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숨결로 대자연의 웅혼함을 그리다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30. 터너의 <눈보라-항구입구의 증기선>

2012-07-23     전은자

터너는 미술의 역사상 가장 많은 여행,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
주관성, 아카데미 경직성 버리고 개성 강조한 낭만주의적 표현 방법

영국의 낭만주의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가 들라크루아라면 영국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는 윌리엄 터너(W. Turner,1775~1851)이다. 낭만주의는 18세기말에서부터 19세기 중엽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 경향으로 개성과 주관성, 자유, 자율성, 감성, 비합리성을 강조했다. 이 낭만주의 운동은 18세기말 당시 고전주의에 반대하고 합리주의·유물론·계몽주의 등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또한 낭만주의는 당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 온 두 개의 혁명, 즉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 아래 기존의 모든 권위와 제도 및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에릭 홉스봄은 낭만주의 시기에 일어난 이 두 개의 혁명을 이중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이중혁명의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예술이 번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음악가로는 베토벤, 슈베르트, 베르디, 바그너, 만년의 모차르트, 문학가로는 장년기의 괴테, 젊은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 발자크, 화가로는 고야가 있다. 영국 낭만주의 제1세대 문학가인 블레이크, 워즈워드, 콜리지와 영국의 두 거장 터너와 콘스터블은 낭만주의의 시기를 빛낸 대표적인 화가이다. 당시 낭만주의가 추구했던 개성, 자율성, 자유 등은 오늘날의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낭만주의가 출발하는 시기인 18세기를 근대의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4.5x58.8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1798.

터너의 생애

윌리엄 터너는 1775년 런던의 시외 지역에서 이발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가 되던  1785년에서 1786년까지 작은 아버지 집에 기거하면서 영국의 목가적인 자연 풍경을 그렸고, 이때 그린 작품에 최초로 사인을 하는 등 조숙한 천재의 자질을 보였다. 14세에 자연 풍경을 그려 '옥스퍼드 스케치북'을 만들었고, 이후 4년 동안 왕립 아카데미 부속학교에 다녔다.

1790년 15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건축화를 그린 수채화를 첫 출품한 것으로 보아 이때 건축화가 토마스 맬턴에게 사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794년 19세에 정신과 의사 토머스 먼로 밑에서 다른 화가의 작품을 약 3년 동안 모사(模寫)하는 등 수채화 공부에 열중했다. 1796년 왕립 아카데미에 수채화 10점과 첫 유화작품 <해상의 어부>를 출품했다. 24세에 왕립아카데미 준회원이 됐고, 27세가 된 1802년 2월에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7월~10월 아미안 평화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와 스위스 등 유럽 대륙을 처음 여행했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스케치를 했다. 1804년 정신병원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택을 뜯어 고쳐 자신의 작품 전시를 위한 터너 화랑을 열었다.

1807년 32세가 되던 겨울 왕립아카데미 원근법 교수로 취임해 1837년까지 약 30년을 근무했지만 강의는 단지 10여 회에 불과하였고, 그의 강의는 난해하기로도 유명했다. 1817년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1819년에는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1823년 세인트 탬즈 궁을 장식할 <트라팔가의 해전>의 주문을 받고 작품을 제작했다. 1827년 52세에 페트위스에 있는 영국 최대의 귀족이며 콜렉터인 에그리 몬트 백작의 저택을 방문했다. 이 에그리 몬트 백작의 집에서 당대 이름난 화가로서 경쟁자이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콘스터블을 자주 만났다. 1833년 8월에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인 들라크루아를 만났으며, 베를린, 드레스덴, 비엔나, 베네치아 등지를 여행한 후 영국으로 돌아와 베네치아를 주제로 한 유화를 왕립 아카데미전에 출품했다. 이듬해에 바이런의 시집에 삽화를 그렸다.

