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미술 '역(驛)'에서 만나다

[지역을 바꾸는 힘, 공공미술] 7.전북 남원시 '혼불'테마 작업-행·희·낭 프로젝트

2012-12-31     고 미 기자
▲ 혼불문학관 전경

2010년부터 3년 사업 통해 구 사도역~혼불문학관 미술 연결고리 시도
'대하소설의 시각적 재해석'…다양한 시도 눈길, 지역 참여 유도는 과제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상징하듯 '사람'이 갖는 의미는 크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장르를 넘어 지역과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지도를 뒤지고 뒤져 '전북 남원 사매면 서도리'를 마크한 배경에도 '사람'이 있었다. 소설가 최명희다. 소설 '혼불' 10권을 17년 동안 집필하는 놀라운 집념은 '혼불 문화'란 말과 함께 이 일대에 숨겨진 놀라운 잠재력에 눈을 돌리게 했다. 아직은 조심스런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마을미술 프로젝트였다. "마안 서도가 좋아졌등교?" "하모"

# '혼불'을 지역의 문화 숨통으로

전북 남원 사매면 서도리의 변화를 묻는 프로젝트의 이름은 소설 '혼불' 속에서 나왔다. '마안 서도가 좋아졌등교?'는 표준어로 옮겨 쓰면 '많이 서도가 좋아졌는가'이다. 잊혀져간 우리 것의 그리움과 가치를 상기한다는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가 중첩되는 말이기도 하다. 조각과 설치, 회화, 미디어아트를 전공한 전업작가 다섯 명을 하나로 묶은 것 역시 '혼불'이었다.

프로젝트의 중심이 된 곳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원 옛 서도역. 근·현대사를 살아온 서민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한 데다 무엇보다 소설의 배경지로 잘 알려진 공간이다. '옛 기차역에서 문학과 미술이 만난다'는 콘셉트를 중심으로 2010년에 이어 2011년에는 'Com-Public Art, 혼불 문학 뮤지엄'이 조성됐다. 그리고 올해 '피어라 매화낙지(落地)'까지 3년에 걸친 작업으로 마을은 분명히 달라졌다.

첫해 혼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세운 4m 높이의 17개 '혼불 폴(Pole)'이 마을로 들어서는 길을 안내한다. 10권 중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문장을 새긴 금속 기둥은 지역을 오가는 차가 많지 않음을 고마워해야 할 만큼 발을 묶는다. 지역의 역사와 사람사는 이야기는 벽화를 통해 마을에 채색됐다. '벽화, 사라지는 것 탄생하는 것'을 통해 세시풍속과 풍경이 혼불과 하나가 됐다. 옛 서도역에 대한 기억은 마을주민과 손자·녀의 얼굴을 담은 완행 '행·희·낭 열차'를 통해 오늘에 멈춰 섰다.

▲ 2010~2011 프로젝트를 하나로 묶는 ‘아트로드’
▲ 양재민·하승철 ‘북카페’(2010년)

# 채움의 힘 커지다

이듬해 작업은 보다 촘촘하게 진행됐다. 참여 작가수도 14명으로 늘었고 지역주민과 청소년들의 손과 마음까지 보태지며 '함께(Com)'의 의미가 강조됐다.

이번에는 '스토리텔링'이 전면에 나섰다. 앞서 작업에서는 배경이 됐던 구 서도역사(驛舍)에도 문화를 통한 입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사매면에 단 하나 남은 사매초등학교 학생들이 꿈이 돌을 날게 한다는 시도는 작품 명 그대로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김순임 작가 외 초등학생 40명)로 지면에 전시됐지만 보는 이들의 눈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해보였다.

무엇보다 압권은 2010년과 2011년 마을미술프로젝트를 하나로 묶는 상징물인 '아트로드'다. 이 것이 없었다면 아마도 마을을 찾기가 더 힘이 들었을지 모를 만큼 랜드마크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다. 혼불을 다 읽지 않더라도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 있게 버려진 창고 벽면 샌드위치 판넬을 채운 '혼불서가'(2010년, 양재민·하승철·양학식) 옆으로 이전 방앗간이던 낡은 건물이 '북카페'(2011년, 양재민·하승철)로 거듭났다.

