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대립 넘어서서 인간이 우선인 세상을"
[허영선이 만난 '사람'] 오사카제주도연구회장 양영후
식민의 시대, 네 살에 부모따라 현해탄을 건너야 했던 고향이다. 고향? 오래 살아야 고향이 아닌가. "젊은 시절부터 인간적인 신뢰감과 함께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이철 선생한테 고향을 얘기하라하시면 물에 잠수하러 가면 어떤 바위에 가면 고기가 있다하는 것이 다 기억이 난다. 이것이 고향이라 했는데 나는 그것이 없다는 거지요." 오래도록 재일의 생활사를 연구하고 있는 오사카제주도연구회장 양영후. 그는 제주어를 맛깔나게 한다. 그런데도, 팔순이 된 지금도 그는 자신의 모어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제주사투리로 갈 것인가, 성장하며 섞여서 써온 일본말인가 거기 결론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제주에서 그를 만났다. 50여년 교육자로서의 삶, 재일의 삶을 실어낸 그의 어조는 조용하면서 겸허했다.
귀화문제? "요새는 수월해요. 고민 안해요. 일본정부도 잘못이 있거든요. 1952년에 일본이 독립할 때 당시 한국인 조선인 국적을 국제법을 적용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게 해왔거든요. 그래서 요즘은 특별체류 허가다하는데 뭣이 특별이냐? 귀화도 신청하면 범죄 경력이 없으면 거의가 다 나와요. 자라서 귀화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고 귀화해서 조선이 아니라고 해서 동포가 아니냐는 말은 아니지요. 그렇게 간다한들 너의 뿌리와 피는 동포가 아니냐는 거지요." 귀화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란 말씀. 요즘 청년 연수를 할 때는 귀화해도 다 같이 교육한단다. 귀화하면 일본사람이지만 귀화해도 우리 국민이라는 거다.
# 4살 때 어머니따라 현해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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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제주도연구회 회장 양영후는 1930년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출신. 4살 때 도일. 오사카제주도연구회 회장. 관서대 비상근 강사. 관서대 인권문제연구소 특별연구원. 1951년 관서대 전문부 졸업. 이쿠노구 초급학교 교장, 이쿠노구 미나미초중급학교교장 역임. 미나미 오사카 초급학교 교장. 오사카시립 니시이마자또 교원. 1975년부터 1984년까지 효고현 아마가사키 공고 조선어 교사, 조선어와 사회교육개혁과 인권론 주로 강의.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회장. 저서로는 「재일 조선인의 민족교육」(공저), 「오사카에서의 4·24교육투쟁 각서」, 「전후 오사카의 조선인 운동」. 현재 「재일조선인교육사론」을 쓰고 있다. | ||
"오사카에 제주인들이 집단 거주한 이쿠노구란 노동자의 부락이었죠. 노동자가 들어가기 전 연동식 집을 지어서 임대 했어요. 처음에 월세로 동포들이 들어갔지요. 노동자 집으론 보통수준인 곳이죠. 제주출신 김문준이 만든 '민중시보'에도 생활상이 많이 나오죠. 근화유치원이라고 제주분이 차린 곳이 있었는데, 1930년대 제주출신 동포 아이들은 거기에 많이 갔었지요."
특히 법환리, 조천, 함덕리 부모들의 교육열이 높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가 소학교 졸업반 때 그의 담임은 기술교육을 권했다. "허나 부모님은 역시 일반 학교를 가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된다며 일반 학교에 보냈어요."
일제강점기, 제주시대와 일본 시대는 닮았다. 두 나라 배경만 다를 뿐, 학생 근로봉사대란 이름으로 학생들도 노동에 동원돼야 했다. 전후세대의 학생들 표정은 아마 많이 닮았으리. 해방전 일본 정부는 학생들에게도 근로동원령을 내린 것. 그도 중2까진 공부가 됐으나 해방되던 해인 3학년 때부터는 가다말다 가다말다였단다. "학도근로동원이다해서 전시물품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에 학교 담임이랑 체육선생 등과 일하러 다녀야 했어요. 그런데 공장이 공습으로 불바다가 돼버렸어요. 1t 폭탄 몇 백개 떨어졌어요. 유탄으로 떨어진 것이 교바시였는데 중3때 봤어요. 그때 한 500명 죽었어요. 8월14일이었죠. 소나무뿌리액을 기름과 섞어서 비행기 연료로 한다 할 때였어요. 소나무가 많이 있는 데가 일본 신사, 큰 생나무 뿌리, 이건 하루에 하나 하기가 어렵대요. 뿌리채 가져가야 했어요."
해방전날, 동원 나가서 돌아올 때보니까 공습을 당해 철로는 막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는 그랬다.
