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영화 '지슬'은 비극이지만 희망을 이야기하죠"

[허영선이 만난 '사람'] '지슬' 영화감독 오멸

2012-12-27     허영선

 아직도 눈 속에 있는 듯 했다. 그가 그랬다. 그때의 추위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고. 작년 이 때, 그는 혹한에 있었다. 동광리 큰넓궤, 선흘리 동백동산, 돌문화공원 등 쌩쌩 한기가 덮치던 공간. 출연진들도 동상에 걸렸다. 너무나 징글징글했다. 기억하자. 4·3영화 '지슬'(감자)! 이 아름다움과 슬픔을 다문 4·3영화는 그렇게 나왔음을. 제주도 감독이 만들고, 제주어로 말하고, 제주에서 태어난 영화. 오로지 순박하게 살던 민중이 주인공 된, 그때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영화. 시사회를 봤다. 가슴 시렸다. 이 영화 '지슬'. 사상 첫 부산영화제 4관왕에다 세계로 진출, 살아 움직이게 됐다는 소식이다. 그렇게 뜨거운 이슈작 '지슬'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 된 오멸. 그를 만났다. 때마침 올들어 가장 풍찬 눈발이 폴폴 제주섬을 휘덮고 있었다.

   
 
 

 오멸 감독은

 본명 오경헌. 1971년 제주시 영평동 출생. 독립영화감독. 예술창작집단 극단 자파리연구소 대표. 제주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 제주대 미술학과 졸업. 8년여 거리예술제 '내 머리에 꽃을' 기획·연출, 그동안 2003년 단편영화 '내 머리에 꽃을'에 이어 장편 '어이그, 저 귓것'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뽕돌'로 전주국제영화에서 무비꼴라쥬상, '이어도'로 2011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부문에서 디지털 후반작업특별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올해 네 번째 장편 4·3영화 '지슬'은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넷팩상), 한국영화감독조합 감독상, 시민평론가상, 씨지브이(CGV) 무비콜라쥬상 등 사상 첫 4관왕을 석권하며 올해 최고의 핫 이슈가 됐다. 또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상영 2회 연속 매진을 기록, 내년 1월 제29회 미국 선댄스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이어 로테르담 영화제, 프랑스 브졸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세계로 파급되고 있다.

 
 
아버지는 전혀 4·3을 말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큰고모가 4·3시기 도망다니다 희생 당했음을. 어렴풋하던 4·3의 가족사. 그것을 비로소 들은 것은 영화 '지슬'을 찍고 나서다.

 "처음 찍을 때부터 이 영화를 통해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 했다는 감독 오멸. 확고한 작가정신, 자기 철학이 뚜렷한 이 감독은 '지슬'에서 거창하게 4·3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기억의 공간들 속에서 4·3을 은유적으로 풀어냈다. 4·3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게 쏟아지는 평가.
"저는 4·3은 이데올로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사람 중심으로 봐야된다고 봐요. 그 시대의 사람들을 밀착해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지슬' 구상은 4~5년 전, 4·3피난처였던 동광리 '큰넓궤'에 들어갔다 나오면서다.

 그는 공간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느낀다. "표현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그것을 느끼죠. 촬영 때도 갑자기 가슴을 콱 칠 때가 있어요. 4·3공간인지도 모를 땐데, 바람소리가 우는 소리로 들리고, 억새 움직임은 슬픈 춤으로 보이고. '이어도' 찍을 때 그런 생각은 더 강했어요. 아, 오늘 이 공간이 내 앵글에 배우로 들어왔구나. 저는 사람을 배우로 보지만, 공간에 담긴 모든 것들은 저와 관계된 배우로 봅니다. 구름, 나무, 바람 모든 것이 중요하죠."

 # '지슬' 전세계인이 봤으면 하는 바람

 '지슬' 시나리오 쓰고 영화를 찍을 때 바람 하나. 4·3에 대한 재인식을 할 수 있는, 그런 영화 한 편이 됐으면 하는 것. 사회성이 짙은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처럼 한 역할을 해줬으면 했다. "내 영화가 아닌 누구의 영화든 그런 역할로서 영화가 살아 움직였으면 했어요." 그런 진정이 닿았을까. 이제 '지슬'은 세계로 나가며 그 역할을 할 조짐을 보인다.

