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속의 섬' 우도 주민 생활상 간직한 건축유산

[제주의 어업문화유산 '도대불'을 찾아서] 12. 영일동 도대불

2013-11-13     김경필·한 권·김하나 기자
▲ 조선시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도면 조일리 영일동 방사탑이 기능을 잃게 되자 주민들이 1962년 10월11일 방사탑 위에 도대불을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2년 기능 잃은 방사탑 활용 도대불 축조
관청주도로 건축된 근대식 우도등대와 구분
주민 필요에 의해 점등 삶의 흔적 고스란히
 
제주시 우도면 조일리(朝日里)는 우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 햇살을 맞이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터가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다. 해안은 암초가 많아서 어류가 서식하기 좋은 어초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변해역에는 삼치와 멸치, 고등어, 전갱이, 오징어, 복어 등 다양한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우도면 조일리 영일동 선창에도 과거 어두운 항로를 밝히는 도대불이 있었다.
 
방사탑 활용해 축조
 
우도면 조일리 영일동 도대불은 방사유적을 활용해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때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인 방사탑이 영일동 선창 진입로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방사탑이 기능을 잃게 되자 그 위에 도대불을 축조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일동 도대불에 대한 기록은 옛 북제주군이 1998년 발간한「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자에 따르면 영일동 도대불의 크기는 높이 530㎝, 너비 450㎝다. 바닷가 현무암을 대충 다듬어서 쌓아올렸고, 방사탑 속에는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탑 윗면에는 콘크리트로 사각형을 만들었으며, 점등도구를 넣을 수 있는 집 형태의 시설을 만들었다. 지금도 콘크리트 윗면에 구멍 3개가 뚫려 있는데, 측면에는 '1962년 10월 11일 공사'라는 음각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방사탑이 기능을 잃게 되자 도대불로 활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음각이다.
 
방사탑은 마을의 액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워졌다고 한다.
 
영일동에는 선창에 축조된 방사탑 외에도 1개의 방사탑이 더 있다. 영일동 주택 밀집 지역의 동남쪽 경작지에 원뿔형 형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도 바닷가 현무암을 다듬어 쌓았고, 내부에는 잡석 채움을 했다. 영일동 선창에 세워진 방사탑과 모양만 다를 뿐 축조방식은 비슷하다. 다만 경작지에 세워진 탑은 다른 용도로 활용되지 않았다.
 
민간등대 대표 건축물
 
▲ 영일동 도대불 정면
우도면 조일리 영일동 선창에 축조된 도대불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영일동 도대불은 1962년 10월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우도에는 오래 전부터 밤바다를 밝히는 우도등대가 있었다.
 
우도등대가 축조된 시기는 1906년으로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지어진 등대다. 이후 마라도등대(1915년)와 산지등대(1916년) 등이 불을 밝힌 것으로 진해진다.
 
하지만 우도등대는 관청 주도의 근대식 등대로 민간에서 지은 도대불과는 차이를 보인다. 영일동 주민들은 근대식 등대가 운영되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도대불을 축조했다.
 
그런 점에서 영일동 도대불은 관청 주도의 근대식 등대와 민간 주도의 도대불을 구분하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같은 지역에서 근대식 등대와 도대불이 함께 사용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영일동 도대불이 어떤 이유로 축조되고 어떻게 사용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야간 조업을 위해 주민들이 축조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도등대가 지어지고 56년 후 주민들에 의해 도대불이 세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주민들의 힘들었던 삶을 짐작케 했다. <특별취재팀=사회부 김경필 차장 대우, 한 권·김하나 기자 / 자문=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건축전문가에게 듣는다]
 
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이전까지 소개된 도대불은 제주 본섬의 포구에 자리 잡아 근해어업을 나갔던 어부들에게 희망의 불빛을 전달했던 사례들이었으나 이번에 소개되는 지역은 우도이다. 우도 역시 섬이기에 도대불이 있다는 점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우도의 도대불이 갖는 색다른 의미는 장소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 규모적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먼저 장소적인 측면에서 우도는 일본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약탈한 많은 물자들을 일본으로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해 현대식 등대를 우도에 세울 필요성이 높았을 것이다. 바로 우도등대다. 등대 고유의 기능과 목적을 원활히 달성하기 위해 대부분 지대가 높은 벼랑 끝이나 곶, 혹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최대한 높이 짓고 바다의 염분과 거센 파도에 버틸 수 있는 구조물을 건축하여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건축여건과 기술적인 수준을 고려하여 볼 때 상당히 최고수준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현대식 등대와는 전혀 다른 목적과 다른 형식으로 축조한 민간등대, 도대불이 우도에도 축조되었다. 우도 도대불은 영일동 선창 진입로 부근에 축조되어 있다. 우도라는 작은 공간속에 세워져 먼 바다에 불빛을 보내는 등대 기능이지만 하나는 일본에 가까운 높은 곳, 다른 하나는 제주 본섬에 가깝게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은 일제강점기의 현대식 등대와 민간인의 도대불의 역할을 단적(端的)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도 도대불의 또 다른 특징은 기능적 측면인데 새롭게 축조한 것이 아니라 마을로 좋지 않은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방사탑을 1962년 10월11일 부분적으로 공사하여 도대불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규모에 있어서도 가늘고 긴 형태의 방사탑이 아니라 아랫부분은 정사변형으로 넓고 윗부분이 끝나는 지점에서 네 면의 끝이 모이는 형식이어서 사다리형에 가까운 매우 독특한 도대불이다. 기단과 몸체의 구분이 없고 상부에만 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점등도구를 설치하였다. 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에 3개의 구멍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구엄리 도대불과 같이 철재 점등도구를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던 방사탑에서 마을의 어부를 지켜주는 도대불로 변형되었지만 보호하고 지켜주는 기능은 변함이 없는 셈이다.
 
우도 도대불은 규모적인 측면에서도 다른 도대불보다 더욱 크고 높게 느껴진다. 특히 높이만큼이나 폭이 넓어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갖게 하는 것도 색다른 세련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제주 본섬에서 떨어져 외롭고 거센 자연환경을 견디고 액운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아 크고 높게 방사탑을 축조하였을 우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우도의 도대불은 여러 가지 함축적인 사연들이 가득 담겨진 문화유적임에는 틀림없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일제강점기의 현대식 등대와 함께 잘 보전되고 자원으로 활용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