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중심의 첫 생존권 투쟁 한국 현대사 큰 획
[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10. 제주해녀 항일항쟁 ①
2014-06-25 고 미 기자
1930년 성산포사건 촉발…구좌·우도서 238회 집회·시위
연인원 1만7000여명 참여한 최대 어민·민중 운동사 평가
역사적 평가보다 마당굿 등 '기억의 투쟁'으로 먼저 각인
1983년 2월 하순 서울 국립극장 실험무대는 날카로운 시대정신으로 흔들렸다. 제주 마당굿의 시작점인 놀이패 수눌음의 '잠녀풀이'다. 몇 번이고 '번역서'(?)를 들춰가며 극에 몰입한 사람들의 가슴에 남은 것은 '기억의 투쟁'이었다. 제주 극단의 첫 서울 공연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 내용이 더 강렬했다. 꼬박 50년 전 제주 땅에서 벌어졌던 실화라는 점은 말도 통하지 않고 어찌 보면 낯설기까지 한 공연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일제 수탈·탄압 항거 무대화
'잠녀풀이'는 놀이패 수눌음의 1982년 작품이다. 일제말기 제주 잠녀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한글교육을 하며 일본에 저항하다 범법자로 몰려 재판 끝에 모두 처형당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중 극 형태로 그들의 넋을 기리는 굿까지 벌어지는 등 우리나라 마당극사(史)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니 당시 작품성이 어땠는지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려낸 것이다. 사상의 자유를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역사·사회적으로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무대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시대적 아픔을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하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을 선택했다. 일제 수탈정책과 탄압에 사회 가장 작은 구성원이었던 잠녀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그려낸 작품은 소재나 대사의 투박함에도 불구하고 중앙 무대의 호평을 받았다.
그 배경이 됐던 것이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제주시 구좌읍·성산읍·우도면 일대에서 펼쳐진 '제주 해녀 항일항쟁(이하 잠녀항쟁)'이다. 잠녀항쟁은 연인원 1만7000여명이 참여, 무려 238회의 집회 및 시위를 전개한 우리나라 최대 어민운동이자 여성운동으로 평가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잠녀항쟁을 일제 최대의 민중운동으로 꼽는 이도 있다. 제주지역에서는 법정사 항일투쟁, 조천 만세운동과 함께 제주 3대 항일운동으로 부른다.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크지 않았던 때였지만 잠녀들은 달랐다. 지금은 잠녀항쟁을 직적 기억하는 이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계석 할머니의 기억에 "야학공부가 생애의 커다란 전환점이 됐으며, 잠녀항쟁을 주도하게 된 인연을 맺게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잠녀풀이'의 의미가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극 중에는 야학에서 글을 깨우치고 외압에 대항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 나온다. 이 쯤 되면 1994년 놀이패 한라산이 '잠녀풀이'를 다시 무대화하면서 실낱같은 기억의 끈을 남긴 것이 그나마 다행인 셈이 됐다.
야학 통한 깨우침이 바탕
당시 야학은 사회주의 계열 혁우동맹 청년들에 의해 개설, 운영됐다. 잠녀들의 사회성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공산주의 선전을 목적으로 결성됐다는 점은 향후 잠녀항쟁의 사회적 평가에 있어 장애가 되기도 했다.
잠녀항쟁은 1930년 '성산포 사건'으로 촉발됐다. 당시 성산포에서 해녀조합이 잠녀들이 수집한 우뭇가사리를 부정판매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세한 잠녀와 출가 잠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20년 조직된 해녀조합은 그러나 도사(島司)가 조합장을 겸하는 등 공식적인 '수탈 기구'나 마찬가지였다. 공동판매는커녕 일본 상인의 독점이 비일비재했고 경매 입찰을 하더라도 제대로 가격을 주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성산포 사건도 그런 과정에서 불거졌다. 조합 측에서 경매입찰을 했지만 지정가격이 원래 시간의 절반에 불과 했는 데다 이마저도 이행되지 않으면서 잠녀들이 도사 면담 요청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1931년 구좌면 하도리에서도 비슷한 부정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이웃 종달리·연평리·세화리 등의 잠녀들에게 알리는가 하면 각종 모임을 통해 해녀조합 등 각종 관제조합을 깨뜨리자는 결의들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1937년 1월7일 현재 세화리 전항동 옛 오일장터에 모인 잠녀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해녀조합의 불합리함과 시정을 요구했다. 다시 12일 제주도사인 다구치가 순시차 구좌면을 통과하는 것에 맞춰 호미와 창을 든 잠녀 1000여명이 현재 '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진 일대에 모였다. 사태는 도사 일행이 잠녀들의 요구 조건을 잘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진정되는 듯 했지만 돌아온 것은 관련자 검거 등 실력 행사였다. 결국 같은 달 23일 잠녀 1500여명이 세화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잠녀항쟁이 막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나흘 후인 27일. 목포경찰대까지 제주에 들어오는 등 무력 진압에 의한 것이었다.
사회주의 색채 평가 절하
잠녀항쟁은 말 그대로 '여성중심의 첫 생존권 투쟁'이었다. '항일운동'같은 역사적 사명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제주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근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사실이다. 내용이 어찌됐건 일제의 강제 수탈에 항거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다. 감정적인 판단으로 항쟁을 주도한 것도 아니었고 사건을 전개해 가는 방법에 있어서도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이라고는 생각할 수없을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70여년 간 잠녀 항쟁은 '잊혀진 역사'가 됐다. 사회주의 색채가 있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동안 정부로부터 외면당하는 사이 기억은 바래지고 생존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등 '아픔'이 됐다.
1995년 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이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다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과정에 있어 이들 기억에 대한 불편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역시 현실이다. 우리나라 단독 등재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행여 한·일 공동 등재에 있어 '항일운동'으로의 가치는 국가간 연대에 있어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잠녀 문화에는 분명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사회적 가치가 포함돼 있다. 잠녀항쟁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 미 기자 ※ 이 기획은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와 함께 합니다.