 "내가 거기 가기 전에는 갔으면 좋겠다 했어요. 세계사에서 제주4·3을 새로 바라봐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할 때니까요. 냉전시대에 파묻혀 버린 이야기였고, 미국이 개입됐기 때문이죠. 한국 사회에서도 그리 관심이 없고, 세계사에서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파급력 큰 영화란 매체로 스스로의 생명력을 갖고 밖에서 한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이 영화제라고 생각해요. 부산에서 상 받은 걸로 개인적인 영광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상을 더 받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내 영화가 전 세계인들이 다 봤으면 하는 그런 바람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운다는 오멸. 그의 꿈은 현실이 됐다. 내년 1월의 미국 선댄스. 연이어 유럽 5대 영화제 중 하나인 로테르담 스펙트럼 섹션에도 진출한다.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 감독 작, 김기덕의 '피에타' 등 10여 편과 함께 간다. 프랑스 브졸영화제와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직전 총장을 했던 미국의 명문 다트머스 대학에서도 틀게 되어있고,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미국 내 몇 군데 등에서도 틀 계획에 있단다. 영화는 영화제가 가장 강력한 루트다. 의미? "이제 시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라고 하지 않은 관객들이 영화를 본다는 데 가치가 있죠."

 # '지슬' 세계적 감독들 작품 속에 포함 날개

 "넌 언어가 안돼! 언어가" 육지 배우가 막 대사를 치는데, 제주도 감독이 나무란다. 제주도 사투리를 모른다고. 육지서 내려온 배우하고 제주서 찍고 싶어하는 영화감독 이야기인 '뽕돌'의 대사 한대목이다. 지금 한국의 젊은 감독 가운데 그가 주목받는 이유. 제주도 이야기를 갖고 제주도 언어로 인간의 보편성을 건드리기 때문 아닐까. 그는 확신한다. "이게 서울 중심으로 보니까 사투리죠. 문화의 중심을 나로부터 보면 '지슬'의 방식은 중요한 방식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화의 중심을 서울로 보니까 표준어로 바꾸는 거지요. 누가 볼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질문해보면 저는 제가 하는 예술 활동의 첫번째는 나와 내 가족들, 이웃들입니다."

 '지슬'(감자)의 가제는 흑돼지 이미지를 올려놓은 '꿀꿀꿀'. "지슬은 전세계 소울푸드죠. 영화는 현장에서 이야기 흐름이 바뀔 수도 있지요. 어느 할머니의 흑돼지 '복순이' 섭외가 잘 안돼서 돼지 신이 빠지면서, 결국은 감자 신 위주로 영화가 남게 됐어요." 영화 안에는 다양한 소스들이 있다. 게스트? 군인들만 육지에서 왔다.

 "앞에는 비극을 이야기했다면 뒤에는 희망을 얘기합니다. 희망을 도드라지게 얘기하진 않지만, 그 마지막에 동굴에 있는 꼬마 아이를 나, 우리로 보고 시나리오를 쓴 거지요."
흑백영화 '지슬'. 그는 너무 많은 색도 시끄럽다. "제주도의 컬러풀한 화려함 이면에 있는 슬픔은 안본다는 겁니다. 색으로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톤들을 좀 제거하고, 무채색으로 해서 슬픔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색들을 찾는 게 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는 '지슬'을 '끝나지 않은 세월2'로 본다. 이 영화의 총제작 지휘는 고 김경률 감독. 4·3첫 독립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을 만들고, 2008년 세상 떠난 이의 이름. 지난해 초, 묘소를 찾아 담배 한 개비를 꽂고 영혼으로나마 총제작 지휘를 해달라고 빌었다.

 영화 한 편의 성공과 실패에 젊은 감독들은 좌절하거나 일어선다. 누구나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기를 원한다. 허나 우리의 관심은 멀다.

