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을 그리기 전에 아름다운 것을 알아야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40. 김환기의 <사슴>
김환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 맨 처음 말한 화가
예술은 강렬한 민족 노래 한국을 떠나자 한국 더 많이 알게 돼
한국의 미와 정체성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의 국적을 갖는다는 뜻이다. 더 본질적으로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습속과 문화가 몸에 밴 사람임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는 한국의 국적만으로 한국인을 말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많은 국가의 이민자들이 한국의 국적을 갖게 됨으로써 같은 영토에 사는 귀화인들이 한국인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국적은 같아도 '과연 한국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고민은 비단 사회적인 것만으로 머물지 않는다. 예술에서도 늘 한국의 정체성, 즉 한국의 미란 어떤 것일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한국의 미를 주장했다고, 한국의 산천과 기물을 그렸다고 해서 한국의 미를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한국의 화가들이 국제화시대에 발맞추어 세계적인 것을 지향한다. 어떤 이는 괴테의 말을 인용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한다. 문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은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술은 일상의 문화와 달리 항상 표현이라는 단계를 거쳐 어떤 목표에 도달한다. 삶의 일상적 표현과 예술적 표현이 다른 것이 이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에 수입된 서양화의 도입은 재료만 들어 온 것이 아니다. 서양의 정신과 일본화 된 서양의 미학과 예술론이 같이 수입된 것이다. 이때 서양화를 공부한 많은 화가들, 근대화를 겪으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을 목격한 전통 서화가(書畵)들은 새로운 예술의 방법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의 형식도 구상미술과 함께 추상미술도 도입되었다. 사진이 대중화되면서 한국의 화가들은 사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는 미술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다. 근대화는 구미 열강의 침략, 구미와 빠르게 타협한 일제의 손에 의해 앞당겨졌다. 미술은 열강과 함께 수입되었다. 서양화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외치는 마당에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자기 땅의 미학을 드러낸 예술가들을 기억하라면 조각에 김복진, 이쾌대, 이중섭, 박수근, 이상범, 오윤, 추상에는 김환기, 이우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현대 개념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원동석은 "한국미술에도 현대의 개념미술이 있음을 지혜 있게 살려낸 국제적 수준의 작가 가운데 선구자는 김환기"라고 한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호는 수화(樹話).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면(현 안좌면) 읍동리에서 1남 4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1933년 21세에 동경일본대학 미술부에 입학, 이듬해 10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를 조직하고, 도고 세이지(東鄕靑兒)와 후지다 스구지(藤田嗣治)에게 사사를 받았다. 수화 김환기의 첫 작품은 1935년 졸업을 앞두고 제22회 이과전(二科展)에 첫 출품하여 입선한 <종달새 노래할 때>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김환기가 낭만주의자라는 것을 엿보게 하며, 고향의 섬에 따뜻한 남방의 풍토를 연상하게 하는 달콤한 풍경화이다.
25세가 되던 1937년 1월 동경 아마기(天城)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같은 해 3월에 연구과를 수료하고 4월에 서울로 귀국, 이후 1940년까지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였다.
1948년~1950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36세가 되던 1948년 12월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하고 서울 화신화랑에서 1회전을 개최하였다. 1952년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하여 개인전과 신사실파 3회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홍익대 미대 교수와 미대학장을 지냈고, 1954~1974년까지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5월 파리로 출국 제6회 개인전, 1957년 10월 벨기에에서 제9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3년 동안 유럽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다가 1959년 4월 귀국하였다.
1974년 7월 25일 뇌출혈로 뉴욕 포트체스터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사망(61세)할 때까지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4개월 동안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6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한국일보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을 수상, 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하였다.
김환기의 작품세계
김환기는 호적의 이름이 싫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 수(樹)와 그것에 어울리는 화(話)자로 아호를 만들었다. 김환기는 "우리 문명인을 진심으로 매혹할 수 있는 예술이란 대상의 작품 그 속에서 무엇인가 높은 예지를 인식하고 또한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제작 방식도 특이하였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화폭 앞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제작 중에 떠오르는 생각이 새 그림을 탄생시킨다. 사전에 구상하지 않고 화폭 앞에서 생각하면서 그려나는 방식인 것이다. 김환기는 "화가는 아름다운 것을 그리기 전에 아름다운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미술가는 눈으로 살며.....좋은 것을 알아내는 안목과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화의 표현대로,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다. 그는 비로소 한국을 떠나봄으로써 한국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또 한국을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김환기는 한국의 파란 하늘과 둥근 항아리, 그리고 새와 산과 달을 좋아하였다.
특히 항아리에 대한 추억이 깊었다. 김환기의 집을 항아리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항아리 수집광이었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항아리가 없는 데가 없을 정도로 젊은 날은 항아리에 열중하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간수하였던 항아리가 전쟁이 끝난 후 피난살이 3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온통 사금파리 천국으로 변해 있었다. 그 후로 다시 항아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는 항아리를 그리다 달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달이야말로 은은하고 둥근 것이 꼭 항아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김환기는 동료들이나 학생들에게 서서 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생활양식도 현대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현대적이란 그의 말대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다.' 마치 양복이 서양복장이 아니라 우리 식으로 만들어진 생활복인 것처럼 우리의 주거 또는 식생활도 현대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장하였다. 그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자연스런 생활을 좋아하였다. 항상 마음이 청명하고 명랑하게 살려는 것이 김환기의 일상이었다.
김환기의 작품 가운데 항아리는 그의 삶과 관련이 있다. <항아리와 매화>, <항아리>시리즈들은 항아리를 통해 동양과 한국과 달, 별을 보고자 하는 시초였던 셈이다. <항아리와 여인>은 한국적인 것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시도한 작품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맨 처음 말한 사람이 바로 김환기이다.
<사슴>은 색채와 형태면에서 단순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청색 주조의 이 그림은 가녀린 사슴을 선묘로만 그리고 있는데 사슴의 뿔과 입만 빨간색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늘은 파란색으로 채도를 조절하여 색면 분할이 되었다. 파란색의 원은 달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최상의 안온함, 평화,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한국의 미를 느낄 수 있다.
고고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미국에서 김환기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국의 멋이 죽었구나 멋쟁이가 갔구나"라고 한탄하며 그를 일러 "참 아름답고 희떠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영국의 한 미술사학자는 김환기를 일러, '아마도 한국의 가장 유명한 20세기 화가'라고 하였다. 김환기는 한국회화의 전통과 자연주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현대 추상의 독보적닌 화가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색과 형태에서 끊임없이 미를 추구한 화가였다. 즉 그는 문자 그대로 순수한 모더니즘 화가로 살다간 사람이었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