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5년 북촌리 뒷개마을 선창 서쪽 암반 위에 축조된 도대불로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15년 북촌리 뒷개마을 선창 서쪽에 건립
전기 공급된 1973년까지 '등대' 역할 수행
일부 보수 불구 옛 모습 남아 역사적 가치
제주어업 발전사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는 과거 제주도의 대표적인 해촌형 부락으로 불렸다. 지금처럼 생업이 뚜렷하지 못했던 시절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다양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됐다고 한다. 어업이 발달했던 만큼 북촌리 포구에도 밤바다를 밝히는 옛 등대인 도대불이 있었다. 지금도 북촌리 뒷개마을 선창 서쪽 암반 위에서 도대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98년 역사 민간등대 역할
북촌리 도대불에 대한 기록은 지난 2003년 6월 북촌초등학교 총동창회가 발간한「북촌초 60년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자에 따르면 북촌리 도대불은 북촌리 선창 서쪽 암반 위에 위치하고 있다. 잡석을 이용해 상자형으로 축조됐다는 기록이다. 도대불 남쪽으로는 점등 시에 도대불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도대불 상단에 건립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높이 57㎝, 너비 27㎝ 크기인 건립비에는 '燈明臺(등명대)'와 '大正(대정) 四年十貳月(사년십이월)'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토대로 1915년 12월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건립비에 새겨진 등명대와 달리 마을주민들은 도대불로 불렀다고 했다.
또「북촌초 60년사」에는 도대불 상단에 등피를 걸 수 있는 '木臺(목대)'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1949년 4·3사건 당시 소실됐으며, 이후 목대 대신 유리상자를 올려두고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2003년 6월 북촌초등학교 총동창회가 발간한「북촌초 60년사」에 실린 북촌리 도대불 모습.
도대불 등화는 이사무소 급사가 어부들에게 위임받아 담당했으며, 1973년 마을에 전기가 공급되면서 가로등이 들어서자 도대불은 기능을 잃게 된 것으로 기록됐다.
도대불의 규모는 높이 260㎝, 하단 너비 240㎝, 상단 너비 193㎝로 명시됐다.
북촌리 도대불에 대해서는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가 2005년 12월 발간한「미신고 4·3사건 희생자 실태 표본조사보고서 북촌·도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책자에는 북촌리 도대불이 도내에 남아 있는 도대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또 북촌리 도대불은 민간등대 역할을 했으며, 썩은 나뭇가지로 불을 지피거나 호롱불 혹은 석유 등피를 사용했다고 기술했다.
이밖에도 4·3 당시 총탄에 의해 도대불 기념비 일부가 파손되고, 도대불 정면에도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 우측면도
▲ 정면도
△ 옛 모습 유지 역사적 가치
북촌리 도대불은 지금도 철거되지 않고 북촌리 포구를 지키고 있다. 현재의 모습도「북촌초 60년사」에 나온 형태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 북촌리 도대불을 현장 답사한 결과 도대불 상단에 세워진 건립비를 확인할 수 있었고, 도대불 건립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글자도 남아 있었다.
도대불 규모 역시 높이 202~277㎝, 하단 너비 215~246㎝, 상단 너비 190~210㎝로 측정, 과거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도대불 상단에 불을 밝히는 유리상자 등의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군데군데 보수작업이 이뤄진 흔적도 확인됐다.
이철림 북촌리장(56)은 "지금은 도대불 돌 틈에 시멘트가 채워져 있지만 과거에는 시멘트 없이 돌만 쌓여져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태풍 때 돌이 일부 무너지면서 복구가 이뤄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철림 이장의 증언처럼 도대불에 사용된 돌 가운데 일부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과거 훼손된 부분을 복구하기 위한 작업이 이뤄졌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하지만 북촌리 도대불의 경우 일부 복구작업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옛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 제주의 어업문화를 보여주는 유산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100년 가까이 북촌리 포구를 지키며 어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건축물인 만큼 체계적인 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특별취재팀=사회부 김경필 차장 대우, 한 권·김하나 기자 / 자문=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대부분의 도대불은 출항한 어선에게 밝은 불빛을 좀 더 멀리 전달하기 위해 포구의 가장 끝에 위치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북촌의 도대불은 복촌리 포구 서측의 '구짓루' 동산 위에 축조되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포구확장에 따라 철거되거나 원형이 훼손되는 위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현재까지도 북촌리 도대불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도대불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북촌리 도대불은 연대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규모는 정면을 기준으로 하부의 경우 가로 215~221㎝, 세로 238~246㎝이며, 상부는 가로 190㎝, 세로 190~210㎝이고 높이는 260㎝로 하부와 상부의 가로, 세로의 크기가 제각각 다르지만 이러한 점이 오히려 독특한 형태적 아름다움을 갖게 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지난번 소개되었던 고산리 도대불이 가로와 세로의 폭에 비해 높이가 긴 비교적 균형 잡힌 장방형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갖는 반면 북촌리 도대불은 상부와 하부의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다르고 또한 가로와 세로의 폭에 비해 높이가 약간 높은 정도로 축조되어 정방형의 형태를 가지면서도 상부로 갈수록 좁아지게 축조하였던 사람들의 손맛이 그대로 묻어나는 아주 독특한 형태적 아름다움을 갖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북촌리 도대불은 형태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축조시기와 명칭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의미를 갖고 있어서 도대불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자료라 평가할 수 있다.
북촌리 도대불 상부에 작은 건립비가 세워져 있는데 '御卽 □□□□ 燈明臺 大正四年十貳建'로 표기되어 있어서 축조시기가 1915년 12월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제주문화원「제주문화」18호(2012년 12월)에 게재된 '등명대, 그 첫불씨를 찾아'에 따르면 도두동과 삼양동에서 도대불 건립비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도두동과 삼양동에도 도대불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북촌리 도대불 건립비 내용과 도두동, 삼양동의 건립비 내용들을 비교하여 정리하면 두 가지 공통점, 즉 등명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12월에 축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御卽□□□燈明臺 大正四年十貳建'는 '御卽□記念燈明臺 大正四年十貳建'라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며 누군가가 축조를 기념하여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러한 몇 가지 공통점으로 볼 때 북촌리, 도두동, 삼양동 도대불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형태도 유사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추측이 되며 이에 대한 의문점이 남는다.
특히 누가 축조하였으며 도두동과 삼양동 도대불의 위치와 사라진 시기와 배경, 등명대의 용어 등 의문점에 대해서도 보다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새로운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