1836년 61세에 터너가 발표한 <줄리엣과 그 유모>라는 작품에 평론가들의 혹평이 쏟아졌다. 당시 17세의 젊은 평론가인 러스킨은 터너의 작품을 옹호했다. 존 러시킨은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평론가로 1819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고 건축과 장식 미술 분야에서 고딕 예술 복고 운동을 전개했던 이론가이자 저술가였다. 그가 주창한 '민중생활공예론'은 당시 부상하는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미학을 대변한 것이었다. 러스킨은 1843년 자신이 쓴 『근대화가론』제1권에서 터너의 작품을 찬미했다. 터너는 70세가 되던 1845년 유럽미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뮌헨을 방문했다가 곧 귀향하여 7월에 왕립 아카데미 원장 대리직을 맡았다. 1848년 런던의 국립화랑에서 처음으로 터너의 작품전이 열렸다. 1851년 12월 19일 76세를 일기로 터너는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 <카르타고 제국의 멸망>, 캔버스에 유채, 170x239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1817.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라지는 단 한 번의 풍경

터너의 말기 작품은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폭풍의 역동성으로 넘쳐난다. 이런 터너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인상파의 기원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또 추상화의 시작으로도 평가한다.

사람들은 흔히 터너를 말할 때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터너는 미술의 역사상 가장 많은 여행을 한 화가이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이다. 그는 유럽 대륙을 수차례 다니면서 2백 권 이상의 스케치 북과 1만 9천점의 데생을 그렸다.

둘째, 터너의 재능은 어릴 때부터 나타나 27세의 청년기에 영국 왕립아카데미 정회원이 돼 명성과 부를 함께 누렸다. 한 살 아래인 콘스터블이 53세가 돼야 비로소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된 것을 참작하면 터너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나타난 것이다.

셋째, 터너는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이성관계가 복잡했다고 알려졌다. 어머니가 정신병자였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불행했고 부를 누렸으나 돈에 매우 인색했다고 한다. 평생 정식 결혼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정신병자였던 어머니의 환상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인물화나 자화상이 극히 적은 것에 대해서는 인물 데생이 부족한 까닭이라거나 코가 너무 커서 항상 큰 코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꼈다는 설이 있다.

터너가 풍경화에 몰두한 것은 영국의 기후적 풍토와 관계가 깊다. 지리적으로 북반구에 속하는 영국은 봄과 여름에는 훈풍이 불어오지만 겨울이 되면 폭풍을 동반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터너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풍경, 한번 밖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현상을 봤고, 그것이 빛의 숨결로 나타났다. 특히 겨울 폭풍을 동반한 바다의 풍경은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모습 그 자체이다.

터너의 <노예선>은 낭만주의 화풍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던 영국의 시대적인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노예를 실어 나르는 배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면 죽은 자나 빈사 상태에 있는 노예들을 그냥 바다에 던져버린다. 터너는 이런 인간의 비극적 운명, 허무한 생명에 대한 비참함을 태풍에 파괴되는 노예선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 <눈보라-항국 입구의 증기선>, 캔버스에 유채, 91.5x122cm,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1842.

말년에 이르러 터너는 폭풍 치는 바다가 크게 꿈틀거리며 돌아가는 동심원 구도를 탄생시켰다. <눈보라-항구 입구의 증기선>은 1842년에 그린 작품이다. 터너는 이 작품에 '얕은 바다에서 서로 신호를 보내며 지시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터너는 "나는 에어릴 호가 하리치 항을 떠나는 날 밤 태풍 속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유럽 대륙 여행을 위해 수없이 배를 탄 경험이 이런 그림을 낳게 한 것이다.

터너가 이룬 성과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객관적 사실의 묘사보다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성의 창조에 있다. 바다 풍경이지만 뚜렷하게 그리지 않아 심지어 바다와 하늘, 증기선이 서로 엉켜 하나가 돼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말년의 터너의 화풍은 감성에 호소하고 색채에 의존하게 되면서 점점 추상적으로 변해갔다. 화면에 그려진 사물들의 구분이 없어지자 관객들은 미완성작으로 여겼고, 난해하다는 비난까지 했다. 그럴수록 터너는 그림에 설명을 충실히 했지만 허사였다. 이런 주관성의 표현은 기존의 아카데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개성적인 표현으로 낭만주의 화풍에 걸 맞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낭만주의는 프랑스에 앞서고 그 기원을 터너에게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터너 자신은 추상주의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은 20세기 현대 추상화의 길을 열었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