 '지슬'은 300명 정도가 후원했다. "여건은 왜 만들어주지 않으면서 바라기만 하는가 해요. 숙제를 해결할 힘을 주지 않는 거잖아요. 서울 상업영화 제작사 이런 사람들 유혹도 있었죠. 큰 돈 없이 하자. 맨 땅에 하자였어요. 다행히 상을 받게 되니까, 이 영화를 후원해준 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우리영화'가 되잖아요. 이것도 경률이 형 덕분에 그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존재가 됐다고 생각해요. 부담은 많았죠." 문제는 예산. 정말 어려웠다. 처음 예산은 1억원이었으나 엄청 불어났다. 상을 휩쓸었으나 갚아야 할 빚 7000만원을 남겨 놓은 현재다. "엄청 돈 버는 줄 아는데, 죽을 맛이죠." 제작비 때문에 컷이 좀 모자란 것, 아쉽다.

 #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에 푹 빠져

 미친 폭풍 같던 20대를 뚫고 나서였다. 자아의 사춘기같은 거였다. 문득 돌아본 어느 날, 너무 세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 한 청춘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그림만 그리며 10년을 살아왔구나. 내가 내뱉고 싶은 말만 뱉으며 살아왔구나' 할 때 서른. 테러제이 팀을 만들었다.

 거리공연을 위해 나가면서 타인을 위한 것을 했다. 시청에서 "거리공연을 살립시다" 플래카드 걸고 대중들과 공유하면서 뚜럼부러더스의 뛰어난 예인 양정원도 만나고 지금 자파리연구소의 멤버들을 만났다. 허나 자발적으로 걸어간 예술의 길, 현실은 험난했다. 거리축제 5년되자 신용불량자 신세. 고지서를 방안에 도배했다. "독하게 버텼죠." 작품으로 메꾸자. 테러제이 해체한 것은 10년차 때. 축제 8년 기획하면서 이미 영화 '어이그, 저 귓것'을 만들었다. 극단 자파리 연구소를 운영, 5년 갚았다. "예술은 시대를 아우르면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 이끌어가려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죠. 타인을 생각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그러한 깨달음을 가졌죠."

 그는 미술, 축제, 연극, 영화 장르를 초월한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3년 전. 영화 수업? "내가 지금까지 본 영화는 모두 공부다. 이미 우리는 공부가 몸에 쌓여 있는데 뭣 때문에 두려워하나. 문장력은 없는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가 정확하다면 문장력을 뛰어 넘어서 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간 가리지 않고 봤던 수백편의 영화가 바로 그에겐 영화 공부였다, 서른 두 살에 '내 머리에 꽃을' '립스틱 짙게 바르고'에 이어 '어이그, 저 귓것' 등 3편은 자기 확인 작업. 하고 싶은 것은 미리 닥쳐서 하지 않고 사전에 해봐야 미련이 없다는 오멸. 그는 한국의 감독이 부러워할 만큼 상복이 많다. 슬프고 비극적으로 만든,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200만원 경비가 든 전작 4·3영화 '이어도'도 상 받은 작품이다.

 그의 파릇한 스물다섯 청춘의 숲을 흔들리게 한 이는 절대 순수의 거장 타르코프스키. '희생' '노스텔지아'.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잠들게 하는 작품이 그에겐 5분도 안되는 시간으로, 시처럼 확 흘러갔다.

 "4·3역사를 전국민이 재인식하게 해야 한다면 우리부터 꿈틀거리는 시발점이 돼야 한다"는 이 재능과 패기 넘치는 젊은 제주도 감독 오멸. 그의 희망사항. 전국 개봉을 앞두고 내년 3월1일부터 셋째주까지 '지슬'을 제주도 관객 1만명만 봐줬으면 하는 것. 그러면 우리나라 전체 시장에서 100만명 든 거나 똑같단다. 앞으로? 더 크게 만들라는 주문도 들어온다. 허나 서사로 다룬다면 너무 큰 제작비가 든다. 설문대 설화도 찍고 싶고, 언젠가 일제시대부터 현대사까지 시대를 관통한 사람의 이야기도 찍고 싶다. "예산이 많이 들겠죠?"

 그는 요즘도 12월30일과 31일 간드락 소극장에서 따뜻한 가족극을 올릴 준비에 바쁘다. 밤샘해도 모자란다며 젊은 감독, 눈발 속으로 달려갔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