없이는 그가 없다. 길지 않은 그의 직장생활이 못미더워 아내는 정년까지 학교(신성여고)에 나가며 3남1녀를 키워냈다. 그녀는 지금도 또 하나의 산이다.

 # 미술인 아닌 산꾼…산이 그리라해서 도상등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리는 것. 내가 좋아하는 한라산의 풍광은 백록담 삼각봉 장구목 왕관릉 선작지왓 다정스런 한라산의 모습이지. 내가 오르지 못한 산은 모르잖아. 히말라야 그런 산은 그때 뿐이지. 한라산과 정들었으니 그거 하나다. 내가 갔다온 지점을 환기시키고 머리에 각인하자. 죽을 때까지 등반하는 기분으로 살자." 등반 50년. 등반 1000여회라 해도 좋고, 아니라해도 그만. 그림은 70년대부터 그렸다.

 정식 교육받지 못한 그림이라는 소리를 화가들에게서 듣자 슬그머니 몇차례의 전람회에도 출품,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한 소산. 화선지에 먹을 쓰는 전통 기법이 아닌, 곧바로 캔버스에 먹을 쓰는 대담한 터치. 고상돈 기념사업회 기금마련을 위한 한국일보 초대전에 온 운보 김기창 선생은 재미있는 그림이라했다.

 파란만장, 산생활. 몸은 비록 따르지 못한다해도 붓으로 기록하자. 아니다. 산이 그에게 그러라했다. "이 그림도 꽤 오래된거. 지금 보면 그때 그림이 좋아. 표현이 잘못돼도 평생 혼이 들어간 것 같아. 이젠 머리에 있는 것 꺼내서 하는 거주."

 늙어서 취미가 있어야 한다는 소산. "만약 내가 이것을 하지 않았으면 우울증에 걸렸을 겁니다. 산이 내게 한없이 베풀어준 은혜로 나는 살았어. 80 지났으니 '산 옹' '산두루외'(산에 미친 사람) '산 하르방'이라고 말해도 좋아. 자연에게서 배운 것은 겸손인데 난 아직도 겸손하지 못해. 사람이니까. 검으니까 조금씩 검은 때를 벗는 과정이야. 그런데도 완전히 때를 벗진 못해."

6년전까지 한라산을 쉽게 오르내린 이 산 사나이. 한라솜다리가 어디 있는지도 알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사람. 곧 훼손될 게 뻔한 일. "사람들이 산에 다니니 마당에 한라산 나무가 많을줄 알아. 식물도 꽃집에서 사다 놔도 오해하니 한라산 수종은 정원에도 없어. 오해할까봐. 난초도 사온 거. 돌도 눈으로 보지 가져오지 않아."
 

   일주일 전, 대피소 지은 것 보시라고 해 모노레일타고 삼각봉에 갔다왔다는 소산. 너무 좋았지만 따끔한 한마디. "산이 진한 화장한 여인처럼 너무 손대니까 아니야. 데크 만들고, 자연미가 없어. 산신령도 좋아하지 않을거야. 안전을 위해선 좋은데. 자연은 자연다워야 해."

   한때, 케이블카 반대 서명 받으러 전국 일주했던 그는 간혹 1인시위하고 싶을때도 있다. "보호할 곳은 철저하게 보호하고, 개방할 곳은 신중하게 환경에 어울리게 개발했으면 해. 바다 매립한다는데 정말 큰 일이야. 자연은 당대의 것이 아니야."

 산에게 치사랑을 하려니 아파버렸다. 네차례의 수술. 설암을 극복한 그는 그림으로 갚으려한다. 욕심인가. 살아서 딱 하고 싶었던 일은 몇가지. 등산학교와 산악박물관, 고상돈 기념관이다. 이젠 하나 더 추가됐다. 오희준 기념사업회에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것. 그는 요즘 연필로 한라산 소품도 그리고 있다. 한라산 시를 넣어서 시화전도 하고 싶다. 산의 뜻이라면 그 꿈 받아주지 않을까.

 한없이 거룩하고 장중한 산과 물과 바람과 그림에 현혹된 세월. 그렇게 산에 들었던 산 사나이 안흥찬. 이 산옹의 마음은 이미 산에 들었으리. 수직의 암능, 주목의 군락, 산의 빛과 어둠, 아침과 저녁, 한라를 물들이는 노을과 구름과 새와 꽃과 고사목에. 그리고 먼저 산에 든 사람들에게.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