▲ 2011년 작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

스토리텔링의 맛은 '이야기 정원'에서 찾을 수 있다. 폐생활도구가 혼불 캐릭터로 거듭나 소설 속 흥미진진한 상황과 사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미로정원인 탓에 출발과 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적잖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정크 아트 특유의 소박하면서도 편안함과 묵직한 대하소설의 믿기 어려운 조합이 관심을 끈다. 연출된 장면에 대한 소설 속 대목이 친절하게 소개되는가 하면 길의 끝 높이 10m의 '솔라 트리'(정동암·하승철)는 무공해 태양열에너지가 생산되도록 만든 기능성 조형작품으로 개발의 속도가 속 멈칫하고 시간이 멈춘 듯한 마을을 대변한다.

그리고 올해 작업은 최명희 생가와 혼불문학관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문학에 대한 시각적 재해석 작업 역시 사업 초기 예술성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으며 탄력을 받았다. 대신 영구성에 대한 고민을 보태며 매듭을 묶듯 연결고리를 만들어냈다.

▲ 혼불문학관 관람객들이 남긴 돌들

# '사람'과 '사람', 그리고 문학관

이런 것들이 가능한데는 물론 '사람'이 있었다. 결과물들을 찾으러 간 길은 올해 우리나라를 덮친 세 번째 태풍 산바 주의보가 내려진 탓에 더 멀고 힘들었다. 하루 시내버스가 단 4차례 들어오는 외곽 마을 사정까지 보태지며 체감 거리는 상당했다. 구 서도역과 혼불 문학관을 물어 간신히 찾은 프로젝트가 더 반갑고 숨은 그림을 찾는 듯한 매력까지 보태졌다. 일종의 '소설가 최명희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만남 속에 아쉬운 것 역시 '사람'이었다. 애써 구 서도역사 주변을 누볐지만 혼불문학미술관은 반 밖에 볼 수 없었다. 시설 중 일부의 문이 잠겨 있었고 태풍 뒤끝 정비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설치물의 훼손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마을 정미소 인근에 차를 세우는 생각 없는 실수로 경보가 울리면서 어르신 몇 분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와 관련한 설명은 도통 들을 수가 없었다. 고령화·공동화 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이 대상이 되다보니 생긴 문화소통의 한계다. 지역에 분명 변화는 있지만 마을이 느끼는 체감 정도는 떨어지다 보니 저절로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행히 혼불 문학관에서 귀동냥을 하고 서 너 차례 마을길을 헤매고 우연처럼 세 차례 프로젝트의 결과물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문학관'은 제주 문학인들의 바람 중 하나다. 간절하지만 지역적 설득력을 얻는 과정이 쉽지 않다.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마을미술 프로젝트와의 연계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일 듯 싶다. 미술이나 문학 등 장르에 매어 있기보다는 의미 있는 결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얻어간다 것에 보다 구미가 당긴다. 관건은 설득과 소통이다.

 "미술 물꼬 통해 변화는 시작 된다"
●인터뷰/정동암 행·희·낭 프로젝트 팀 대표작가

▲ 정동암 행·희·낭 프로젝트 팀 대표작가

'고향'과 '대하소설'. 예술가를 자극하는 아이템으로 이만 한 것은 없다. 그리고 그만큼 무겁고 힘든 과제도 없다.

'행·희·낭 프로젝트'팀을 끌고 벌써 3년째 혼불과 씨름을 하고 있는 정동암 대표 작가는 '변화'를 얘기했다.

참여 작가도, 표현해낸 작품도, 지역도 변했다. 정 작가는 "대부분 전업작가다 보니 처음에는 작품성에 무게를 두면서 시행착오도 많았다"며 "3년차까지 사업을 진행하다보니 지역 주민 참여나 영구서에 대한 고민과 실험이 많았졌다"고 말했다.

1차년도 사업에서 벽화 등의 작품이 많았던데 반해 2차년도부터는 생활 속 도구 등을 활용한 설치 작품이 늘었고, 3차년도에는 단순한 벽화가 아니라 도자기로 구워내 벽화에 응용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 그렇다.

외곽지역이다보니 상주 작가를 둘 수 없는 아쉬움은 없지만 지역에는 분명히 자극이 됐다. '혼불 문화'라고는 하지만 학계를 중심으로 한 관심이 많았을 뿐 일반에 있어 최명희와 소설 '혼불'은 멀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정 작가는 "참여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소설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혼불을 보다 더 잘 알게 됐다"며 "대중적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처음 구 서도역을 중심으로 했던 작업이 이제는 최명희 생가와 혼불박물관까지 확대됐다.

정 작가는 "마을에서의 관심이 적은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마을미술프로젝트에서 '미술'은 당장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변화로 이어지는 과정"이라며 "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들 지역을 남원의 새로운 문화 아이템으로 키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등 중장기 프로젝트의 면모를 곧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