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안에 숨 쉬는 문화예술의 텃밭으로
[지역을 바꾸는 힘, 공공미술] 10.강원도 인제군 시인 박인환 거리-분주한 상자
마을미술로 '문학관'설립 등 자생 방안과 연계 눈길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그 벤취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사라진다 해도…"(박인환 '세월이 가면'중)
시인 박인환(1926∼1956·사진)은 우리나라 문학사 중 '모더니즘'하면 떠오르는 대표시인 중 한 명이다. 강원도 인제는 지역 출신인 이 시인을 문화상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오래 고민했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 불쑥 열쇠 하나가 내밀어졌다. '마을미술 프로젝트'였다.
# 준비된 예술가와 인제의 만남
지난해 10월 강원도 인제에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박인환 문학관' 개관이다. 개관식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또 지역 문화예술인과 학생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눈도장을 단단히 받았다. 그럴 수 있었던 데는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있었다.
언뜻 그 과정이 시인 박인환의 문학 인생과 맞물린다.
의학도였던 박 시인은 광복과 함께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1945년 말 열아홉 나이에 프랑스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이름을 딴 서점 하나를 낸다. 서울 종로 3가 2번가의 20평(약 66m²) 남짓한 '마리서가'는 새로운 예술에 목말라 하던 문인 예술가들에게 알려지며 새로운 문학예술이 싹트는 작은 텃밭이 됐다.
그런 시인의 이미지를 활용하는데 대한 고민은 많았지만 '어떻게'가 문제였다. 인제군이 '박인환 거리'를 구상하고 있을 즈음 여성작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인 '분주한 상자'(대표작가 이원경)가 사업계획서를 내밀었다. 문화예술 호흡이 조금이라도 더 필요한 지역을 찾던 작가들에게 거리감이 멀고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인제'가 눈에 들어왔고, 문화예술을 통한 지역 활성화 방안이 필요했던 지역자치단체에는 '준비된 예술가'가 찾아왔다.
그렇게 인제읍 상동리 산촌민속박물관 진입로 100m 구간에 박인환 시인의 거리를 조성됐다. 강원 인제군의 관문인 정중앙휴게소에서 박인환문학관까지 인적이 뜸한 길섶이 걷고 싶은 거리로 탈바꿈했다.
작업이 마냥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참여 작가들이 대부분 서울 작가들로 구성되면서 접근성은 물론 현지에서 먹고 자는 일반적인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처음 쌍수를 들고 환영하던 자치단체까지 작업 진행에 있어서는 걸림돌이 됐고 지역주민들 사이에서는 타지 작가들의 움직임을 대놓고 불편해 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마을미술에 대한 이해 부족도 걸림돌이 됐다.
하지만 산촌민속박물관만 덩그러니 있던 공간에 2009년 '시인 박인환-만남, 그 세월이 가면'을 통해 8점의 거리 미술작품이 들어섰다.
박인환문학관까지는 말글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시 벤치와 사람이 지나가면 시를 들려주는 숲 조형물이 있다. 새로 조성된 주택 지구 대문에 시화문패도 달렸다. 지역 인제남초등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미술놀이 프로그램의 결과물들이다.
2010년 한 해를 쉬고 2011년에는 인제군이 '분주한 상자'팀에 SOS를 쳤다. '지역 문화코드'조성을 위한 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시 짓기 블록놀이과 시가 열리는 사과나무, 하늘이 비치는 시벤치, 책읽는 목마상, 시인의 품으로 등 5개 작품을 자리를 잡았다.
사람보기 힘들었던 공간은 이제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열리는 지붕없는 '사랑방'으로 바뀌었다. 마을미술이 문학관을 끌어당겼고, 문학관은 다시 마을미술을 불렀다. 시간은 걸렸지만 들쭉날쭉한 작품의 질이나 연속성에 대한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문화향유에 대한 지역의 요구를 해소하는 것과 함께 문화 경쟁력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하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좋은 예가 되고 있다.
| "마을 미술 '독' 아닌 '약'으로 써야"
멀리 강원도에서의 작업을 결정하고 단단히 짐을 쌌던 만큼 작가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대부분 작품들이 작가의 개인 작품 수준으로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 특징이 된 것도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가능한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는 재료를 찾다 보니 철판이나 브론즈 작업이 많이 이뤄졌다. 그만큼 재료비며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작가는 "다른 괜찮다고 했지만 '참여 예술가의 경제적 지원'이라는 마을미술 사업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작업들이었다"며 "완성된 후 박인환 문학관이 조성되고 2011년 사업을 위해 인제군에서 직접 수소문해 찾아왔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박인환 거리는 문화테마거리 사업 등과 맞물리며 주변에 문화 호흡을 쏟아내고 있다. 당장 큰 변화는 아니더라도 지역 문화에 활력을 주는 시작점이 되기를 바랐던 작가들이 바람이 닿은 때문이다. 시를 따라 걷는 길, 앞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점자와 부조를 활용한 작품들이 배치됐고 무엇보다 주변 경관에 거스르지 않는 작품 배치는 이들 여성작가들만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작가는 "마을미술이 지역의 변화를 이끄는 장치가 될 수 있지만 자칫 잘못 손을 대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며 "마을미술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꼭 풀어야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