"부모도 고향에 돌아갈 차비랄까 망설이시니까 저도 따라가게 될까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해방이 되어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어머니에게서 제주어 배워
소설가, 화가가 되고 싶었다. 허나 전쟁후 신산하던 일본에서의 삶의 배경은 그러하지 못했다. 우리말 교육? 못 받았다. 그런데도 그의 언어는 자연스럽다. 일본학교에 다닌 그가 어떻게 우리말을 저렇게 정확히 구사하는 것인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으리. "어머니는 집안에서 일을 하셨는데 봉제일의 끝손질인 단추 다는 일 같은 '마도메'일을 했어요. 내가 어릴 때 제일 싫었던 것이 그거였어요. 그 일을 할 때 폴폴 나는 솜같은 먼지가 싫었어요. 다른 분들도 대강 그렇게 일을 했지요. 양복을 재봉으로 하지만 집에서 바늘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었지요." 그 일을 하는 어머니와 집으로 찾아온 어머니 친구가 이야기할 때 제주말로 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제주어를 익혔다. 달걀을 독새기라 하는 것도 배웠다. 집에서 쓰는 어머니의 일본말은 차이가 났다. 어머니 발음이 달랐다. 들으면서 몇가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모어란 무엇인가' 고민이 왔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넘길건가. 내 모어란 어머니에게 배운 제주사투리로 갈 것인가, 내가 자라오면서 섞여서 써온 일본말인가 결론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어요. 귀에 들어서 배운 것은 다르죠. 일본말로 수건인 데누구이(手拭)를 친구분들은 데누구리해요. 그런데 데누구리라고 하면 일본 학생들에게 잘 통하지 않아요"
일본어도 잘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학교 때. 교사가 일본 유명한 시인이어서다. 한때 한국 시를 상당히 외웠고, 한국의 동요를 오래 연구하기도 했던 그다. 그의 마음에 쏘옥 들어온 시는 이상화의 '통곡(痛哭)'. 오래된 시를 그가 술술 읊는다. "하늘을 우러러/울기는 하여도/하늘이 그리워 울음이 아니다/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닯아/하늘을 흘기니/울음이 터진다…." 한국에서 일제시기 불렀던 윤석중의 '늙은 체전부'도 그 중 하나. "'아드님은 멀리 멀리 돈벌이 가고….'도 있었지요." 제주에서 불려지던 동요도 연구했던 그는 한때 문학도였다. 몇 개의 단편을 쓰고 관서대 삼천리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살면서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해서 자극을 받고 더욱 공부를 하게됐다는 양영후.
여러가지 인연으로 고베중고등학교에서 사회과, 세계사를 가르쳤던 그는 모교인 관서대에서 비상근 강사와 특별연구원으로 인권론을 주로 강의해 왔다.
# 귀화? 판단은 스스로 해라 강조
관서대학 2만5000명 가운데 동포학생은 50명. 그는 학생들과 여러 가지 인생 상담을 하고, 귀화문제도 얘기한다. "귀화? 결국 판단은 네가 해라 해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어떠냐. 스스로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자신의 성향이 단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는 50년대에 도일한 역사학자 강재언선생과 62년째 가깝게 지낸다. 오랜 교직생활을 통해 그가 강조하는 철학은 인간이 우선이라는 것. 그가 여러 갈등과 우여곡절 끝에 조총련을 그만 둔 것은 70년대 초. 1983년에 한국국적을 취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4·3이나 세계사 전체가 좌냐 우냐를 놓고 저항하고 있지요. 갈등과 대립,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대립이라 하는데. 이것을 넘어서면 무엇이 남느냐하는 겁니다. 제 생각은 사람이 먼저냐 사상이 먼저냐 할 때 사람이 아니냐고 일찍부터 생각해온 겁니다. 종교란 것도 종교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종교를 만든 것이죠. 민족에 대한 개념도 근대화의 산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소리를 울린 사람들도 있거든요. 한국사회에서 볼 적에는 함석헌, 구상 같은 이들이 그들이지요. 저 피카소도 만년에는 동심이 천심이다 했고, 걸레스님도 동심으로 돌아가는데. 바로 인간의 사상도 다 떠나는 거지요. "
황민화가 침투하고 있던 재일의 시대에 교육이 무엇을 추구해야하는가 고민했던 오사카제주도연구회장 양영후. 조선학교 19년, 일본고 9년, 일본대학 20년 약 50년을 교육자로 살았다. 허나 지금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떻게 재일1세대 땀의 산실인 학교와 교육에 대해 좋은 의미를 남길 것인가 하는 거란다.
# "어떻게 하면 웃음이 돌아오게 할 것인가"
이제 팔순. 다시금 찾아온 고향. 올때마다 변화하는 고향의 모습에 놀란다는 양영후. 뿌리를 옮겨 심은 나무처럼 재일의 삶에서 저 나뭇가지처럼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해서 고향에 와서도 왠지 스산해 뵌다. 풍부한 고향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다가올 대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이 나이가 되면 웃으면서 살아야하는데 좀 무거운 점이 있다고 웃는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웃음이 돌아오게 할 것인가. 이 고비를 넘기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이 과제라요."
희망은 가져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라는 양영후. 그는 지금도 열정적으로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그간 7년간 교육, 사회 전반에 관해 모은 자료를 정리해서 내년 두 권짜리로 내고 싶다. 그러면서 오래 신세진 학교도 정리하고, 제주도연구회도 정리하고, 서예하면서 즐겁게 노년을 보내고 싶다.
연구자이면서 교육자로 살아온 재일의 삶. 백발 휘날리며 그가 소나무 아래 서 있다. 제주갯바람에 소금기 뒤집어 쓴,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외소나무 한그루. 흡사 인간처럼 서 있는 그 나무 아래 그가 서 있다. 그는 많은 배경 가운데 그 나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저 나무에서 인생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재일의 삶을 사는 동안 참 많이 웃지 못했던 시대와 사람들이지 않은가.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